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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복권, 저작권 강의와 세계여행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평전 38] 한승헌은 1983년 광복절을 기해 변호사 자격이 복권되었다

등록|2022.11.20 16:29 수정|2022.11.20 16:29
언제부터인지 3.1절과 8.15는 위정자들이 선심을 쓰는 날이 되었다. 독재자일수록 즐겨하였다.

악법과 제도를 만들고 이를 지키지 않으면 처벌하고, 내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는 성냥개비 하나 준비하지 않은 평화주의자들을 내란죄로 다스렸다. 그리고 때가 되면 마치 도량이 넓은 위정자인 척 사면 또는 복권한다.
 

▲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제1차 회의가 18일 오후 서울 수송동 수송빌딩 회의실에서 공동위원장인 이해찬 총리와 한승헌 변호사를 비롯한 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한승헌은 1983년 광복절을 기해 변호사 자격이 복권되었다.

"우리 교회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다며, 한 아무개 변호사가 복권이 되었다고 하자 어느 부인이 '복권요? 얼마짜리 복권인데요?' 라고 묻더란 말을 들었다." (주석 9)

다시 변호사 업무로 돌아왔다. 재개업인 셈이다. 태평로의 한 건물에 사무실을 차리고 재개업을 하였다. 많은 사람이 축하해주고 이런저런 사건 의뢰인이 찾아왔다. 그리고 '과외'의 일도 많았다.

1983년 8월 15일 복권조치로 다시 변호사 사무소를 열고 소송업무를 재개할 수 있었다. 지난 어려웠던 시절을 회고하면서 <유신체제와 민주화운동>(돌베개)이라는 책을 몇 사람이 함께 묶어 내기도 하였다. 1984년 9월 한국기독교협의회 재일(在日) 한국인위원회 위원으로 피선되었다.

1985년 3월에는 한국저작권법학회가 창립되어 이사로 피선되었고, 4월부터는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에서 '저작권법'을 강의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민주화'를 표방한 6공화국이었지만, 사회적ㆍ문화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너무 많아 이 방면에 관심을 두고 노력을 기울여온 한승헌은 결코 한가할 수 없었다. 1987년 9월에는 <저작권의 국제적 보호와 출판>을 한국출판연구소에서 간행하였고, 1988년 3월에는 <저작권의 법제와 실무>(삼민사)라는 연구서를 냈다. (주석 10)

제2차 투옥으로 국립호텔 독채에서 독습한 저작권과 관련한 의뢰가 의외로 많았고, 1985년 9월 학기부터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에서 저작권법 강의를 맡았다. 한국대학에서 저작권법을 독립된 과목으로 채택한 것은 이 학교가 처음이다. 그는 한국출판학회를 창립한 서지학자 안춘근, 바톤을 받아 출판학회를 중흥시키고 <출판유통론>을 쓴 범우사의 윤형두 사장과 함께 이 분야의 개척자에 속한다. 무고한 '제2차 투옥'의 보상인 셈이다.

중앙대학에서 10여 년 강의에 이어 서강대 언론대학원, 그 다음에는 연세대 법무대학원으로 이어진 대학강의는 변호사와 겸직이 가능해서 더욱 보람을 갖게 되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저작권의 국제적 흐름을 익히고자 국제기구와 선진국을 방문하는 기회로 이어졌다.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지원으로 구미 8개국 저작권 기행을 하였다. 1986년 1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부터 독일서적협회, 파리의 국제연합경제과학교육기구(UNESCO) 런던의 영국출판협회, 워싱턴의 국회도서관 등을 찾았다.

예상치 못했던 이 여행의 다리를 놔준 분이 있었다. 크리스찬 아카데미 부원장으로 일하던, 제네바 세계교회협의회(WCC) 박경서 아시아 국장의 지원과 정보에 도움받은 바 컸다.


주석
9> <자서전>, 251쪽.
10> 최종고, 앞의 책, 82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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