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좁다란 거리에서 꽃다운 젊음들이 스러졌다. 158. 무참히 스러진 목숨, 고통의 이름이다. 기쁨에는 한계가 있으나 고통에는 한계가 없다. 기쁨으로 죽는 이는 없어도, 고통으로 삶을 놓는 이는 많다. 기쁨 나누기보다 고통을 함께 하는 일이 더 중한 이유다. 고통을 나누는 일은 공감에서 시작한다. 고통을 함께하려면 슬픔이 먼저 마음을 온전히 적셔야 한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함은 타인의 삶에 무심하거나 그 고통에 무감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무지하고 우둔한 탓이다. '더불어 삶'이라는 공동체의 기본을 모르고 타인의 삶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보통의 경우라도 문제지만 최고 위정자라면 크나큰 재앙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법적으로 죄는 아닐지라도 정치적으로는 큰 죄악이다.
원혼이 잠든 젊음의 거리는 이제 절망의 무덤이 되었다. 깊고 거대한 상처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견딜 수 없는 트라우마가 되었다. 우리는 과연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대한민국호의 수장은 최종 책임 장관과 총리는 두둔하고 밉보인 언론은 해외순방 전용기에서 배제하면서 '헌법 수호'라는 '마법'을 선보였다. 그가 가리키는 길의 끝은 어디일까. 취임과 더불어 입버릇처럼 말하던 '자유'민주주의에서 언론의 자유는 어떤 종류의 자유인가. 전용기에서 눈엣가시 언론을 밀어낸 '권력의 자유'는 그에 대한 항의로 스스로 탑승을 거부한 두 '언론의 자유'와 같은 것인가. 그가 외치는 '자유민주주의'의 길 위에서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는 질식하지 않고 숨 쉴 수 있을까.
좁다란 골목에서 시민이, 청춘이 질식하고 죽어가는 순간에 사태를 막고 참사를 저지해줄 공권력도 국가도 없었다. 미안하고, 비통하고, 애끓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참사는 막지 못했다. 하지만 책임과 수습은 할 수 있지 않는가. 아니, 반드시 해야 할 일이지 않은가. 법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그러나 마땅히 책임져야 할 자들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경찰청장도, 행정장관도, 행정수반도. 경찰국 신설까지 밀어붙인 행정안전부장관은 경찰공권력 지휘권이 없다고 회피하고, 외신기자 앞의 총리는 비통함으로도 부족할 판에 웃음과 농담으로 희생자들을 모독한다. 영혼 없는 애도의 메아리만 공허히 맴돈다. 일선 경찰과 소방대원이 중요한 책임자인가. 적절한 사전 대비를 지시하지 않은, 참사 발생 후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한 경찰 및 행정 수장은 왜 책임이 없는가.
시민의 이름으로 묻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무엇인가. 그 정부의 공무와 행정은 무엇인가. 행정부와 행정장관의 역할은 무엇인가. 다시 묻는다. 누구의 책임인가. 경찰청장은, 행정장관은, 행정 총괄 총리는, 행정수반 대통령은 정치, 도의적 책임이 과연 없는가.
질문이 하나 남았다. 우리 스스로를 향한 것이다. 합법적으로 임기 5년이 보장된 선출직인 그 대통령은 바로 우리의 민주주의 제도 속에서 유권자의 선택으로 탄생했다. 국가권력은 시민이 견제하고 감시하는 것이다. 서릿발 같은 매의 눈초리를 앞세운 비판 속에서만 권력은 지배의 속성이 약해지고 시민의 안녕과 안위를 돌본다. 그렇다면, 누구를 선택했든 우리가 감시와 비판의 의무를 제대로 수행한 것인지 자문해야 한다.
일찍이 역사와 현실의 고통을 직시한 케테 콜비츠의 작품 〈죽은 아이를 안은 여인〉은 자식 잃은 부모가 느끼는 극한의 고통을 처절하게 담아냈다. 잊을 수도 지울 수도 없이, 죽을 수도 살 수도 없이 연옥 같은 삶을 살아내야 하는 그 비통의 시간이 영원처럼 물화된 작품이다. 콜비츠는 1차세계대전에서 아들을, 2차대전에서는 손자를 잃었다. 어떻게 하늘을 보고 살 수 있었겠는가.
시월의 끝자락에 수많은 젊음이, 우리의 자식들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곳에서, 도저히 그럴 수 없는 방식으로 숨이 멎었다. 참사를 우려하는 적잖은 경고와 신고가 있었다. 끝내 참사로 이어진 수많은 허위와 허술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하지만 책임자는 없다. 책임 있는 인사의 진정한 사과도, 합당한 문책도 없다. 오히려 이 참사를 방지하거나 대비해야 했던 공무와 행정의 꼭대기 사람들이 시시비비를 가리는 책임자를 자임하고 있다. 책임을 묻는 자는 있어도 책임을 지는 자는 없다.
하지만 우리에겐 기억이 있다. 고통이 분노가 되고 분노가 저항이 된 기억, 촛불이 저항의 물결로 출렁이던 기억, 무책임한 권력이 촛불시민의 궐기로 한순간 무력(無力)으로 추락한 빛나는 기억이 있다. '역사의 기억'으로 켜켜이 쌓은 경험과 성찰이 '미래의 역사'를 만들기도 한다. 과거의 교훈과 현재의 책임을 외면한 권력의 미래도 마찬가지다. 철학자 푸코는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고, 권력에 맞서는 '하나의 거부'가 아니라 '여러 저항들'이 존재한다고 썼다.
타인의 고통과 공감에 둔하고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모르는 권력이 있다. 공감 없는 권력에 시민의 공감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책임 없는 권력에 스스로 책임지는 시민은 있다. 그 책임은 그런 권력을 향한 '분노와 저항'이다. 하나가 아니라 도처에서 몰아치는 '거부와 저항'이다. 한반도를 불태운 '촛불의 과거'를 잊었다면, 남은 것은 '촛불의 현실'일 것이다. 헤아릴 수 없는 숱한 저항이 빚어낼 '지나간 미래'일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함은 타인의 삶에 무심하거나 그 고통에 무감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무지하고 우둔한 탓이다. '더불어 삶'이라는 공동체의 기본을 모르고 타인의 삶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보통의 경우라도 문제지만 최고 위정자라면 크나큰 재앙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법적으로 죄는 아닐지라도 정치적으로는 큰 죄악이다.
좁다란 골목에서 시민이, 청춘이 질식하고 죽어가는 순간에 사태를 막고 참사를 저지해줄 공권력도 국가도 없었다. 미안하고, 비통하고, 애끓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참사는 막지 못했다. 하지만 책임과 수습은 할 수 있지 않는가. 아니, 반드시 해야 할 일이지 않은가. 법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그러나 마땅히 책임져야 할 자들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경찰청장도, 행정장관도, 행정수반도. 경찰국 신설까지 밀어붙인 행정안전부장관은 경찰공권력 지휘권이 없다고 회피하고, 외신기자 앞의 총리는 비통함으로도 부족할 판에 웃음과 농담으로 희생자들을 모독한다. 영혼 없는 애도의 메아리만 공허히 맴돈다. 일선 경찰과 소방대원이 중요한 책임자인가. 적절한 사전 대비를 지시하지 않은, 참사 발생 후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한 경찰 및 행정 수장은 왜 책임이 없는가.
시민의 이름으로 묻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무엇인가. 그 정부의 공무와 행정은 무엇인가. 행정부와 행정장관의 역할은 무엇인가. 다시 묻는다. 누구의 책임인가. 경찰청장은, 행정장관은, 행정 총괄 총리는, 행정수반 대통령은 정치, 도의적 책임이 과연 없는가.
질문이 하나 남았다. 우리 스스로를 향한 것이다. 합법적으로 임기 5년이 보장된 선출직인 그 대통령은 바로 우리의 민주주의 제도 속에서 유권자의 선택으로 탄생했다. 국가권력은 시민이 견제하고 감시하는 것이다. 서릿발 같은 매의 눈초리를 앞세운 비판 속에서만 권력은 지배의 속성이 약해지고 시민의 안녕과 안위를 돌본다. 그렇다면, 누구를 선택했든 우리가 감시와 비판의 의무를 제대로 수행한 것인지 자문해야 한다.
▲ 케테 콜비츠. '죽은 아이를 안은 여인' ⓒ Wikimedia Commons
일찍이 역사와 현실의 고통을 직시한 케테 콜비츠의 작품 〈죽은 아이를 안은 여인〉은 자식 잃은 부모가 느끼는 극한의 고통을 처절하게 담아냈다. 잊을 수도 지울 수도 없이, 죽을 수도 살 수도 없이 연옥 같은 삶을 살아내야 하는 그 비통의 시간이 영원처럼 물화된 작품이다. 콜비츠는 1차세계대전에서 아들을, 2차대전에서는 손자를 잃었다. 어떻게 하늘을 보고 살 수 있었겠는가.
시월의 끝자락에 수많은 젊음이, 우리의 자식들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곳에서, 도저히 그럴 수 없는 방식으로 숨이 멎었다. 참사를 우려하는 적잖은 경고와 신고가 있었다. 끝내 참사로 이어진 수많은 허위와 허술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하지만 책임자는 없다. 책임 있는 인사의 진정한 사과도, 합당한 문책도 없다. 오히려 이 참사를 방지하거나 대비해야 했던 공무와 행정의 꼭대기 사람들이 시시비비를 가리는 책임자를 자임하고 있다. 책임을 묻는 자는 있어도 책임을 지는 자는 없다.
하지만 우리에겐 기억이 있다. 고통이 분노가 되고 분노가 저항이 된 기억, 촛불이 저항의 물결로 출렁이던 기억, 무책임한 권력이 촛불시민의 궐기로 한순간 무력(無力)으로 추락한 빛나는 기억이 있다. '역사의 기억'으로 켜켜이 쌓은 경험과 성찰이 '미래의 역사'를 만들기도 한다. 과거의 교훈과 현재의 책임을 외면한 권력의 미래도 마찬가지다. 철학자 푸코는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고, 권력에 맞서는 '하나의 거부'가 아니라 '여러 저항들'이 존재한다고 썼다.
타인의 고통과 공감에 둔하고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모르는 권력이 있다. 공감 없는 권력에 시민의 공감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책임 없는 권력에 스스로 책임지는 시민은 있다. 그 책임은 그런 권력을 향한 '분노와 저항'이다. 하나가 아니라 도처에서 몰아치는 '거부와 저항'이다. 한반도를 불태운 '촛불의 과거'를 잊었다면, 남은 것은 '촛불의 현실'일 것이다. 헤아릴 수 없는 숱한 저항이 빚어낼 '지나간 미래'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민주주의사회연구소의 '성찰과 전망'(2022년 12월호)에도 송고합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