노을 보다 붉은... 이 풍경 놓치면 후회합니다
[돈대를 찾아가는 길 15] 화도면 여차리, 홍예문이 반겨주는 미루지돈대
지난 봄 미루지돈대에 간 적이 있다. 원래는 돈대를 보려고 갔는데 우리는 그만 딴 짓에 눈이 팔려 돈대 구경은 뒷전으로 미뤄 버렸다. 미루지돈대에서 통통하게 살 찐 야생 부추를 발견한 순간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 쪼그리고 앉아 부추를 뜯기에 바빴다. 그런 우리에게 미루지돈대의 아름다움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부추 밭으로 기억되는 미루지돈대는 사실 강화도 돈대 건축 기법의 총체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돈대 성곽 축성의 여러 공법뿐만 아니라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도 볼 수 있다. 또 성벽 위에 덧쌓은 여장(성가퀴)도 일부 남아 있으니, 돈대의 원형을 알고 배우기에 좋은 돈대다.
'홍예문'이 예쁜 미루지돈대
강화도에는 조선시대 해양관방(海洋關防)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한강이 서해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강화도는 해양에서 한양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유사시 피난처이기도 했다. 이러한 까닭으로 17~19세기 말에 걸쳐 해양관방 시설들을 건립하였다. 이는 강화도를 수호할 목적이기도 했지만 수도인 한양을 지키기 위함이기도 했다.
조선은 강화도에 군사기지인 5진 7보를 설치하는 한편, 돈대(墩臺)와 외성(外城) 내성(內城) 등 이중삼중의 방어체제를 갖추었다. 특히 강화도 해안(99km)을 따라 구축한 54개의 돈대는 강화도를 수호하기 위한 핵심적인 방어시설이었다.
미루지돈대(彌樓只墩臺)는 여타의 돈대들과 함께 숙종 5년(1679)에 축조되었다. 그해 봄 48개의 돈대가 한꺼번에 만들어졌으니 실로 큰 국책사업이었다. 이렇게 많은 돈대를 한꺼번에 만든 데는 여러 까닭이 있지만 그중에는 빈민 구휼작업의 일환으로 시작한 측면도 있었다.
'소빙하기'였던 숙종 때 돈대를 만든 까닭
숙종 치세 때는 전 세계적으로 기상이변이 잦았다. '소빙하기'로 불릴 정도로 평균 기온이 떨어졌고, 이로 인해 농작물 생산에 큰 차질이 왔다. 여러 해 흉년이 들자 대기근으로 이어져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숙종은 일종의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산성을 쌓고 돈대를 만드는 국책사업을 벌였다.
돈대를 만드는 작업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공력이 필요했다. 둘레가 120여m에 성벽의 높이가 약 5m 가까이 되는 돈대를 48개나 만드는 일이었으니 얼마나 많은 물자와 공력이 들어갔을까.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단순 노동을 하는 잡역부며 인부들이 강화로 와서 돈대 축성 작업에 투입되었다.
큰 암반에서 돌을 떼어내는 작업은 겨울에만 가능했다. 암반에 작게 구멍을 내고 그 구멍에 마른 밤나무 토막을 꽂는다. 그리고 물을 부어두면 물에 불은 밤나무 토막이 꽁꽁 얼면서 팽창한다. 낮에 기온이 올라가면 얼었던 게 녹았다가 밤에 영하로 떨어지면 또 팽창하기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바위가 깨지고 떼어진다.
이렇게 떼어낸 돌을 각 돈대 작업 현장까지 옮기는 데도 많은 일손이 필요했다. 돈대를 쌓는 현장 근처에 바위가 많지 않을 경우 먼 곳에서 돌을 가져오는 경우도 있었다. 강화도뿐만 아니라 옆 섬인 석모도의 산에서도 채석 작업을 했다. 그 돌을 실어 나르는 데 배가 75척이나 쓰였다. 각각의 배에는 사공 한 명과 두 명의 격군이 있었으며, 돌을 들어 옮기고 나르는 인부들도 많았을 테니 여기에 들어간 사람도 적지 않다.
돈대 축성 전문가들 강화에 모이다
이렇게 옮긴 돌을 정으로 쪼고 다듬는 전문 석수도 400여 명이 강화도로 왔다. 돈대의 문을 만들기 위해 주물 기술자도 50여 명이나 왔고 성을 쌓는 전문 축성 기술자도 1100여 명이나 강화로 왔으니, 이러한 전문 기술자만 해도 거의 2000명 가까이 강화에 온 셈이다.
조정에서는 승군을 활용하여 돈대를 두 달 안에 다 만들 계획이었다. 그러나 돈대 축성의 어려움으로 기한 안에 다 만들 수 없었다. 어영군 4300여 명이 더 충원되어서야 비로소 돈대를 완성할 수 있었다.
돈대는 성을 쌓기에 적합하지 않은 장소에 축조한 규모가 작은 성곽이다.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서 돌로 성벽을 쌓았다. 미루지돈대는 협축식 방식으로 성벽을 쌓았다.
조선시대 성벽을 쌓는 방식에는 협축식(夾築式) 과 내탁식(內托式)이 있었는데 협축식은 안과 밖의 성벽을 모두 큰 돌로 쌓고 그 안을 흙과 부스러기 돌로 채우는 방식이다. 내탁은 바깥쪽에만 돌로 쌓고 안에는 성벽 높이까지 흙을 쌓아 올리는 방식이다. 미루지돈대는 협축식으로 성벽을 쌓았다.
성벽을 쌓는 방식
미루지돈대의 성벽은 퇴물림(들여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성벽의 아래에는 무겁고 큰 돌을 쌓고 위로 올라갈수록 그 무게와 크기를 줄인 돌을 조금씩 뒤로 물려가며 쌓는 퇴물림 방식은 전통적인 우리 석조 건축물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렇게 쌓으면 성벽의 하중을 줄여서 배불림 현상을 막을 수 있고 그로 인한 성벽의 붕괴 역시 억제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성벽은 40~120cm 정도 크기의 돌을 층층이 쌓아 올려 축성했다. 성벽을 쌓을 때 돌과 돌이 서로 아귀가 맞고 잘 맞물리도록 돌을 다듬었다. 아랫돌이나 옆의 돌 크기나 모양에 맞춰 맞물리는 돌의 모서리를 'ㄱ'자 또는 'ㄴ'자 모양으로 깎아내고 다듬었다. 이런 기법을 '그랭이질'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쌓은 석축은 꽉 맞물려 흔들림 없이 견고하다.
협축식으로 성벽을 쌓고 퇴물림으로 성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한 점이나 돌과 돌이 서로 이가 잘 맞도록 그랭이질 기법으로 돌을 깎고 다듬은 것은 54개 돈대 대부분에서 볼 수 있다. 미루지돈대에서는 이러한 기법 말고 또 다른 독특한 건축 기법을 볼 수 있으니 바로 '홍예문'이다.
홍예문(虹霓門)은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원형이 되게 만든 문을 말한다. 강화도 54개 돈대 중에 홍예문인 곳은 미루지돈대와 월곶돈대, 구등곶돈대 뿐이다. 나머지 돈대들은 평거식 문이다.
평거식은 성문의 양쪽에 문주석(門柱石)을 세우고 그 위 천장 부분에 길고 편편하게 다듬은 장대석(長臺石)이나 판석을 여러 개 걸쳐 방형(네모 모양)으로 입구를 만든 성문을 말한다. 평거식으로 돈문을 만들면 공법도 어렵지 않고 공기 역시 단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시공이 어려운 홍예문으로 돈대 문을 만들었다. 그 덕분에 지금 우리가 홍예문의 아름다움을 누린다.
언덕 위에 자리한 미루지돈대를 가을 날 다시 찾아간다. 돈대 안내판은 약쑥밭과 밤나무밭을 지나가도록 알려준다. 미루지돈대로 가자면 사유지인 밭을 통과할 수밖에 없다. 사유지를 거치지 않고도 돈대로 갈 수 있는 길은 없을까.
강화군 문화관광과 담당자와 통화를 했는데, 미루지돈대 아래의 밭(사유지)을 매입하기 위한 예산을 확보해 매입을 추진중이라며 늦어도 2025년까지는 다 해결될 거라 한다. 현재는 밭 소유자의 동의를 받아 돈대로 가는 길을 밭 한쪽으로 만들어 두었지만 2023년 쯤에 밭을 매입해서 길을 낼 계획이라고 했다. 그때까지는 지금의 길로 가도 되고 아니면 돈대 뒤쪽으로도 올라갈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돈대 뒤쪽으로 올라가 봤다. 바닷가를 따라 길이 있었다. '강화나들길' 7-1코스의 구간이었던 길이다. 그러나 그 길은 가팔랐다. 계단이 있었지만 오래 돌보지 않았는지 삭아가고 있었다. 강화나들길이 걷기에 더 좋은 곳으로 새로 길을 만들면서 기존의 길은 잊혀졌다. 버려진 길은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간다. 손 보지 않은 계단이 삐걱댔다. 쇠로 만든 손잡이도 벌겋게 녹이 슬어 있었다. 조심스레 계단을 올라가니 산길이 나왔다. 그 길을 따라 얼마쯤 가니 저 위에 미루지돈대가 보였다.
돈대가 보였지만 그곳까지 가는 길이 만만찮다. 돈대는 바다에서 육지로 들어오려는 적을 막기 위해 쌓은 요새이니 자연 바다쪽에서는 접근하기 어렵다. 그래서 돈대로 가는 길은 모두 바다 쪽과 반대편인 육지 쪽에 있다.
경사가 급한 언덕을 올라 드디어 홍예문이 예쁜 미루지돈대를 만났다. 이른 봄에 왔을 때는 야생 부추가 한창이었는데 그새 잡초들이 우거져서 부추는 잘 보이지 않았다. 사람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는데, 안 보이니 오히려 잘 됐다 싶었다.
미루지돈대는 영원히
쇠붙이에 베거나 다친 상처에 야생 부추를 찧어서 바르면 피가 멎고 상처가 쉽게 아문다고 한다. 돈대 축성 과정에서 다친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부추를 찧어서 상처에 붙이고 발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돈대 안 여기저기에 나있는 야생 부추를 보면서 이런저런 상상과 억측을 해본다.
미루지곶의 언덕 위에 돈대가 우뚝 서 있다. 돈대를 수비하며 세월을 보냈을 그 옛날을 그려본다. 봄이 오고, 봄이 갔다. 여름과 가을이 오가고 겨울도 왔다 갔다. 그렇게 수백 번 세월이 돌고 돌았다.
돈대는 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왔다가 사라지는 것은 사람 뿐, 돈대는 그대로 있었다. 돈대를 만들고 지켜온 선인들의 뜻은 세월 속에 희석 되었지만 봄이면 다시 돋는 저 부추처럼 나라 사랑의 그 정신은 면면히 이어 내려왔다.
<미루지돈대의 기본 정보>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여차2리 170-2
별칭 : 미곶돈대, 미루돈대
축조 시기 : 1679년(숙종 5)
규모 : 둘레 - 116m, 지름 - 37.5m, 잔존 성벽 높이 - 최대 2.8m
지정사항 :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0호
보수이력 : 2015년 보수공사
형태 : 원형
시설 : 문1개, 포좌4개, 건물지 1기
그렇게 부추 밭으로 기억되는 미루지돈대는 사실 강화도 돈대 건축 기법의 총체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돈대 성곽 축성의 여러 공법뿐만 아니라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도 볼 수 있다. 또 성벽 위에 덧쌓은 여장(성가퀴)도 일부 남아 있으니, 돈대의 원형을 알고 배우기에 좋은 돈대다.
강화도에는 조선시대 해양관방(海洋關防)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한강이 서해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강화도는 해양에서 한양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유사시 피난처이기도 했다. 이러한 까닭으로 17~19세기 말에 걸쳐 해양관방 시설들을 건립하였다. 이는 강화도를 수호할 목적이기도 했지만 수도인 한양을 지키기 위함이기도 했다.
▲ 미곶(彌串)에 들어선 '미루지돈대' ⓒ 문화재청
조선은 강화도에 군사기지인 5진 7보를 설치하는 한편, 돈대(墩臺)와 외성(外城) 내성(內城) 등 이중삼중의 방어체제를 갖추었다. 특히 강화도 해안(99km)을 따라 구축한 54개의 돈대는 강화도를 수호하기 위한 핵심적인 방어시설이었다.
미루지돈대(彌樓只墩臺)는 여타의 돈대들과 함께 숙종 5년(1679)에 축조되었다. 그해 봄 48개의 돈대가 한꺼번에 만들어졌으니 실로 큰 국책사업이었다. 이렇게 많은 돈대를 한꺼번에 만든 데는 여러 까닭이 있지만 그중에는 빈민 구휼작업의 일환으로 시작한 측면도 있었다.
'소빙하기'였던 숙종 때 돈대를 만든 까닭
숙종 치세 때는 전 세계적으로 기상이변이 잦았다. '소빙하기'로 불릴 정도로 평균 기온이 떨어졌고, 이로 인해 농작물 생산에 큰 차질이 왔다. 여러 해 흉년이 들자 대기근으로 이어져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숙종은 일종의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산성을 쌓고 돈대를 만드는 국책사업을 벌였다.
돈대를 만드는 작업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공력이 필요했다. 둘레가 120여m에 성벽의 높이가 약 5m 가까이 되는 돈대를 48개나 만드는 일이었으니 얼마나 많은 물자와 공력이 들어갔을까.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단순 노동을 하는 잡역부며 인부들이 강화로 와서 돈대 축성 작업에 투입되었다.
▲ 미루지돈대는 강화의 남쪽 바닷가 해안에 있다. ⓒ 이승숙
큰 암반에서 돌을 떼어내는 작업은 겨울에만 가능했다. 암반에 작게 구멍을 내고 그 구멍에 마른 밤나무 토막을 꽂는다. 그리고 물을 부어두면 물에 불은 밤나무 토막이 꽁꽁 얼면서 팽창한다. 낮에 기온이 올라가면 얼었던 게 녹았다가 밤에 영하로 떨어지면 또 팽창하기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바위가 깨지고 떼어진다.
이렇게 떼어낸 돌을 각 돈대 작업 현장까지 옮기는 데도 많은 일손이 필요했다. 돈대를 쌓는 현장 근처에 바위가 많지 않을 경우 먼 곳에서 돌을 가져오는 경우도 있었다. 강화도뿐만 아니라 옆 섬인 석모도의 산에서도 채석 작업을 했다. 그 돌을 실어 나르는 데 배가 75척이나 쓰였다. 각각의 배에는 사공 한 명과 두 명의 격군이 있었으며, 돌을 들어 옮기고 나르는 인부들도 많았을 테니 여기에 들어간 사람도 적지 않다.
돈대 축성 전문가들 강화에 모이다
이렇게 옮긴 돌을 정으로 쪼고 다듬는 전문 석수도 400여 명이 강화도로 왔다. 돈대의 문을 만들기 위해 주물 기술자도 50여 명이나 왔고 성을 쌓는 전문 축성 기술자도 1100여 명이나 강화로 왔으니, 이러한 전문 기술자만 해도 거의 2000명 가까이 강화에 온 셈이다.
조정에서는 승군을 활용하여 돈대를 두 달 안에 다 만들 계획이었다. 그러나 돈대 축성의 어려움으로 기한 안에 다 만들 수 없었다. 어영군 4300여 명이 더 충원되어서야 비로소 돈대를 완성할 수 있었다.
▲ 미루지돈대의 홍예문 ⓒ 이승숙
▲ 평거식 돈문(장곶돈대) ⓒ 이승숙
돈대는 성을 쌓기에 적합하지 않은 장소에 축조한 규모가 작은 성곽이다.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서 돌로 성벽을 쌓았다. 미루지돈대는 협축식 방식으로 성벽을 쌓았다.
조선시대 성벽을 쌓는 방식에는 협축식(夾築式) 과 내탁식(內托式)이 있었는데 협축식은 안과 밖의 성벽을 모두 큰 돌로 쌓고 그 안을 흙과 부스러기 돌로 채우는 방식이다. 내탁은 바깥쪽에만 돌로 쌓고 안에는 성벽 높이까지 흙을 쌓아 올리는 방식이다. 미루지돈대는 협축식으로 성벽을 쌓았다.
성벽을 쌓는 방식
미루지돈대의 성벽은 퇴물림(들여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성벽의 아래에는 무겁고 큰 돌을 쌓고 위로 올라갈수록 그 무게와 크기를 줄인 돌을 조금씩 뒤로 물려가며 쌓는 퇴물림 방식은 전통적인 우리 석조 건축물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렇게 쌓으면 성벽의 하중을 줄여서 배불림 현상을 막을 수 있고 그로 인한 성벽의 붕괴 역시 억제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성벽은 40~120cm 정도 크기의 돌을 층층이 쌓아 올려 축성했다. 성벽을 쌓을 때 돌과 돌이 서로 아귀가 맞고 잘 맞물리도록 돌을 다듬었다. 아랫돌이나 옆의 돌 크기나 모양에 맞춰 맞물리는 돌의 모서리를 'ㄱ'자 또는 'ㄴ'자 모양으로 깎아내고 다듬었다. 이런 기법을 '그랭이질'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쌓은 석축은 꽉 맞물려 흔들림 없이 견고하다.
▲ 돌을 조금씩 안으로 물려서 쌓는 '퇴물림' 방식으로 성벽을 쌓았다. ⓒ 이승숙
▲ 돌이 서로 이가 맞도록 다듬는 ' 그렝이질' 공법. ⓒ 이승숙
협축식으로 성벽을 쌓고 퇴물림으로 성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한 점이나 돌과 돌이 서로 이가 잘 맞도록 그랭이질 기법으로 돌을 깎고 다듬은 것은 54개 돈대 대부분에서 볼 수 있다. 미루지돈대에서는 이러한 기법 말고 또 다른 독특한 건축 기법을 볼 수 있으니 바로 '홍예문'이다.
홍예문(虹霓門)은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원형이 되게 만든 문을 말한다. 강화도 54개 돈대 중에 홍예문인 곳은 미루지돈대와 월곶돈대, 구등곶돈대 뿐이다. 나머지 돈대들은 평거식 문이다.
평거식은 성문의 양쪽에 문주석(門柱石)을 세우고 그 위 천장 부분에 길고 편편하게 다듬은 장대석(長臺石)이나 판석을 여러 개 걸쳐 방형(네모 모양)으로 입구를 만든 성문을 말한다. 평거식으로 돈문을 만들면 공법도 어렵지 않고 공기 역시 단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시공이 어려운 홍예문으로 돈대 문을 만들었다. 그 덕분에 지금 우리가 홍예문의 아름다움을 누린다.
▲ 봄날의 미루지돈대 ⓒ 이광식
언덕 위에 자리한 미루지돈대를 가을 날 다시 찾아간다. 돈대 안내판은 약쑥밭과 밤나무밭을 지나가도록 알려준다. 미루지돈대로 가자면 사유지인 밭을 통과할 수밖에 없다. 사유지를 거치지 않고도 돈대로 갈 수 있는 길은 없을까.
강화군 문화관광과 담당자와 통화를 했는데, 미루지돈대 아래의 밭(사유지)을 매입하기 위한 예산을 확보해 매입을 추진중이라며 늦어도 2025년까지는 다 해결될 거라 한다. 현재는 밭 소유자의 동의를 받아 돈대로 가는 길을 밭 한쪽으로 만들어 두었지만 2023년 쯤에 밭을 매입해서 길을 낼 계획이라고 했다. 그때까지는 지금의 길로 가도 되고 아니면 돈대 뒤쪽으로도 올라갈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돈대 뒤쪽으로 올라가 봤다. 바닷가를 따라 길이 있었다. '강화나들길' 7-1코스의 구간이었던 길이다. 그러나 그 길은 가팔랐다. 계단이 있었지만 오래 돌보지 않았는지 삭아가고 있었다. 강화나들길이 걷기에 더 좋은 곳으로 새로 길을 만들면서 기존의 길은 잊혀졌다. 버려진 길은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간다. 손 보지 않은 계단이 삐걱댔다. 쇠로 만든 손잡이도 벌겋게 녹이 슬어 있었다. 조심스레 계단을 올라가니 산길이 나왔다. 그 길을 따라 얼마쯤 가니 저 위에 미루지돈대가 보였다.
돈대가 보였지만 그곳까지 가는 길이 만만찮다. 돈대는 바다에서 육지로 들어오려는 적을 막기 위해 쌓은 요새이니 자연 바다쪽에서는 접근하기 어렵다. 그래서 돈대로 가는 길은 모두 바다 쪽과 반대편인 육지 쪽에 있다.
▲ 갯벌 식물인 '나문재'가 붉게 물들어 있는, 가을날의 미루지돈대 가는 길 ⓒ 이광식
경사가 급한 언덕을 올라 드디어 홍예문이 예쁜 미루지돈대를 만났다. 이른 봄에 왔을 때는 야생 부추가 한창이었는데 그새 잡초들이 우거져서 부추는 잘 보이지 않았다. 사람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는데, 안 보이니 오히려 잘 됐다 싶었다.
미루지돈대는 영원히
쇠붙이에 베거나 다친 상처에 야생 부추를 찧어서 바르면 피가 멎고 상처가 쉽게 아문다고 한다. 돈대 축성 과정에서 다친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부추를 찧어서 상처에 붙이고 발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돈대 안 여기저기에 나있는 야생 부추를 보면서 이런저런 상상과 억측을 해본다.
미루지곶의 언덕 위에 돈대가 우뚝 서 있다. 돈대를 수비하며 세월을 보냈을 그 옛날을 그려본다. 봄이 오고, 봄이 갔다. 여름과 가을이 오가고 겨울도 왔다 갔다. 그렇게 수백 번 세월이 돌고 돌았다.
돈대는 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왔다가 사라지는 것은 사람 뿐, 돈대는 그대로 있었다. 돈대를 만들고 지켜온 선인들의 뜻은 세월 속에 희석 되었지만 봄이면 다시 돋는 저 부추처럼 나라 사랑의 그 정신은 면면히 이어 내려왔다.
<미루지돈대의 기본 정보>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여차2리 170-2
별칭 : 미곶돈대, 미루돈대
축조 시기 : 1679년(숙종 5)
규모 : 둘레 - 116m, 지름 - 37.5m, 잔존 성벽 높이 - 최대 2.8m
지정사항 :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0호
보수이력 : 2015년 보수공사
형태 : 원형
시설 : 문1개, 포좌4개, 건물지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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