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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서 떠올린 경부고속도로의 기적

미완공 수두룩한 베트남 도시간 고속도로

등록|2022.10.07 08:47 수정|2022.10.07 08:56
인도차이나 반도의 지붕인 판시판산으로 가려면 베트남 북부 마을 사파로 가야 합니다. 사파는 중국 접경지인 라오까이 인근으로, 일단 라오까이까지 기차나 슬리핑버스를 타고 가는 게 보통이죠.

시간이 맞는 열차를 구하기 어려워서 저는 슬리핑버스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고속도로답지 않게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버스 안에서 어떤 여행자들은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어디서나 잘 자는 저는 슬리핑버스 침대에 달린 안마의자를 몇 번 써보고는 바로 꿈나라로 떨어집니다.

베트남 고속도로는 극악이란 평이 많습니다. 왕복 팔차선에 하이패스까지 뻥뻥 뚫린 고속도로만 타본 여행자에게 어느 나라 도로가 안 그렇겠느냐마는, 베트남은 그 정도가 심하죠. 지도를 보면 남북으로 해안을 따라 대도시가 늘어서 있어 일자로 죽 그으면 될 것 같지만서도 산지와 늪지가 많아서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가 봅니다.

더구나 기술력 부족과 자금조달 문제로 수도 없이 사고가 터진 탓에 200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완공되지 못한 구간이 수두룩합니다. 2007년엔 54명이 숨진 껀터다리 붕괴참사가 있었고, 고속도로 공사가 진행되는 여러곳에서 균열이 발견되고 도로가 파이는 부실사례가 터져 나왔습니다.

자체 기술력 부족으로 해외업체가 수주를 받고 하청에 하청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구조적 부실이 생기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일각에선 베트남 내 공공부문의 부패도 시공부실에 영향을 미친다는 얘기도 나왔습니다.

아무튼 고속도로 부재로 인한 불편은 고스란히 현실을 사는 베트남인들에게 돌아갑니다. 말만 고속도로지 차선이 적고 중앙선 침범이 잦은 구간이며, 요금소 앞에 길게 정체된 행렬을 만나는 때도 종종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트남베트남 도시를 이동하는 여행자들이 자주 찾는 슬리핑버스 내부. ⓒ 김성호


기적의 도로, 경부고속도로를 생각하다

그러고 보면 한국은 경부 고속도로를 일찌감치 뚫어 나라의 토대를 다졌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결단 아래 국군 공병대와 현대건설이 나서 진행한 공사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으나 어찌됐든 일정 아래 완료됐습니다.

공식적으로만 77명의 사망자를 냈고 군데군데 부실한 구간이 나왔음에도 이토록 빠르게 공사를 완료한 사례는 전 세계를 통틀어도 손에 꼽을 만한 것이었습니다. 국토의 70%가 산지인 국가에서 서울과 부산을 잇는 도로를 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까요. 사망자가 77명이 아니라 그 수십 배가 될 것이란 증언엔 상당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2월 1일 착공해 2년5개월 만인 1970년 7월 7일 준공됐습니다. 고속도로 건설은 시대적 과업이었습니다. 당시 한국 물류는 철도에 의존하고 있었고 차를 통한 이동은 산을 굽이굽이 돌아야 해 제약이 많았습니다.

특히 큰 산맥이 구간마다 가로막고 있어 동과 서, 남과 북의 이동에 제약이 컸습니다. 산을 뚫고 도로를 놓아 전 국토를 하루면 오가게 하겠다는 발상을 현실화한다는 건 당시로선 상상키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완공된 도로는 거대한 부실덩어리일지 모르겠습니다. 개통 10년 동안 들어간 보수비용이 공사비용을 넘어섰을 만큼 곳곳에서 부실이 터져 나왔습니다. 중앙분리대 미설치 등 도로가 가진 문제로 인해 발생한 수많은 사고가 있었고 그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습니다.
 

경부고속도로70년 7월7일 개통한 경부고속도로에서 교통량을 측정하는 조사원. ⓒ 정부기록사진집(공공누리 출처공개 후 사용가능)


경부고속도로는 무슨 돈으로 놓았을까

그러나 경부고속도로가 준 가장 큰 가치는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2년5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서울과 부산을 잇는 428km짜리 현대화된 도로를 갖게 됐다는 건 실로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전까지 국내 업체 중 현대화된 고속도로를 놓아본 경험이 있는 회사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경부고속도로가 생긴 뒤로는 아니었죠. 전국에 수많은 도로가 더 빠르고 완성도 있게 놓였습니다. 경부고속도로를 한국인의 힘으로 놓았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죠.

국가발전이란 사명 아래 혼을 갈아 넣었을 그 시절 공병대와 건설노동자에게 우리 사회는 깊이 감사해야 마땅합니다. 이러쿵저러쿵 해도 국토를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를 한국이 가진 역량을 놓겠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결단엔 분명 남다른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런 결단력이 있으니 쿠데타도 유신도 마구마구 저질러버린 것이겠지만요.

베트남 도로를 달리며 한국 고속도로를 떠올리는 데는 나름의 맥락이 있습니다. 경부 고속도로 책정 예산이 그때 당시 금액으로 300억 원이 넘었고, 이는 1년 정부예산 1500억 원의 2할쯤이 되었습니다. 공사가 시작된 뒤로는 비용이 계속 늘어나 총 429억 원이 들어갔습니다. 전 부처 가용예산을 죄다 돌려도 턱도 없는 공사비용을 어디에서 조달했을까요. 답은 미국 차관이었습니다.
 

베트남베트남 도시 간 물류는 항만과 철도를 통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도로 운송이 활발한 한국과 달리 고속도로가 발달하지 않은 탓이다. ⓒ 김성호


어느 도로는 피로 놓였다는 걸

정부는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규모 전투병을 파병하는 대가로 그 차관을 얻었습니다. 여기에 합일협정으로 얻어낸 자금을 일부 떼어다 붙였습니다. 조상과 장병들의 피로 얻은 돈을 들이부어 산을 깨고 도로를 놓은 것입니다. 그 도로가 한국의 오늘을 쌓아올렸습니다.

반대편엔 총을 들고 베트남 밀림으로 들어가 베트콩들을 쏘아 죽여야 했던 장병들이 있습니다. 윗사람들은 자유주의 수호를 위한 전쟁이라고들 말했으나 많은 전쟁이 그렇듯 실제는 알려지는 것과 많이 다른 법입니다. 국군 사망자는 알려진 것만 5099명, 부상자는 그 두 배가 넘습니다.

군은 1대 20이 넘는 교환비를 올렸다고 자랑하고 있으니 사살된 베트남인은 얼마나 많았을까요. 인도차이나 반도에 거점을 마련하려 조작극까지 펼쳐가며 시작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탈전에 한국이 끼여서 낸 희생이 이러했습니다. 그렇게 얻어낸 피 같은 돈이 고스란히 경부 고속도로가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박정희 대통령의 결단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걸 현실화한 정주영 현대 회장과 노동자들, 공병대 장병들의 노고 역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베트남에 가서 싸운 장병들은 또 얼마나 험한 일을 했는가요.

그들의 공헌 위에 살면서도 그 존재가 있었음을 너무 쉽게 잊게 되는 건 민망한 일입니다. 베트남이든 한국이든 아무 생각 없이 달려서는 안 되는 길이 있습니다. 어느 길은 널린 시신 위에 피로써 닦였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시민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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