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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관자'를 질타하다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평전 19] '인권변호사'의 역할은 법정에서만 한정되지 않았다

등록|2022.11.01 15:27 수정|2022.11.01 15:27

▲ 국제앰네스티 한국위원회(현 한국지부) 창립총회에서 한승헌 변호사가 창립선언문을 읽고 있다. ⓒ 국제앰네스티


'인권변호사'의 역할은 법정에서만 한정되지 않았다. 강직한 성품과 성실하고 논리적인 변론이 알려지면서 그의 존재를 찾는 곳이 많아졌다. 그렇다고 '불려다님' 만은 아니고, 본인의 관심사가 있었던 까닭에 참여한 곳이 많았다.

그의 연보에 따르면, 1966년 6월 <법률신문> 논설위원을 필두로, 국제 PEN클럽 한국본부회원, 숙명여대 정경대학 강사, 한국시인협회 회원, 한국방송윤리위원회 위원, 서울 제1변호사회 회지편집위원장,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양심의 수인'을 돕는국제앰네스티 한국위원회의 창립참여이사, 대한변호사협회 문화공보위원장, 서서울 라이온스클럽 회장, 재단법인 크리스천 아카데미 이사, 민주회복국민회의 중앙위원,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발기에 참여, 이사 등이 사회활동 초기의 면면이다.

학창시절 대학신문 편집책임을 맡았고 문학에 재능이 있었던 그는 법조인이 되고서도 문예의 울타리를 쉬이 넘나들었다. 그리고 신문ㆍ방송의 경계선도 무시로 넘나들며 글을 쓰거나 방송을 하였다. 젊은 시절에 지망했던 분야였기에 생소하게 느껴지 않았다.

1967년 34세로 한국기자협회 법률고문이던 그는 <방관죄>라는 칼럼을 썼다. 문인ㆍ지식인들의 무기력을 개탄하면서 경종을 알리는 나팔소리였다. 자신까지 포함해서.

글의 전문이다.

방관죄

독일의 반전 평화운동가 오시츠키는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사람이다. 그는 바이말 체제가 기울어질 무렵의 독일 군부를 통렬히 공격한 탓으로 여러 번 박해를 당했다. 그 판국에 대담하게도 그를 옹호하고 석방운동에 앞장선 이는 저 유명한 작가 토마스만 그 사람이었다.

19세기 말, 불란서의 악명높은 '드레퓌스 사건' 때엔 문호 졸라가 <나는 규탄한다>라는 제하의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발표하고 간첩날조의 의혹에 도전했다. 이웃 일본에서 장세월에 걸쳐 논란된 '송천(松川)사건' 재판을 둘러싸고 가장 신랄한 해부와 비판을 가하면서 피고들을 옹호한 사람 가운데 광진화랑(廣津和郞), 우야조이(宇野造二) 두 작가의 이름을 빼놓을 수는 없다.

이처럼 불의와 수난에 직면하여 감연히 나섰던 문인들의 행동성을 예증하자면 끝이 없다. 생각하건대 그들은 어느 한 사람의 안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인간에 대한 지식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자 한 지사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 한국의 문사 내지 지식인들 속에서 '이 사람을 보라' 하고 선뜻 내세울 만한 분이 생각나지 않음은 어인 일인가? 강단에서, 지상에서 혹은 마이크 앞에서 그래도 이 나라의 '지성'을 자처하는 그분들이 아직도 외면과 방관의 유리창 안에서 기체 일향 만강을 빈하는 예가 너무나 많다.

압제와 불의 앞에서 꾸민 청이불문(聽而不聞), 견이불시(見而不視)의 편법을 언제까지고 '점잔'으로 미화해 줄 수는 없다. 그렇다면 휴머니즘이니 앙가즈망이니 하는 말들을 곧잘 차용하면서도 그와는 너무도 먼 지점에서 맴도는 한국의 지식인들은 이율배반의 명수라고 혹평되어도 할 수 없다.

'모든 인간에 대한 책임'은 고사하고 당장 글 쓰는 자유가 눈 앞에서 위협을 받고, 작가가 마구 사직에 끌려가도 이에 정면으로 항거하기는커녕 그저 관가의 관용이나 바라는 정도이다.

지난 번 방한했던 미국 연방대심원장의 연설 중에 "피해를 입지 않은 자가 피해를 입은 자와 마찬가지로 분노할 때 정의는 실현된다"(솔론의 말)고 강조한 말을 우리 지식인들의 가슴에도 심어주고 싶다. 분노해야 할 때 구경이나 하는 지식인이라면 "모든 인간에의 책임을 망각한 죄인"이나 다름없다. 굳이 이름을 붙이라면 적어도 '방관죄'라는……. (주석 1)

▲ ‘김대중 선생 납치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소견서’ 발표할 때의 모습. 1993년 11월 24일, 좌측에 서서 발표하는 인물이 한승헌 변호사.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그는 1970~1980년대 군부독재 시대의 대표적인 인권기구인 국제앰네스티 한국위원회(1972년 3월) 발족 당시 창립총회에서 결의문을 낭독하고, 각종 문건의 기초 등 설립에 비중 있는 역할을 하였다.

이사장 김재준 목사, 전무이사 윤현 목사이고, 이병린ㆍ함석헌ㆍ지학순ㆍ문동환ㆍ리영희 등 각계 인사 25명이 참여한 한국위원회는 양심수지원, 사형폐지, 고문철페, 공정한 재판, 수감자 처우개선 등을 전개하고, 대통령 긴급조치 하에서도 '국제정치범주간'을 내세워 사형폐지 캠페인을 벌였다.

그는 2002년 3월 28일 국제앰네시티 한국지부창립 30주년 기념식 축사에서 저간의 고난을 소개했다.

1980년 봄, 정치군부의 내란으로 5.17과 5.18이 터졌을 때 한국 앰네시티에도 검거와 수색의 마수가 미쳤습니다. 한때는 한국 앰네스티의 소재지가 런던으로 표시되기도 했고, 사무실은 폐쇄되고 조직은 마비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런 광기어린 폭풍 속에서도 '철조망에 둘러쌓인 촛불(AI의 로고)'은 아주 꺼질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한국 앰네스티는 오늘날 보듯이 재건과 발전의 역사를 이룩했습니다. (주석 2)

초창기 한국방송(KBS)과 문화방송(MBC) 라디오에 매주 1회씩 법률 상담을 하고, 1971년 2월부터 방송윤리위원회 위원으로 공영방송의 정치적 중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주석
1> 한승헌, <법창에 부는 바람>, 172~173쪽, 삼민사, 1986.
2> 한승헌, <스피치의 현장>, 29~30쪽, 매일경제신문사, 2010.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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