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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권'의 황비홍, 아시아 액션 영웅의 상징이 된 까닭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단관개봉 시대에 서울 89만 동원한 <취권>

등록|2022.11.20 11:32 수정|2022.11.20 11:32
지난 2004년 개봉해 310만 관객을 모은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영화의 엔딩은 대한민국 학교의 족구 보급을 걱정하며 학교생활을 정리한 현수(권상우 분)가 재수학원을 다니다가 기분전환 삼아 영화관을 찾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현수와 함께 극장을 찾은 친구는 절친이자 라이벌이었던 우식(이정재 분)도, 짝사랑하던 소녀 은주(한가인 분)도 아닌 학급의 도서 보급(?)을 위해 힘쓰던 햄버거(박효준 분)였다.

햄버거는 기분전환을 위해 최근에 가장 유행하는 영화를 함께 보자며 극장 앞에서 현수를 설득한다. 하지만 현수는 이미 햄버거가 본 영화이기 때문에 두 번 볼 필요가 없다며 다른 영화를 보자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현수가 다른 영화를 보려고 했던 진짜 이유는 햄버거가 두 번이나 보려 할 정도로 좋아하는 액션영화의 주인공이 현수가 우상으로 생각하는 액션스타 고 이소룡의 자리를 가져가 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현수와 햄버거는 어떤 배우가 더 뛰어나냐는 주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다가 각자 아시아를 대표했던 두 명의 액션 히어로로 빙의해 장난스런 대결을 벌이면서 영화가 끝이 난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마지막 장면처럼 1970년대 후반 아시아의 액션판도는 요절한 이소룡에서 이 배우로 옮겨가게 됐다. 바로 1978년(국내에선 1979년)에 개봉해 폭발적인 사랑을 받은 영화 <취권>을 통해 액션스타의 세대교체를 알렸던 성룡이었다.
 

▲ 성룡은 <취권>을 통해 고 이소룡으로부터 아시아 액션히어로의 자리를 물려 받았다. ⓒ 연방영화(주)


<매트릭스> <와호장룡> <킬빌>의 무술감독

2019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과 2020년 아카데미 영화제 4관왕에 빛나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북미에서만 533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기록하며 역대 비영어권 영화 북미흥행 4위에 올랐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그리고 <기생충>도 끝내 넘지 못한 역대 비영어권 영화 북미흥행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작품이 바로 개봉 22년째 1위 자리를 수호하고 있는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1억2800만 달러)이다.

훗날 <브로크백 마운틴>과 <라이프 오브 파이>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두 번이나 수상하는 이안 감독은 <와호장룡>을 통해 동양무술의 아름다움과 무협영화의 매력을 북미관객들에게 확실히 전달했다. 그리고 <와호장룡>이 북미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비결은 1999년 <매트릭스>의 무술감독을 맡으며 현지 관객들에게 익숙해진 원화평 무술감독의 화려하면서도 절제된 무술연출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밑에서 무술을 연마했던 원화평 감독은 1970년 무협영화 <풍광살수>에서 무술감독을 맡으며 영화계에 입문했다.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무술감독 겸 배우로 활동하던 원화평 감독은 1978년 이소룡의 스턴트 배우였던 신예배우 성룡을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 작품이 바로 <취권>이었다. 원화평 감독은 1978년에만 <취권>과 <사형도수>를 연속으로 선보이며 명성을 높였다.

원화평 감독은 80년대에도 꾸준히 영화를 연출했지만 서극 감독과 오우삼 감독이 등장하면서 감독으로는 썩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렇게 90년대 중반까지 홍콩에서 활동하던 원화평 감독은 1999년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에서 무술감독을 맡으며 할리우드에 진출했고 2000년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을 통해 세계적인 무술감독으로 도약했다. 원화평 감독은 2003년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킬빌-1부>에서도 무술감독으로 참여했다.

2004년 중국으로 돌아와 주성치의 <쿵푸허슬>과 이연걸의 <무인 곽원갑> 무술 감독을 맡은 원화평 감독은 2010년 조문탁 주연의 <소걸아: 취권의 창시자>를 통해 오랜만에 연출에 복귀했다. 원화평 감독은 2016년 <와호장룡-운명의 검>과 2018년 <엽문 외전>을 연출했고 2019년에는 70대의 나이에 <엽문>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하는 <엽문4: 더 파이널>에서 무술감독을 맡으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성룡의 코믹액션이 만든 1000만 영화급 흥행
 

▲ <취권>에 등장하는 독창적이면서도 재미 있는 훈련방법은 그 시절 아시아의 청소년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다. ⓒ 연방영화(주)


1970년대 아시아 영화계는 작은 체구로 서양의 거구들을 쓰러트렸던 액션 히어로 이소룡이 시대를 풍미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소룡이 세상을 떠난지 5년이 지난 1978년, 이소룡 주연의 <정무문>과 <용쟁호투>에서 스턴트 배우로 출연했던 '이소룡 키드' 성룡이 주연을 맡은 <취권>이 공개되면서 아시아의 액션 히어로는 드디어 세대교체에 성공했다. <취권> 이후 성룡은 특유의 코믹액션을 앞세워 홍콩 최고의 스타로 군림했다.

지금처럼 정확한 통계를 낼 수는 없었지만 <취권>은 1979년9월에 개봉해 서울에서만 무려 89만 관객을 동원하며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당시 한국 극장가가 멀티플렉스는 커녕 한 작품이 하나의 극장에서만 상영되던 '단관개봉' 시대였음을 고려하면 <취권>의 인기와 열풍은 지금의 1000만 영화 수준이었다고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취권>은 무술가의 아들로 태어나 쿵푸에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언제나 말썽만 일으키는 황비홍(성룡 분)이 괴짜스승 소화전(원소전 분)을 만나 취권을 전수 받고 아버지를 죽이려는 암살범을 물리치는 내용의 영화다. 하지만 황비홍이 소화전에게 본격적으로 '취권'을 전수 받는 장면은 영화 후반부에나 등장하고 전체적으로는 안하무인 문제아 황비홍이 한 사람의 무도가로 성장하는 과정 전체가 영화의 핵심 주제다.

뭐니뭐니해도 <취권>의 묘미는 성룡을 비롯한 전문 액션배우들이 선보이는 화려한 액션장면들이다. 물론 술을 마시고 취할수록 전투력이 점점 높아진다는 <취권>의 설정은 말이 되지 않지만 <취권>은 영화적 과장을 담아 한 편의 멋진 코믹 액션영화로 탄생했다. 훗날 <황비홍>의 주제가로 유명해진 <남아당자강>도 <취권>에서 먼저 들을 수 있다(물론 <취권>에서는 가사가 없는 연주곡이었기 때문에 <황비홍> 같은 비장함은 없다).

1978년작 <취권>은 개봉 16년이 지난 1994년에야 속편이 제작·개봉됐다. 고 유가량 감독이 연출한 <취권2>는 70년대 무협 전문배우로 이름을 날렸고 <영웅본색> 시리즈의 주인공이었던 적룡이 성룡의 아버지 역으로 출연했다. 이밖에도 유덕화와 고 매염방 등이 출연해 1편보다 훨씬 화려한 라인업을 자랑했다. <취권2>는 국내에서 서울 37만 관객을 동원하며 인기를 얻었지만 1편만큼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다.

<취권>의 메인빌런 '신의 다리'가 한국인?
 

▲ 한국의 액션배우 황정리는 '신의 다리' 염철심 역을 맡아 <취권>의 메인빌런으로 활약했다. ⓒ 연방영화(주)


이소룡의 영화에서는 <맹룡과강>의 척 노리스나 <사망유희>의 카림 압둘-자바처럼 큰 체격을 자랑하는 빌런들이 등장해 관객들에게 더욱 큰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취권>에 등장한 '신의 다리'라는 닉네임을 가진 살인청부업자 염철심은 서양배우들만큼 덩치가 큰진 않지만 엄청난 실력을 자랑하는 고수로 등장했다. 영화 중반부에는 황비홍에게 크게 망신을 주며 황비홍이 각성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황비홍의 마지막 상대이자 <취권>의 메인빌런 염철심을 연기한 배우는 바로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한국과 홍콩을 넘나들며 무술배우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한국배우 황정리다. 황정리는 국내에서의 인지도는 그리 높지 않지만 무협영화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커다란 존경을 받는 액션배우다. 황정리는 이소룡이 출연한 모든 영화에 액션배우로 출연했던 황인식과 함께 7~80년대 한국 액션배우의 양대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많은 영화에 등장하는 '술을 좋아하지만 실력만큼은 최고인 허름한 몰골의 괴짜 스승'의 원조격인 소화자는 제자인 황비홍에게 기초체력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다가 영화 후반부 자신의 필살기인 취권을 전수해준다. 황비홍은 "남의 고통을 즐기는 괴팍한 노인"이라며 스승을 인정하지 않고 꾀만 부리려 하지만 염철심에게 굴욕적인 패배와 수모를 당한 후 소화자에게 용서를 빌며 수련에 정진한다.

소화자를 연기한 고 원소전은 다름 아닌 원화평 감독의 아버지로 원소전은 슬하에 아들 다섯을 뒀는데 원화평 감독은 원소전의 장남이다. 원소전은 성룡이 출연한 또 하나의 출세작 <사형도수>에서도 사권의 고수 백장천 역을 맡았는데 <사형도수>에서도 성룡에게 무술을 가르치는 스승으로 등장한다. 참고로 <취권>의 소화자는 90년대 큰 인기를 끌었던 격투대전게임 <킹 오브 파이터>에서 친 겐사이 캐릭터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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