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되는' 대통령... 그들이 뻔뻔할 수 있는 이유
[이 참사를 응시하라③] '안하무인' 가능한 내부-외부 요인 짚어보니
▲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1월 5일 오전 서울광장에 마련된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찾아 조문을 하고 있다. ⓒ 대통령실 제공
출범 반 년 만에 윤석열 정권의 특징이 명확히 드러난 것 같다. 뻔뻔함과 졸렬함이다. 책임져야 할 일에 책임지지 않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치졸한 보복을 가한다. MBC 기자를 전용기에서 배제하는가 하면 급기야 기자가 '무례하게 굴고 슬리퍼를 신었다'는 이유 따위로 언론과 소통 자체를 취소해 버린다.
윤석열 정권은 이태원 참사가 발생하자마자 "참사"나 "희생자"라는 표현을 공무원에게 쓰지 말라 하고 "사고"와 "사망자"로 바꿔 부르게 했다.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해 침묵을 강요하면서 도의적 사과조차 하지 않다가 참사 책임이 정부에 있다는 여론이 비등하자, 그제야 마지못한 사과를 내놓는다.
성격대로만 사는 사람은 없으며 공인이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드물긴 하지만 세상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가는 '안하무인 인간'도 있다. 그가 대다수와 구별되는 지점은 개인의 유별난 성격이 아니라 처한 환경, 사회적 조건이다. '그래도 되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대로 살아도, 제재 당하지 않고 큰 불편을 겪지 않으니 그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권의 뻔뻔함과 졸렬함에 단순히 경악하기보다는 그 뻔뻔함과 졸렬함을 마음껏 드러내도 되는 사회적 조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사시오패스'를 아십니까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그래도 되게' 만들었는가? 두 가지, '내부 요인'과 '외부 요인'으로 나눠볼 수 있다. 내부 요인은 윤석열 정권이 초심자라는 점이다. 그것도 그냥 초심자가 아니라 무려 첫 도전에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 초심자의 가장 큰 특징은 단순히 실력이 없는 게 아니라, 실력에 대한 평가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잘하고 못하고의 기준도 없고 뭘 해도 되고 안되는지도 모른다. 이런 특징에다 이른바 '콘크리트' 지지층까지 더해지면 무서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무슨 잘못을 해도 꿋꿋이 지지하는 지지층 30%가 있으면, 거기가 사실상 '바닥'인데도 그걸 바닥으로 인식하기 어렵다. 정권 초기 이 정도로 지지율이 낮으면 보통 국정운영에 큰 부담을 느끼게 되지만 초심자, 특히 정치적 실패를 경험한 적 없는 초심자는 위기 자체를 못 느낄 수 있다. 아예 국정운영을 잘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거나, 스스로 '이 정도면 준비 안 한 정치신인치고 매우 잘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시민 입장에서 어처구니없긴 매한가지다. 하지만 지금까지 행보를 보면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는 사안들이 적지 않았다. 윤석열 정권의 대선 공약과 인수위 시기 정책에 공동체의 미래나 비전에 대한 진지한 고민 자체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이런 추정에 힘을 싣는다.
설상가상은, 윤 대통령 생애 유일한 경력이 '사법시험 출신 검사'라는 점이다. 제대로 된 사회 경험 없이 '고시' 준비만 하다가 합격해 곧바로 최상위 엘리트가 돼 타인의 행위를 규율하게 된 이들은, 수평적 관계보다 수직적 위계에 익숙하고 선민의식이 강하거나 민주주의 인식 자체가 희박할 가능성이 크다. 오죽하면 이런 이들을 '사시오패스(사법시험+소시오패스)'라고까지 부를까. 소시오패스는 대개 타인에 대한 공감을 결여한 선천적 괴물이지만 '사시오패스'는 한국 특유의 승자독식 제도와 문화가 만들어낸 사회적 괴물이다(이들의 멘탈리티에 대한 분석은 제 졸저 <한국의 능력주의>(2021년 작) 5장을 참고해주시길).
윤석열 정권의 '야당복'
다음으로, 외부 요인이 있다. 바로 '민주당 및 민주당 정치 팬덤'의 존재다. 한국 정치에는 '야당복'이라는 말이 있다. 잘한 게 없는데, 야당이 헛발질이나 망언을 거듭해 여당이 반사이익을 얻는 경우를 가리킨다. 그런 면에서 윤석열 정권은 '야당복'의 화신 같은 정권이다. 직전 대선은 윤석열에 대한 지지라기보다 민주당과 문재인 정권에 대한 시민의 비토였다.
부동산 폭등, 박원순 서울시장 성추행 고소와 자살 사건, 조국 사태 등은 상당수 진보층과 부동층, 젊은 세대가 민주당에 등을 돌리는 정도를 넘어 적극적으로 반대하게 만들었다. 따지고 보면 민주당 정권이 검찰총장 윤석열을 만들지 않았다면, 대통령 윤석열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윤석열 대통령에게 '어둠의 개국공신'이나 다름없는 민주당은, 그가 대통령이 된 뒤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정부의 무책임한 대응이 시민의 공분을 일으키던 시점에, 친민주당 성향의 매체가 유가족 동의도 없이 희생자 실명을 공개해 버렸다. 이런 짓을 저지른 이유는 "윤석열 정권이 희생자 명단을 은폐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정부에 대한 분노와 별개로, 시민들은 명단을 공개한 매체와 이에 동조하는 상당수 민주당 지지자에게도 분노했다.
신상 정보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가 희박했던 과거와 달리, 요즘은 사고 희생자의 실명 공개가 극히 민감한 이슈다. 그래서 대부분 언론들은 몇 달 전 포항 폭우 당시 희생자 이름도 공개하지 않거나 매우 조심스럽게 처리했다. 지금은 이런 사고에서 희생자의 실명을 공개하지 않는 것이 일종의 '디폴트(기본값)'다. 일부 민주당 팬덤은 '정부의 명단 은폐'를 주장하지만, 실제 의도적으로 은폐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이미 유가족들이 신원을 확인한 이상 희생자 실명을 숨기는 건 불가능하다. 해당 매체는 요청하는 유가족에 한해 실명을 가림 처리해준다고 변명했지만, 그게 더 이상하다. 애초에 자기들 마음대로 공개한 것부터 잘못됐다.
이런 짓들, 고통받는 타인에 대한 공감이나 존중 없이 폭력적으로 대의명분만 들이미는 행태가 시민들의 반발을 사는 것이다. 특히 청년세대가 끔찍이 혐오하는 짓이 바로 이런 독선이다. 이렇게 '역풍'이 불자 윤석열 정권은 마치 대단한 인권 수호자라도 된 양 민주당과 해당 매체를 비난하고 나섰다. 분명한 건 민주당과 그 팬덤이 돌출적으로 저지르는 짓들 하나하나가 윤석열 정권에겐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대체 윤석열 정권 '야당복'의 끝은 어디인가?
▲ '텅 빈' 좌석 향해 연설하는 윤석열 대통령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0월 25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내년도 정부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민주당 의원들이 불참해 좌석이 비어 있다. ⓒ 공동취재사진
뻔뻔·졸렬의 근본 이유
'야당복'이라는 말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이게 어느 한쪽만의 복이 아니라는 거다. 민주당도 여당이 되면 어마어마한 복을 누린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서로에게 최고의 복덩어리들이고 그런데도 각자 그 복을 화끈하게 걷어차면서 정권이 교체되는 게 대한민국 정치사였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양당 독점 정치구조에 있다. 앨버트 허시먼의 조직론에 따르면 소비자나 구성원의 행위는 크게 이탈(exit), 항의(voice), 충성(loyalty)으로 나뉜다(엘버트 O. 허시먼,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강명구 옮김, 나무연필, 2016).
한국 정치에는 정당 간 극한 갈등은 있지만 정책 경쟁이 없고 제3의 대안이 부재하기에 '이탈'이 별로 효과가 없다. '항의'의 목소리는 "내부총질"이라는 말로 무력화된다. 결국 양쪽 진영에서 '충성' 경쟁하는 자들끼리의 이전투구만 남는다.
이렇다 보니 양쪽 모두에 비판적인 부동층은 선거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긴 하지만, 대부분 정치에는 극히 냉소적이거나 무관심해진다. 그리고 이 무관심과 냉소가 양당 독점구조를 재차 강화한다. 그들이 저토록 뻔뻔해지고 졸렬해질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박권일 님은 사회비평가입니다. 이 글은 참여연대 소식지 <월간참여사회> 2022년 12월호에 실립니다. 참여연대 회원가입 02-723-4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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