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자리 좌석... 조성진 손가락은 안 보였지만
그의 손 끝에서 피어난 슈만, 충만함으로 충분히 빠져들었습니다
한 번 사는 인생이라 서른도, 마흔도, 쉰도 처음인 우리 일상을 작은 노력들로 채워가는 이야기를 씁니다. [기자말]
이 믿을 수 없는 설렘을 주체할 수 없어서 가슴에 살짝 손을 얹고 짧은 심호흡을 했다. 순간 눈이 마주친 옆자리의 나이 지긋하신 아주머니, 나를 보고 찡긋 눈인사를 보낸다. 나도 함께 미소로 답하는 그 찰나의 순간에 알았다. 이 아주머니도 조성진 덕후시구나.
▲ 10월 3일 조성진 리사이틀 ⓒ 은주연
드디어 연주가 시작되었다. 헨델의 바로크 음악이 너무도 잔잔하게 시작되었다. 흡사 옥구슬이 건반 위를 굴러가는 맑은 소리가 들려왔다. 공연장에 있는 모든 사람의 움직임을 멈춘, 그 옥구슬 소리가 더 돋보였던 것은 관객석의 완벽한 고요 때문이었다. 설렘과 흥분과 기대가 섞인 적막.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리사이틀의 성격상, 연주될 곡들에 대해 미리 공부를 하고 갔다. 곡과 작곡가에 대한 것은 물론이고, 음악이 귀에 익도록 많이 많이 들었다. 조성진이 눈앞에서 연주를 하는데 무슨 걱정이겠느냐마는,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던 건... 내 자리가 불행히도 오른쪽 블록의 맨 끝자리였기 때문이다.
그 자리는 연주자의 모습과 손가락과 건반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자리다. 하지만 그 자리라도 감지덕지해야 했기에 소리와 음악에 최대한 집중해 보기로 마음먹었었다. 물론, 조성진이 입장하고 건반에 손을 올리자마자, 모든 것이 기우였음을 알았지만 말이다.
이번 리사이틀의 주제는 변주곡이었다. 변주곡이란 어떤 주제(테마)를 설정하고 그것을 여러 가지로 변형하는 기법으로 주제와 몇 개의 변주로 이루어진 곡을 말한다. 개인적으로 변주곡을 좋아하는 이유는 (변형되었긴 했지만) 익숙한 테마가 반복적으로 들려오니, 음악이 지루하지 않고 좀 더 쉽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물론 연주자들에게는 그 변주 하나하나가 엄청난 테크닉적 어려움으로 다가오겠지만 말이다.
헨델에 이어 브람스의 변주곡이 연주되었다. 아, 이 가을에 브람스라니. 이제 하나의 브랜드가 된 브람스, 이름만으로도 이 가을 낭만적인 사랑에 가장 어울리는 낭만주의 작곡가다. 브람스 하면 슈만과 클라라가 자동으로 떠오를 만큼 그들의 사랑은 극적이고 애틋하다.
슈만과 그의 아내 클라라, 그리고 클라라를 사랑한 브람스. 스승의 부인이자 열네 살이나 연상인 클라라를 사랑한 브람스의 이야기가 워낙 극적이고 아름다워, 나의 관심은 늘 브람스를 향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브람스의 사랑 자체가 낭만적이다.
슈만이 정신병으로 죽고 나서도 오랫동안 사랑하던 클라라와 결혼하지 않고, 미혼으로 끝까지 클라라의 곁을 지켜준 남자. 클라라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컸으면 클라라가 죽은 후 일 년 뒤에 세상을 떠났을까. 죽음마저도 낭만적인 그다.
음악은 차치하고, 이런 브람스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너무 강렬해서 그동안 슈만에게 눈길이 가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조성진의 손끝에서 피어난 슈만은 달랐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했던가. 조성진의 손끝에서 피어난 슈만은 내게 더 이상 이전까지의 슈만이 아니었다.
슈만에게 빠진 채 시작하는 가을
▲ 내 자리는 불행히도 오른쪽 블럭 끝자리였다. ⓒ 은주연
인터미션 후의 2부는 오롯이 슈만에게 할애된 시간이었다. '세 개의 환상소곡집 op.111'은 슈만이 죽기 몇 년 전에 완성한 곡이다. 어렸을 때부터 신경쇠약, 불안, 초조 등의 증세를 보였던 슈만의 정신병은 유전적인 경향이 있었던 듯하다. 노력으로도 어찌해 볼 수 없었던 우울은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혼자가 익숙하고 대인관계에도 어려움을 겪었던 그가 뒤셀도르프의 시립 교향악단 음악감독으로 보낸 1년은 꽤 힘든 한 해였던 것 같았다. 그 1년을 보내고 여행 중에 작곡했다는 이 곡이 남달리 들렸던 것은, 그 후 라인강에 몸을 던진 슈만의 고독과 슬픔이 전해져와서일까.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할 만큼 정신적으로 불우했던 슈만의 아름다운 선율과, 한결같이 클라라를 사랑하고 존중한 브람스의 쓸쓸한 고독이 겹쳐져 안 그래도 쓸쓸한 가을의 정취가 더욱 진하게 더해졌다.
피아노로 오케스트라를 구현하고 싶었다는 슈만과 브람스가 부드러움과 폭발적인 열정을 오가는 조성진의 연주를 보았다면 만족스러워하지 않았을까. 과연 '2021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피아니스트'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았다.
두 곡의 앙코르곡을 끝으로 아쉬운 공연이 끝났다. 앙코르곡 마저도 정성 가득해서 눈물 나도록 고마웠던(감정 과잉인가), 오늘의 공연은 확실히 이전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예전에 공연장에 가는 것은 누군가와 좋은 시간을 보내는 수단에 불과했다면 이제 공연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된 것 같다.
그래서인지 공연장의 설렘, 흥분, 기대로 감싸인 정적까지 오롯이 전해진 이날의 공연은 확실히 위로가 된 시간이었다. 나에게 할애된 두 시간 동안 아름다운 선율로 마음이 다독여진 기분이랄까. 내 안에 가득 차 있던 걱정과 답답함이 그 두 시간만큼은 나를 괴롭히지 못했다.
공연의 마무리도 참 담백했다. 이 최고의 피아니스트는 환호 가득한 무대를 내려가면서도 여전히 수줍고도 조용하게 퇴장을 했으니. 공연장에 남아있는 은은한 여운마저 멋스러웠다고 해야 하나.
인생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소소한 일들에 지나치게 환호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것. 스치는 기분 하나하나에 집중하지 말고 흘려보내는 것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주지 않을까... 슈만에 푹 빠진 채 시작하는 가을이건만 쓸쓸함보다는 충만함이 가득한 날들이다.
덧붙이는 글
지난 10월 3일, 7일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에서 조성진의 리사이틀이 있었고, 오는 10월 14일, 15일 예술의 전당에서 사이먼 래틀의 지휘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이 예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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