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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면 '독' 되는 커피찌꺼기... 이렇게 다시 태어납니다

[지금 우리 곁의 소셜디자이너⑨] 고유미 '커피클레이' 대표

등록|2022.10.22 09:56 수정|2022.10.23 14:25
소셜디자이너는 생활 속 아이디어로 일상의 불편을 해소하는 사람, 혼자 고민하기보다 함께 이야기하고 궁리하는 사람,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희망제작소가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소셜디자이너들을 만났습니다.[기자말]

▲ 고유미 커피클레이 대표를 9월 27일 만났다. ⓒ 희망제작소


워킹맘이던 고유미 커피클레이 대표는 큰아이가 네 살 되던 해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가 또래에 비해 발달이 느리니 하루 빨리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를 임신 중이던 고유미 대표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큰아이 치료에 모든 시간과 자원을 쏟아부었다. 큰아이를 데리고 복지관의 치료실과 사설치료센터의 언어치료·감각통합치료·미술치료 교실 등을 오가는 동안 갓난쟁이 둘째는 복지관 인근 벤치와 빈 교실에서 젖을 먹고 엄마를 보채다가 품에서 잠이 들었다.

대기실에서 큰아이의 치료가 끝나길 기다리던 어느 날, 맞은 편에 앉은 엄마들의 지치고 무기력한 표정을 봤다. '내 얼굴도 똑같겠지' 생각하니 울컥하는 심정이 됐다. 작고 약한 사람들이 모여 쓸모없는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고, 자신과 이웃의 삶, 나아가 세상을 바꾸는 프로젝트는 작은 눈물 한 방울에서 시작됐다.

"처음부터 환경문제나 커피박(커피찌꺼기)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이전에 캘리그래피를 배운 적이 있어서, 아이들을 기다리는 시간에 엄마들끼리 캘리그래피 모임을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죠.

복지관에 빈 교실을 하나 내어달라고 부탁해서 엄마 대여섯 명이 모여 예쁜 그림을 그리고 좋은 글귀를 쓰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니 힐링이 됐어요. 집에 걸어둘 소품도 만들고 복지관에 필요한 안내판도 만들었죠. 얼마 뒤엔 복지관 측에서 아예 정규강좌를 개설하자고 하더라고요. 1년여간 부모교실을 운영했는데 반응이 좋았고, 엄마들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어요.

취미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수익이 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엄마들끼리 막 상상의 나래를 펼쳤죠. 아이와 엄마가 함께 일할 수 있는 공간, 함께 아이를 키우고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가 있다면, 모두에게 위로가 될 텐데... 그래서 2019년에 '광명시 여성창업기금 지원기금'을 신청해 지원받고, 창업 아이템을 찾던 중 커피큐브의 임병걸 대표님이 커피박을 점토로 만드는 기계를 상용화한다는 기사를 봤어요.

'아직 시판하긴 이르다'는 임 대표님을 설득해 그분이 테스트용 기계에 이어 두 번째로 만든 기계를 샀어요. 당시 창업비용이 부족해서 24개월 분할납부하겠다고 했는데도 기꺼이 기계를 내어주셨고, 다행히 6개월 만에 다 갚았어요(웃음). 그 기계로 캘리그라피를 함께하던 엄마들과 복지관 내에 작은 공간을 마련해 '위로상점'을 열고 성인 장애인을 위한 직업재활훈련도 시작했어요."


복지관 한켠서 시작한 '위로상점'... 연대생산 모델의 출발점

고유미 대표와 '엄마들' 그리고 직업재활훈련을 받는 장애인들은 힘을 모아 복지관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박을 수거해 점토로 바꾼 다음, 커피박 연필을 비롯한 다양한 생활소품을 만들어 판매했다. 광명시에 광명 경기문화창조허브가 문을 열면서 우수기업으로 선정돼 입주한 후에는 작업공간 걱정 없이 2년간 '위로상점'을 꾸릴 수 있었다.

"소셜벤처 운영자로 경험을 쌓고 관련 공부도 하고 강연도 하다 보니, 커피박을 매개로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일하는 자원순환 생태계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침 커피큐브 임 대표님이 회사의 기술 파트는 본인이 맡을 테니 경영 파트를 맡아 사업을 키워보지 않겠냐고 제안하셔서, 커피큐브 총괄매니저로 합류하게 됐죠.

당시 직원은 임 대표님과 저, 단 두 명이었어요(웃음). 이후 회사가 성장하면서 만 60세 이상 어르신들의 작업장인 '커피클레이'를 자회사로 두게 돼 지금은 커피클레이 대표이사를 겸임하고 있어요."

 

▲ 커피박을 점토분말 형태로 만들어주는 커피트레인(왼쪽)과 이를 축소한 보급형 커피버스 ⓒ 커피큐브


커피큐브는 커피박 업사이클링 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아니다. 일반폐기물(커피음료 가공업체들이 버리는 경우엔 산업폐기물)로 분류돼 매립하면 땅을 산성화하고 소각하면 탄소를 배출하는 커피박을 천연 100% 커피점토분말로 바꿔주는 기계인 '커피트레인'을 제작·판매한다. 그리고 그 기계를 이용해 제품을 만드는 기술을 전수한다. 고유미 대표는 투자를 받아 커피트레인을 수십 대 설치한 대규모 공장을 세우고 관련 제품을 대량생산해 큰돈을 버는 대신, '지역 기반의 커피박 순환 생태계'를 구축하는 방식을 택했다.

"전국에 저희 커피트레인을 설치한 비영리기관이나 사회적기업, 시니어클럽, 장애인보호작업장 등이 70여 곳 돼요. 지속적으로 협력하는 파트너 관계인데요. 우선 저희가 기계를 판매하면서 시판 가능한 수준의 제품을 생산하실 수 있도록 장기간의 교육과 품질관리를 해드리고요. 커피박 제품 대량주문이 들어오면 전국에 있는 협력업체들이 일감을 나눠 맡아 공동으로 제품을 생산해 납품합니다. 업체간 경쟁이 아니라 '연대 생산'을 하는 거죠.

제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커피박은 작업장별로 자신이 속한 지역의 커피전문점 등에서 조달해 커피박이 지역에서 순환되는 시스템을 만들었어요. 수거 방식도 협력업체의 특성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요. 예를 들면 발달장애 청년들이 커피박 수거용 아이스팩을 메고 지역 내 커피전문점을 돌면서 사회성 훈련을 하는 곳도 있어요."


커피박이 돌고 돌며 더 좋은 일자리와 세상 만드는 꿈

인천광역시는 커피큐브와 환경재단, 현대제철 등과 손잡고, 3년 전부터 자치단체가 직접 커피박 수거에 나섰다. 인천시 자원순환과에서 시내 중소 커피전문점과 프렌차이즈 커피전문점을 돌며 이틀에 한 번꼴로 커피박을 수거한다. 참여하는 상점에는 '에코 카페'라는 명패도 붙여준다. 수거한 커피박은 인천시의 비영리기관과 사회적기업 등에서 다양한 커피박 업사이클링 제품으로 재탄생된다.

"인천시가 한 달에 수거하는 커피박이 30톤, 1년이면 360톤이에요. 커피박 연필 한 자루를 만드는 데 드는 커피박이 30그램 정도니까, 커피 한 잔에 연필 한 자루만큼의 커피박이 생기는 셈이죠. 그러니 제품 생산량에 비해 커피박이 너무나 많이, 빠른 속도로 쌓이게 돼요.

인천 연수구에 있는 커피박 집하장에 2년간 적체된 어마어마한 커피박이 있었어요. 곰팡이가 생기기 시작해 제품으로 만들 수도 없어 고민이었거든요. 마침 경북 환경보건연구원의 김상호 연구원님이 커피박에 미생물을 투입해 발효시켜 축사에 깔면 기존의 톱밥보다 훨씬 폭신하고 악취도 현저히 저감되는 기술을 개발했어요.

경상북도 측에서 축산 농가에 적극 보급하겠다고 나서주셔서, 인천시에 쌓여있던 커피박을 모두 소진할 수 있었어요. 타 시도에서도 경상북도의 축산농가에 커피박을 공급할 수 있도록, 저희가 중간에서 지속적으로 다리를 놓을 계획이에요."

 

▲ 커피큐브가 최근 출시한 커피박 파벽돌을 시공한 벽면 ⓒ 커피큐브


커피박을 대량으로 소진할 수 있는 또 다른 길도 열렸다. 커피큐브는 얼마 전 실내 인테리어 자재인 커피박 파벽돌 개발해 시판에 나섰다. 커피박 파벽돌을 만들려면 연필이나 화분과 같은 생활소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커피박이 필요하기 때문에, '커피박 순환생태계'를 빠르고 힘차게 돌리는 엔진이 돼줄 것이다.

다만, 점토로 한 장 한 장 만들어 손으로 뒤집어가며 만드는 수제품이라 시간과 공도 많이 든다. 전국 작업장 연대 생산만으론 물량을 대기 어려워, 60세 이상 직원만 고용하는 시니어 기업 '커피클레이'를 설립하고 180평 규모의 작업장을 마련할 참이다.

커피트레인을 축소한 보급형 '커피버스'도 개발했다. 카페나 학교, 전시장, 수목원 등에서 체험학습을 하거나 기념품을 제작‧판매하는 등의 용도로 쉽고 폭넓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개인이 커피박을 가져오면 점토로 교환해주는 '커피박 환전소'도 전국 곳곳에서 운영 중이다. 고유미 대표는 더 많은 커피박이 세상 구석구석을 돌고 돌며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더 좋은 일자리와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를 희망한다.

"서울대 미술대학 이장섭 교수님이 커피박 교구를 디자인하시고, 저희 커피버스를 활용해 신림동의 독거중년들과 함께 커피박 교구를 만드는 소셜 프로젝트를 계획 중이에요. 커피박을 매개로 사회적 가치가 확산되는 모습을 보면 행복합니다. 한 명이 1000만 원을 벌기보다 열 명이 100만 원씩 벌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 전 세계 커피박이 100% 순환되는 세상을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어요."
덧붙이는 글 *인터뷰 및 정리=희망제작소 미디어팀. 이 글은 희망제작소 홈페이지(www.makehope.org)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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