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 아닌 끝까지 가고 싶었다"... 두 모녀는 결국 찢어졌다
[인터뷰]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김세인 감독
▲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를 연출한 김세인 감독. ⓒ KAFA
영화를 끝까지 보고 있자면, 둘 중 누군가를 편들기 어렵다. 홀로 자식을 키워냈다는 이유로 딸에게 온갖 정서적, 물리적 학대를 가하는 수경(양말복)도, 그에 맞서지만 단순 방어를 넘어 법정에 가서까지 엄마를 몰아세우는 이정(임지호)도 모두 폭력적이다. 모녀 관계로 엮인 두 여성의 정서적 흐름을 이 감독이 파헤쳤다. 4일 오후 온라인으로 만난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의 김세인 감독은 이 이야기를 2016년 무렵 떠올렸고, 거기엔 본인이 체감한 엄마와의 어떤 정서적 경험이 은근하게 묻어 있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 공개되며 올해의 배우상, 관객상 등 5개 부문을 석권한 이 작품을 두고 관객들은 여러 반응을 보였다. 인자한 엄마, 모든 걸 희생하는 엄마나 순종하는 딸의 모습이 아닌 너무도 서로를 몰아붙이는 묘사에 불편함을 토로하기도 했고 묘한 정서적 공감대를 사기도 했다. 그간 단편 <햄스터>나 <불놀이> 등에서 소년기 외로움을 화두로 삼았던 감독은 "그 외로움의 끝에 엄마가 있었다"고 고백했다.
"다른 화두를 다룰 수 있기 위해서라도 그 정서에 직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제가 겪었거나 들은 실제 사건에서 출발한 건 아니고, 모녀 관계에서 오는 어떤 정서들이 제 삶과 닿아 있는 지점이 있었다. 2016년 당시 엄마와 살고 있었던 때였는데 전 영화 일을 계속 하고 싶어했고, 엄마는 반대했었다. 내 삶에서 뭘 선택하는 게 엄마에겐 일종의 배신이 되는 상황이었다. 그 직후 독립하게 되면서 이 글을 쓰게 됐다."
감독이 말한 영화의 시작점처럼 영화 속 인물은 서로 같은 속옷을 공유하면서도 모질게 군다. 그 강도가 셀수록 그만큼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다는 방증일 것이다. 엄마는 왜 자신의 힘든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딸을 나무라고, 딸은 자신을 학대하는 엄마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요구한다. 영화에선 이런 감정적 대립이 자동차 급발진으로 격화된다. 수경이 탄 차가 이정을 칠 뻔하면서 부상을 입힌다. 한쪽은 급발진을, 다른 한쪽은 고의성을 주장하고 결국 이정은 엄마 편이 아닌 자동차 제조사 편에 서며 법정까지 가게 되는 게 영화 속 주요 사건 중 하나다.
"시나리오를 쓰기 직전 급발진 사고 기사를 읽었다. 여러 다큐멘터리를 찾아봤는데 급발진 사고에서 피해자가 승소한 사례가 거의 없더라. 한국에선 특히 대기업에 대한 믿음이 견고해서 개인이 사고를 증명하기 어렵다고들 한다. 모성 또한 거기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감정을 하나로 규정할 수 없듯 모성도 사람마다 다를 텐데 마치 강한 모성애가 없으면 엄마 자격 박탈이라는 식의 생각이 우리 안에 있는 것 같았다."
영화엔 수경과 이정 관계 못지않게 수경의 내연남인 종열(양흥주)과 딸 소라(이유경)의 관계도 얼핏 다룬다. 파탄으로 치닫는 수경-이정이 마치 폭주하는 기관차 같다면, 종열과 소라의 부녀 관계는 알게 모르게 파열해가는 낡은 파이프 같다. 아내 없이 마찬가지로 홀로 딸을 돌봐온 종열은 이상적인 가족 관계 틀을 수경과 딸에게 요구한다. 김세인 감독은 "고정된 시각, 편견 안에서 사고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수경과 종열 네 가족 모두 공통점이 있다"고 덧붙였다.
"제 생각엔 우리 사회에선 부성보다 모성에 기대하는 게 더 많은 것 같았다. (같은 한부모 가정이라도) 정서적인 나눔을 아버지에게 바라기보단 엄마에게 더 바라는 것 같더라. 이건 자본과도 연관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아동 관련 제품 광고만 보더라도 모성을 자극하거나, 모성에 죄책감을 심어주는 마케팅이 많아 보였다."
▲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포스터. ⓒ KAFA
중년 여성들 대화에서 얻은 영감
영화의 핵심인 두 모녀 관계 설정을 물었다. 수경의 폭력성은 이정의 무심함을 재료 삼고, 이정의 분노는 수경의 폭력성을 재료 삼는다. 초반엔 마땅히 이정에 감정이입해 수경을 탓하기 십상이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이정의 냉정함도 끔찍하게 다가온다. 김세인 감독은 "적당히 만들고 싶지 않았다"고 운을 뗐다.
"관객분들에게 호불호가 갈리더라도, 일단 두 여자가 서로 타협하는 게 아니라 완벽하게 물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찢어지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좀 앞뒤 없이 서로 돌진하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영화가 끝나고 다양한 이야기가 오갈 수 있길 바랐다. 단순히 영화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걸 넘어서 여러 화두의 장이 되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선 이야기가 끝까지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대사들이 날것 같다는 평을 종종 들었는데 나름 돌이켜보면 어렸을 때부터 중년 여성이 많이 계시는 장소에 오래 있곤 했던 것 같다. 특히 목욕탕. 엄마랑 이틀에 한 번씩 정말 자주 다녔는데 사우나에 가면 여성들이 던지는 날것의 대화가 정말 많다. 자연스럽게 습득했던 것 같다(웃음)."
이 때문에 마냥 수경을 밉게만 그리지 않도록 하고, 이정 또한 속을 알 수 없게 세심하게 묘사하는 게 관건이었다고 한다. 김세인 감독은 한 달 반가량 작품을 위해 거친 감정을 유지해야 했던 배우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최대한 감정이 뒤섞이지 않게 시나리오 순서대로 찍으려 했다"며 나름 세심하게 준비한 과정을 언급하기도 했다.
"수경의 행동은 가정폭력이 맞고, 분명 잘못한 게 맞다. 하지만 두 모녀가 처한 상황이 오로지 수경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정 또한 서툴고 잘못한 부분이 있다. 그래서 그 감정의 골을 다 그리고 싶었고, 수경에게도 어느 정도 매력이 있게끔 묘사하고 싶었다. 원래부터 사람이 이상한 게 아니라 사회적 맥락에서 그들을 바라보게 하고 싶었다.
수경과 이정까지는 아니더라도 한국을 비롯해 해외에서도 모녀가 서로 너무 많은 걸 공유하고 기대하며 의지하려는 부분은 공통적으로 있는 것 같았다. 여러 영화제에서 관객과 대화하다 보면 두 여성의 경험과 감정에 공감한다는 반응이 많았거든. 가령 <펀홈>의 앨리슨 백델 작가가 내놓은 <당신 엄마 맞아?>라는 작품도 그 연장선이지 않나. 동서양에서 납득할 수 있는 보편성이 있다고 봤다."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본격적으로 영화를 배우기까지 김세인 감독도 어머니와 크고 작은 갈등을 겪었다고 한다. "안 믿기시겠지만 엄마 말을 엄청 잘 듣는 아이였다"며 자신을 소개하던 김 감독은 "애초에 대학교도 영화과이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영화를 한다고 했을 때 어머니가 반대하셨다"며 "그때 겪은 마음의 부침들이 영화적 질료로 활용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동시에 김 감독은 "물론 이 영화가 자전적 영화는 아니다"라고 재치 있게 선을 그었다.
"원래부터 완벽하게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실수도 하고 뭔갈 경험하며 단단해지는 것 같다.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도 애초에 옳은 선택만 하는 완벽한 사람으로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한 사람의 관객 입장에서 전 다소 엉성한 사람이 위기를 겪고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길 좋아한다. 그게 삶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주제를 제 첫 장편영화에 담게 됐다."
▲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양말복, 독립영화 스타양말복 배우가 1일 오후 서울 광장동의 한 상영관에서 열린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시사회에서 질의응답 시간을 갖고 있다. 왼쪽은 김세인 감독.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같은 속옷을 공유하지만 정작 마음은 나누지 못하는 두 사람이 갑작스런 사고 이후 서로의 마음을 마주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26회 부산국제영화제 5관왕 등 국내 주요 영화제 9관왕, 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파노라마와 24회 우디네극동영화제 경쟁 섹션 초대 등 개봉 전부터 많은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10일 개봉.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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