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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10.19 항쟁과 인간에 대한 예의

화해와 공존의 길은 이념을 떠나 민주주의의 진정한 가치를 펼치는 것이다

등록|2022.11.03 14:34 수정|2022.11.03 14:34
"그 날 그 땐 지금 없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 비바람 모진 된서리 지나간 자욱마다 맘 아파도 알알이 맺힌 고운 진주알 아롱아롱 더욱 빛나네."

이수인 선생의 '내 맘의 강물'이다. 한반도 곳곳에는 모진 역사의 된서리가 지나간 흔적이 많다. 1948년 10월과 11월의 여수, 순천, 구례 지역은 1950년 6월 한국전쟁 이전에 이미 내전(이른바 "여순항쟁")이 벌어진 곳이다.

여순항쟁은 1948년 10월, 여수에 주둔하던 제14연대에게 상부로부터 제주 4.3항쟁을 진압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14연대 남로당 조직원을 포함한 군인들이 동족상잔에 대한 거부감과 기존 친일 경찰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며 저항한 사건이다. 이들은 여수 시내를 장악하고 이어 순천, 구례, 광양, 보성, 고흥 등 전남 동부 5개 지역을 장악했다. 그 과정에서 순천의 일부 군부대도 동참했고, 지역민들도 다수 호응했다.

이 소식을 들은 미 군사고문단은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를 조직하고, 이승만 정부는 여수, 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 진압작전에 나섰다. 진압군은 장갑차, 박격포, 항공기, 경비정까지 동원, 총공세를 펼쳐 많은 인명피해를 냈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 상당수도 희생됐다.

통계의 차이는 있지만 "여순항쟁" 전반 과정(지리산 일대 포함)에서 약 1만여 생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여전히 역사적 사실과 진실은 총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고, 해원과 치유, 화해와 용서, 이해와 기억의 사회적 과제는 여전하다.

2000년 '제주4·3 특별법'에 이어 2022년 '여순10·19 특별법'이 어렵사리 발효됐다. 이에 힘입어 2022년 10월 21일 구례 섬진아트홀에선 한겨레통일문화재단과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지리산 사람들'이 함께 주최한 '지리산 10·19 생명평화포럼'이 열렸다. 여기서 역사연구자 주철희 박사는 '구례지역의 여순항쟁 전개과정과 피해 상황'을 발표했다.

그에 따르면 현재까지 조사결과 1948년 10월부터 1950년 10월까지 꼬박 2년간 구례지역에서 발생한 인명 피해는 확인된 것만도 1764명이다. 주 박사는 "피해자를 가해자 별로 분석한 결과 군경에 의한 학살이 1128명(63.9%)이고 좌익세력에 의한 학살은 479명(27.2%)"이라 했다.

주 박사는 "유족 1세대마저도 살아계신 분이 많지 않고 당시의 참혹함을 기억하기 싫어 지역을 떠난 사람들이 많아 신고가 저조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따라서 아직 확인되지 않은 희생자를 포함하면 구례 지역만도 약 3천 명 가까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참혹한 역사를 뒤로 한 지 어언 40년, 김철호(1922-1995)라는 혁신적 사업가가 1995년경 말기암 판정을 받은 직후 현금 5억과 땅 1만 2천 평을 한겨레신문사에 기부하게 되었다. 그는 1980년대 후반부터 지리산 일대를 돌다가 한국전쟁 전후에 희생된 이들의 유골을 아무도 수습하지 않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기며 부끄러움을 감추기 어려웠다고 했다.

그는 유골에 좌·우익이 어디 있겠냐며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강조했다. "뼈에는 색깔이 없다"는 그의 일갈은 깊은 인간정신의 표현이다. 그런 마음으로 그는 60대 중반 나이에 전남 구례군 봉서리 산기슭 1만여 평에 직접 움막을 짓고 분단 희생자들을 위령하기 위한 공원을 가꾸기 시작했다. 이 공원이 지금의 '한겨레 생명평화공원'이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까지 10여 년간 수천, 수만, 아니 크게는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간 역사의 비극이 전라도, 경상도, 지리산 일대에, 나아가 한반도 전역에 펼쳐져 있다. 그 많은 유해와 유골을 남긴 우리의 역사, 여기서 우리는 과연 국가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김철호 선생과 같은 분이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지리산 기슭 볕바른 곳에 희생자들의 영혼을 달래는 공원을 조성해 왔다는 사실, 게다가 적지 않은 돈과 땅을 치유와 화해, 생명과 평화의 정신을 드높이는 데 쓰라며 기꺼이 내놓은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바로 여기서 나는 장 지오노 <나무를 심은 사람>의 주인공인 50대 중반의 엘제아르 부피에를 떠올린다. 그는 아들과 아내를 잃은 뒤 모든 걸 접고 프로방스 고산지대의 황무지 산에다 매일 도토리 100알씩 심기 시작했다. 그렇게 1차, 2차 세계대전 와중에도 수십 년 동안 나무를 가꾸자 황량한 산이 울창한 숲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제 김철호 선생이 가꾼 생명평화 공원 역시 '동족상잔의 비극'을 부른 이념 전쟁을 종식하고 생명과 평화의 기운으로 온 나라를 새롭게 만드는 모델이 되면 좋겠다. 그러나 온 나라가 정말로 좌우 분열을 끝내고 생명과 평화의 새 나라로 재탄생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른바 '동족상잔 비극'의 본질을 깨닫고 동시에 그 비극의 과정이 남긴 트라우마(마음의 상처)를 정직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른바 '동족상잔의 비극'이란 일제 식민주의가 끝난 뒤 어떤 나라를 만들어야 자주적이고 인간적인 공동체가 될 것인지를 둘러싼 이념 갈등이었다. 일제 대신 한반도를 점령한 미군은 미국식 자본주의를 한반도에 이식하고자 했다. 미군정 역시 일본군 무장해제엔 관심이 있었지만 한반도 안에서의 친일 청산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오히려 과거 친일파들이 친미 세력으로 변신하는 것을 환영했다.

그러나 토지개혁과 친일 청산을 통해 인간다운 세상을 열려는 민중의 강한 열망과 미국식 자본주의 시스템은 양립 불가였다. 이승만으로 상징되는 우익들은 미군정의 지지를 등에 업은 채 전평과 같은 노동운동, 인민위원회 활동, 남한 단독 정부 수립 반대운동 등을 모두 좌익 "빨갱이"로 몰아 탄압했다. 1950년부터 3년 동안 벌어진 한국전쟁 이전부터 한반도에는 좌우 갈등이 격화했고 바로 이것이 '동족상잔 비극'의 핵심이다.

이미 70년 이상 흐른 지금, 그간 미국식 자본주의는 1인당 국민소득 측면에서는 고도의 성장을 달성했지만,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반인간적인 경쟁 사회를 초래했고 기후위기나 미세먼지, 환경파괴까지 불렀다. 여전히 토지개혁과 친일 청산은 시대적 과제다. 인간다운 세상을 열망하는 민중의 외침은 7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다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좌우 분열과 대결을 종식하고 화해와 공존의 새 길을 여는 방법론은 무엇인가? 이것이 시대의 화두다.

다음으로, 그런 새 세상을 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더 이상 외면하지 말고 직시해야 한다. 제주4·3 특별법이나 여순10·19 특별법에 의거한 희생자들을 낱낱이 찾아내 희생자와 그 유족들을 위로하는 것이 급선무다. 동시에 유족들이 경험한 모든 것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말하도록 안전하고 평온한 분위기를 만들어 역사적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나아가 좌우를 떠나 모든 이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해야 한다. 그들의 가슴 깊은 얘기를 끝까지 경청하고 포용하며 이해하는 것이 사랑의 치유 방법론이자 역사를 새로 쓰는 방법론이다.

그런 이해와 치유의 분위기가 확산돼야 우리는 비로소 보수(우)와 진보(좌)의 대결을 떠나 화해와 소통의 길을 열 수 있다. 생각건대, 전통적 보수의 가치는 자유, 가족애, 민족애, 공동체, 국토애, 부의 축적, 기부와 기증 등이고, 전통적 진보의 가치는 평등, 분배, 민주주의 고양, 부패와 적폐 척결, 사회 정의, 노동인권과 복지 고양 등이다. 그러나 보수나 진보가 아무리 갈라져도 그 근본적 공통점은 '잘 살아보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는 진실로 모두가 잘 사는 데 도움 되는 가치들을 종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그래야 화해와 화합이 가능하다.

따라서 좌우를 떠나,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나 실천들이 진정으로 더불어 잘 사는 데 도움 되는 것이면 기꺼이 수용하고, 도움 되지 않는 것이면 과감히 버려야 한다. 부의 창조나 축적 자체를 경시하지 않되, 부의 내용을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공동체나 생태계에 해로운 부의 축적과 부정부패는 경계하되, 자유, 평등, 우애, 나눔의 가치는 장려해야 한다. 돈과 권력에 중독된 분위기를 타파하고 사회 정의나 인권, 보편 복지를 고양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남한도 북한도 서서히 변하면서 풀뿌리 민초들이 모든 중요 의사결정의 실질적 주체가 되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촉진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를 일관되게 실천하는 길이자 지난 세월 트라우마를 안고 희생된 이들이나 유족들을 근원적으로 치유함과 동시에 함께 새로운 미래를 만드는 현명한 방법론이 아닐까? 여기서 이수인 선생의 노래를 또다시 부른다.

"그 날 그 땐 지금 없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 비바람 모진 된서리 지나간 자욱마다 맘 아파도 알알이 맺힌 고운 진주알 아롱아롱 더욱 빛나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대전충남인권연대 뉴스레터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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