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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 치르지 말고, 정신 차리고...' 유족들은 왜 이런 당부 남겼나

[이 참사를 응시하라①] '피해자 권리'로 참사 바라보기

등록|2022.12.01 15:53 수정|2022.12.01 21:16
"마음 아프겠지만 독하게 마음먹고 장례를 치르지 말라고, 이태원 가족들 만나면 꼭 전해줘요."
 

▲ 지난 11월 3일 저녁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마련된 이태원 압사참사 희생자 추모공간에 내외국인들이 직접 작성한 추모글과 그림이 붙어 있다. ⓒ 권우성


이태원 참사 직후 만난 한 재난 유가족이 말했다. 어린 자식을 냉동고에 넣어둘 순 없어 정부 약속만 믿고 장례를 치른 게 패착이라고 그는 여전히 믿고 있었다. 장례 이후 태도를 바꾼 책임자들을 강제할 방법이 그에겐 없었기 때문이다.

"초기 법률지원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노력해보겠다는 문구는 어떤 법적 효력도 없더라고요."

또 다른 재난 유가족은 참사 직후 슬픔과 비탄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걸 후회하고 또 후회한다고 털어놨다. 그때 정신을 차렸다면 진상규명도, 단죄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이태원 참사로 혹시 아들의 친구들이 다치지 않았을까 마음을 졸였다는 아버지의 어깨가 들썩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도 비통하고 억울한데, 죄책감마저 유가족의 몫이다. 책임 있는 자들은 책임을 부인·축소 은폐하는데, 피해자들의 권리는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문제해결은 사랑하는 이가 살아 돌아오는 것보다 더 어렵겠구나.' 싸우고 싸우다 피해자들이 직면한 혹독한 진실이다.

기본적인 정보조차 제공 받지 못한 피해자들

국립재난안전연구원에 따르면 1964년에서부터 2013년까지 50년간 10명 이상이 사망한 재난은 276건에 달한다. 반세기 동안 약 두 달에 한 번씩 대형 참사가 발생한 셈이다. 하지만 재난을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피해지원을 시혜가 아닌 피해자들의 권리로서 생각하게 된 것은 2014년 4.16 세월호 참사 이후부터다. 숱한 모욕과 냉대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외쳐온 수많은 재난 참사 피해자들과 4.16 세월호 참사 이후 계속되어 온 4.16운동이 만든 변화다.

이에 정부는 '제4차 국가안전관리기본계획(2020~2024)'을 수립하며 시혜적인 공급자 중심의 피해지원을 사람·인권·피해자 중심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1) 그러나 이태원 참사에서 우리가 목도한 건 피해자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정부의 기민한 애도 관리일 뿐이었다. 국가 애도기간, 사고·사망자 표현 지침, 영정과 위패 없는 분향소 등 정부의 일방적인 조치는 사회적 논란만 낳았다.

일각에서 희생자 명단을 공개한 건 또 다른 상처가 됐다. 피해자들이 정부로부터 사고 발생 경과와 내용은 물론 수습 진행 사항과 피해자의 권리 등 기본적인 내용조차 안내받지 못했다는 증언도 들려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대로 된 이태원 참사 해결을 위해 피해자 권리 보장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가장 먼저 제기된 건 피해자들이 '모일 수 있는 권리'였다.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만큼 고통과 슬픔을 나누며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정보를 공유하고 머리를 맞대야 막막함을 넘어설 길이 보이고 오래 버틸 힘이 생긴다. 영국은 피해자들의 만남 주선을 정부 역할로 규정한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피해자 모임을 경계하고, 때론 방해까지 한다.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모으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 참사에서도 피해자들이, 시민사회단체가 서로를 모았다. 지체된 시간만큼 피해자들의 고통은 깊어졌고, 정부에 대한 불신은 높아졌다.

유엔 등의 국제기구들은 의사결정에서 재난 피해자의 참여와 협의, 정부의 투명한 정보 공개와 보관, 접근성 등을 재난 피해자의 권리로 강조한다. 정보 접근 및 알 권리와 참여권은 재난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은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신속하고, 체계적으로 정보를 공유 받을 권리가 있다. 그래야 혼란과 불신이 줄고, 제때 필요한 조력을 받을 수 있다. 참여해 목소리를 내고 협의할 수 있을 때, 정책의 의미와 수용성이 제고된다. 진상 및 책임규명, 배·보상, 온전한 기억과 추모의 측면에서도 알 권리와 참여권은 필수적이다.

다른 재난 피해자들의 조력이 권리라는 건 쉽게 상상하지 못한다. 재난 피해자들이 선의의 조언과 조력조차 선뜻 받아들이기도 어렵다. 경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또한 비통한 상황에서 판단과 대처마저 쉽지 않다. 이때 먼저 재난을 경험한 피해자들의 위로와 조력만큼 훌륭한 돌봄과 나침반은 없다.

이러한 필요성으로 프랑스는 재난피해자연합의 조력을 피해자들의 권리이자, 재난피해자연합의 권한으로 규정한다. 재난피해자연합은 피해자를 위한 조력뿐 아니라, 행정관청과 대중매체에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전하고, 피해자들의 실태를 조사할 수 있는 권한 역시 갖는다.
 

▲ 4·16 세월호 참사 이후 재난 피해자들과 인권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함께 만든 〈피해자 권리 매뉴얼〉 ⓒ 4·16재단


안전사회를 위한 시민의 권리 '진상규명과 책임 묻기'

작은 사고 앞에서도 "어쩌다가?"라고 물으며 사태와 경과를 확인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는 궁금함을 넘어 사고의 책임을 분명히 밝히고, 예방하기 위한 질문이기도 하다. 재난 발생 후 진실을 찾아야 할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재난의 진실을 찾는 여정은 참으로 멀고도 고단하다.

대표적인 군중 압착 재난인 영국의 힐스버러 참사(Hillsborough disaster)의 경우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을 묻는 데 28년이 걸렸다. 4.16 세월호 참사는 8년째 진상규명 중이다. 책임을 져야 할 권력자들이 빠르게 책임을 부인하고 사건을 은폐·축소하는데 반해, 감시자인 시민의 관심은 오래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상규명을 피해자들의 확실한 권리로 규정하고 온전히 보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살아남은 자들에겐 먼저 떠나보낸 이들에게 들려줄 말이 필요하다. 이는 왜 그가 허망한 죽임을 당했어야 했는가에 대한 진실이며, 책임있는 자들의 사죄와 합당한 처벌이다. 이것이 전제될 때 희생자들의 명예 회복과 추모가 가능하며, 유가족들이 삶을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 피해자들의 참여가 보장된 독립적이고 공정한 진상 규명기구와 성역 없는 책임규명을 요구하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매우 오랫동안, 빈번하게 재난 피해자들의 진상규명 요구는 보상금을 더 받아내기 위한 '시체 장사'로 매도됐다. 때론 '빨갱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배상과 보상은 국제협약으로도 공인된 피해자의 권리이다. 이는 불가능한 죽음과 피해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임에도, 누군가는 목숨과 돈을 거래한다고 호도한다. 피해자들에게 재난 책임을 떠넘기는 것도 부지기수다.

10.29 이태원 참사 이후에도 어김없이 "왜 이태원에 갔냐" "놀러 가서 죽었다"라는 말들이 터져 나왔다. 이런 태도와 관점은 피해자들에 대한 모욕일 뿐 아니라, 재난 책임을 개인화하여 보다 안전한 사회에 대한 논의를 방해할 뿐이다. 이 상황에서 기뻐하는 건 재난에 책임이 있는 범인이다. 따라서 진상규명과 책임 묻기, 혐오에 저항할 권리는 비단 피해자의 권리에 국한되지 않는다. 안전을 위한 모든 시민의 권리이기도 하다.

피해자들의 싸움은 희생자들 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재난의 진실과 책임규명, 강력한 배·보상은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대책이며,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이후 건축 관련 법과 제도가 정비되고,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이후에는 가연성 내연재가 퇴출되었다. 지금 우리의 안전은 수많은 피해자들의 피와 고통 위에 이룩된 것이다. 일상에서 재난 피해자를 추모하고 기억하는 것이 피해자의 권리이자 시민의 책무인 이유다.
 

▲ 프랑스 정부가 발간한 〈대형사고 피해자들의 체계적 보살핌 지침〉 ⓒ 프랑스 법무부


피해자의 곁에서 사회를 '짓기' 위해

이외에도 법적 조력, 심리지원 및 인도적 지원에 대한 권리 등이 존중되고 보장될 때 피해자들은 현재를 버텨내고, 한 걸음 더 내디딜 수 있다. 이태원 참사의 목격자이자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우리의 역할은 피해자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권리들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이해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피해자들이 일상을 영위할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가족의 죽음 이후 피해자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세계로 내던져진다. 이 삶은 그동안 살면서 축적해온 모든 삶의 기술들이 무력해지는 세계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누구도 제시해주지 못하는 세계다. 그럼에도 산 사람은 그래도 산다고,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고, 자식 죽어서 살림 폈다고, 그 집이, 저 사람이 바로 그 참사 피해자라고, 박복하다는 등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과 눈초리들을 쏟아내는 이들이 있다. 과한 연민도 깊은 상처다.

피해자의 정체성을 오로지 '피해자'로만 한정하고, 피해자다운 삶만 기대하는 사회는 빈곤한 사회다. 참사 이후 무너짐과 일어섬을 수없이 반복하며 길을 내는 피해자들이 다양한 정체성과 삶의 형태를 가지고, 다양한 욕구로 상실과 죽음을 애도할 수 있어야 사회(社會)라 말할 수 있다. 피해자 권리는 사회구성원들의 존중 속에서 더욱 굳게 뿌리내린다.

1) 주요 내용은 정확한 정보전달, 일원화된 소통창구, 지원내용의 안정성과 지속성 보장, 피해자들의 의사결정과정 참여 및 의견개진 보장, 적정·신속하며 2차 피해 없는 배·보상 시행, 재난 원인 조사의 독립성 보장 등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유해정 님은 성공회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위원이고 4·16 세월호 참사 작가기록단으로 참여했습니다. 이 글은 참여연대 소식지 <월간참여사회> 2022년 12월호에 실립니다. 참여연대 회원가입 02-723-4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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