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표지 ⓒ 필요한책
지난 2000년, 10년간 영국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하지만 IMF 직후라 '역사학'을 전공한 내가 직장을 얻기란 '하늘의 별따기' 같았다. 1남1녀의 가장인 나는 호구지책으로 학원영어강사, 외국유학원 실장, 영어학원 월급원장, 다국적 외국기업 홍보 등 영어와 관련된 일을 닥치는 대로 했다. 월급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보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던 중 죽마고우이자 내 처녀작 <함석헌평전>을 내준 삼인출판사 홍승권 사장이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에서 영문보고서 번역과 제작담당자를 모집하는데 지원해 볼 것을 권유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무난하게 합격했다. 월급은 이전 다니던 민간기업보다는 훨씬 적었지만 한국현대사 전공자인 내게는 금상첨화인 직장이었다.
그리고 몇 년 뒤 진실화해위원회 일을 통해서 한국전쟁기에 벌어진 수많은 민간인학살 희생자와 그 후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인권침해 피해자 그리고 그 유족들의 끔찍한 증언을 수시로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면서 역사학 전공자로서 이분들의 억울하고 한많은 사연을 언젠가는 꼭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한국의 사상가 함석헌은 책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우리 민족은 착하고, 남을 괴롭힌 적이 없다"라고 했다. 하지만 한국 현대사의 수많은 민간인 학살 희생자와 인권침해 피해자, 억울하고 한 많은 유족들의 기막힌 사연을 접하며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함석헌의 생각에 전혀 동의하지 않게 되었다.
대한민국은 다른 나라의 속국이 되어 서로를 감시하고 배척하며 박해하는 일상이었던 일제강점기를 거쳐 세계사적 흐름 속 이데올로기 갈등의 대리전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이라는 잔인한 참변을 통해 태어났다. 그 후 이어진 독재시대에는 소수의 권력자들과 그들에게 충성하는 부역자들의 욕망을 위해 무수한 사람들의 피가 흘러야 했다.
과거 대한민국에서 수많은 개인들에게 벌어졌던 폭력과 죽음들을 접하다 보면 얼얼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 그 폭력의 궁극적인 주체가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가는 어째서 자유롭게 폭력을 휘두를 수 있었을까? 그 폭력이 국가제도와 체제로서 작동했기 때문이다.
그 모든 비극은 이데올로기 대립과 권력자들의 권력 강화 욕구, 그에 대한 다수의 침묵과 악의 평범성이 뒤엉켜서 일어났다. 책 <폭력의 역사>에서 제기되는 상당수 사건들 역시 여전히 정확한 내막을 알 수가 없으며, 공개되지 않는 정보가 어딘가에 감추어져 있다. 즉 우리 사회를 잔인하게 지배했던 어둠은 아직도 작동되고 있는 셈이다. 지금 우리는 그 어둠이 일굴 '폭력의 역사'가 다시 쓰여질지도 모르는 시대,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은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지난 6개월 동안 일어난 일들의 일부만 되새겨 보자. 아무리 들어도 '바이든'으로 들리는 단어가 '날리면'이라고 말했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이 공식석상에 서서 국민을 상대하는 정부 당국자의 입에서 나왔다. MBC, YTN 등 언론에 대한 탄압과 압박은 노골적으로 이뤄지고 있으며, 사이비 종교인이 국정에 개입하고 있다는 의혹마저 나왔다.
이태원 한복판에서는 젊은이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비극적인 참사가 터졌는데 정부 당국자들은 책임 회피에 급급하다. 이런 대한민국을 정상적이라고 볼 수 있을까. 거짓과 왜곡, 은폐와 강압이 권력을 지탱하는 수단이 되어가는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은 '폭력의 역사'를 만들어낸 과거의 시스템을 소름끼칠 정도로 닮아가고 있다.
이 책은 미약하게나마 한국 현대사의 어둠을 걷는 노력의 일환이 되길, 그리고 다시는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쓴 것이다. 이 책 내용의 다수는 필자가 오마이뉴스에 <김성수의 한국 현대사>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기사를 수정, 보완 한 것이다. 역사는 기록되고 읽힘으로써 과거에 일어난 잘못이 현재와 미래에 되풀이되지 않길 바라는 소망이 담기기 마련이다.
이 책은 지난 1948년부터 1992년까지 일어난 민간인학살 희생자와 인권침해 피해자 그리고 그 유족들이 겪은 엄청난 비극에 대한 '빙산의 일각'과도 같은 기록이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한국 현대사의 숨겨진 비극과 국가폭력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더 알 수 있게 되었다면 저자로서 더 큰 보람이 없겠다.
끝으로 이 책을 읽고 그 핵심을 잘 정리해 주신 두 분의 글을 인용하며 이 기사를 마친다.
"이미 많이 알려지기는 했으나 녹화사업, 조작간첩 등 의문사 사건 관련자들과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겪은 이야기는 다시 읽어도 너무나 끔찍하다. 군사정권과 한국 국가권력의 민낯은 이들 희생자들의 처절한 고통 속에서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책은 필자가 의문사위원회와 진실화해위원회 직원으로 일하면서 직접 대면했던 사건들을 인터뷰 등과 곁들여서 생생하게 재현했다. 구체적인 사건과 피해자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또 이해하기 쉽다. 특히 이 책을 보면 박정희 전두환 정권이 어땠는지, 그 시절을 겪지 못한 지금 청년들이 더 구체적인 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참으로 많이 죽었다. 죽음이라는 것이 누구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지만, 한국현대사에는 납득할 수 없는 죽음이 너무도 많았다. 가 버린 사람도, 남은 이들도 도대체 영문을 알 길 없는 죽음들, 누가 죽였는지, 왜 죽였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너무도 많았고, 설혹 알았다 해도 입도 뻥끗 못 하고 숨죽여 지내야 했다.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못했다. 그런 무기력과 무책임이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젊은 넋들이 진도 앞바다에서, 이태원에서 영문도 모르고 죽어가는 상황을 만들어 냈던 것은 아닐까? 남은 사람들은 그 죽음 앞에 무엇을 해야 할까."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