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김지하 '담시 오적' 필화사건 변론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평전 14] 군더더기 하나 없는 유명한 꼭지따기가 시작되었다

등록|2022.10.27 15:51 수정|2022.10.27 15:51

1974년 지학순 주교의 재판소식을 알리고 있는 <가톨릭시보>와 구속 중이던 김지하 시인.1974년 지학순 주교의 재판소식을 알리고 있는 <가톨릭시보>와 구속 중이던 김지하 시인. ⓒ 가톨릭시보·작가회의


1970년은 그 전해에 어거지로 감행한 3선개헌 파동의 상처가 아직 아물기 전이며, 이듬해로 다가온 대선과 총선이라는 양대 선거를 앞둔 시점이어서 정치ㆍ사회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3선 개헌으로 장기집권의 문턱을 넘어 선 박정희 대통령은 비판세력에 대해 탄압을 가중시켜가면서 특히 비판언론에 재갈을 물리고자 하였다.

<사상계>는 이런 와중에 김지하의 담시 〈오적(五賊)〉을 실은 것이 화근이 되어 자유당 정권 이래 한국 지성계의 양식을 대변해온 공로도 아랑곳없이 끝내 권력의 희생물이 되기에 이른다. 그 부산물로 김지하라는 한 사람의 빼어난 민중시인을 탄생시켰지만.

〈오적〉은 처음 <사상계> 1970년 5월호에 실렸다. 목포 태생의 20대 후반인 김지하는 당시에는 무명시인에 불과했다. 1941년 목포에서 태어나 서울 문리대 미학과를 졸업, 1969년 <시인>지에 〈황톳길〉등으로 문단에 데뷔하여 1970년 박정권의 부정과 부패를 신랄히 풍자한 담시 〈오적〉을 발표하여 필화을 입고, 이후 고난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이미 6ㆍ3사태 당시 대일굴욕외교 반대투쟁에 참가하여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조사'를 써서 체포된 경력이 있었다.

〈오적〉이 처음 <사상계>에 실렸을 때에는 시판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그런데 당시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 6월 1일자 제40호에 게재된 것이 다시 말썽을 일으키게 되었다. 6월 2일 밤 23시 50분 쯤 제1야당 당사에 압수수색 영장이 발부되어 중앙정보부 요원들과 종로경찰서원들에 의해 <민주전선> 10만 7백 부와 옵셋 아연판 4장을 압수하고 김지하를 비롯 부완혁 사장, 김승균 편집장, 김용성 <민주전선> 출판국장을 반공법위반혐의 등으로 구속하였다.

<민주전선>은 담시 〈오적〉가운데 군장성을 비판하는 부분 19행을 삭제하고 게재하였다. 그런데도 문제가 되어 당시까지에는 초유인 제1야당 당사에 압수수색 영장이 발부되고 심야에 수사요원들에 의해 당보 편집실이 짓밟혔다.

한승헌은 원로 변호사 이병린과 함께 김지하 변론에 나섰다. 그는 이 사건에 이어 김지하가 인혁당사건과 관련, <동아일보> 기고문으로 다시 구속되자 중정의 협박에도 또 변론을 맡았다가, 해묵은 글을 핑계삼아 반공법위반으로 구속되는 시련을 겪는다.

한승헌 선생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득해지고 눈이 가늘어짐을 느낀다. 아득한 속에 떠오르는 방이 있다. 1970년 〈오적(五賊)〉필화사건 때 담당검사였던 박종연 씨의 방이다.

그 방에서 한승헌 선생을 처음 만났다. 나는 그때 꽁꽁 묶여 있었는데, 웬 깡마르고 날렵하게 생긴 검은 싱글의 한 신사가 들어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김시인, 나 한승헌 변호삽니다. 내가 사건 맡아서 보호해줄 터이니 안심하시오."

이상한 것은 선생 말대로 그 순간 안심이 되던 거였다. 자신만만하시면서도 세련되고 나긋나긋한 태도, 나를 안심시키기에 충분했다. 선생과의 첫 상면이다.

선생은 재판부 교섭과 꼭지따기의 명수로 알려져 있었다. 과연 그랬다. 재판이 열리고 변호사 반대신문이 진행되자 선생의 그 간결하고 세련된, 그러나 군더더기 하나 없는 유명한 꼭지따기가 시작되었다.

"피고인은 공산주의자입니까?"
"아니오."
"그럼 왜 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까?"
"모르겠습니다."

강타였다. 사건의 실체를 한두 마디 물음으로 요약해 간단히 드러내버리는 거였다.

이어 표현의 자유, 정부의 부정부패, 풍자의 원리, 청백리 사상, 판소리의 현대화 등등 내가 꼭 말하고 싶었던 항변의 꼭지를 약속이나 한듯이 똑똑 따내주었다. 이심전심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선생의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선생의 정의심과 자유에의 정열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아니다. 결국 그것은 선생의 인품이었다. (주석 1)

김지하는 마산 결핵요양소에 입원하였다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군법회의에서 〈오적〉사건도 이송 병합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주석
1> 김지하, <똑같이 수갑을 찬 피고인과 변호인>, <실록(1)>, 259~260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