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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에서 미끄러져 남편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인생사 새옹지마, 중년의 나이에 획득한 또하나의 경험칙

등록|2022.12.06 16:30 수정|2022.12.07 08:04
시민기자 글쓰기 모임 '두번째독립50대'는 20대의 독립과는 다른 의미에서, 새롭게 나를 찾아가는 50대 전후의 고민을 씁니다.[편집자말]
'새옹지마'라는 고사로 알려진 중국 변방의 한 노인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화가 복이 되는 그 사연의 결과보다 노인에게 당장 벌어지는 일들이 당사자가 아니어도 숨 막힐 것 같았다. 노인의 삶이 참 심란하고 뒤숭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보니, 말 한 필이 두 마리가 되는 미래의 결과보다 당장의 말이 없어진 것이 난감할 때가 많다. 아들이 전쟁터로 나가는 일을 면한 결과도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당장 아들의 다리가 부러지고 절름발이가 된 것은 충분히 하늘이 무너질 일이 아닌가. 그런데 노인은 대범함을 넘어 스스로 마음을 잘 통제했던 것 같다. 연륜이 사람을 멋있게 만드니 나이를 먹는 건 때론 잔인하지 않다.

나는 당장의 일에 일희일비하는 편이다. 살다 보면 하루도 빠꼼하고 멀쩡한 날이 대체로 없지만, 그럼에도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지면 우선 스스로를 달달 볶는다. 속이 상하고 화도 나며 화살을 내게로 돌린다. 자책이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일의 원인에 나를 끼워 넣고 안절부절못한다. 마음도 힘들고 몸도 힘들어지며 스스로는 볼품없고 초라해 진다.

2주 전 토요일, 남편과 등산을 갔다가 남편의 다리가 부러졌다. 낮은 산이지만 정상도 밟고 적당히 땀도 흘리고 기분 좋은 하산길에서였다. 남편이 한 코스만 더 들렀다 가자는 말에 무사히 올라갔다 내려온 마음이 너무 흡족해서 그 정도야 하는 마음으로 흔쾌히 수용했다. 길지 않은 출렁다리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낙엽으로 덮인 길도 찍으며 가을 분위기를 만끽했다. 내 마음이 들떠서였을까, 약간의 내리막길에서 남편은 미끄러졌고 다리가 부러졌다.
 

▲ 남편과 등산을 갔다가 남편의 다리가 부러졌다. 부러진 다리에 핀을 박는 수술을 했다. 남편의 발이 묶이고 두 주가 지났다. ⓒ elements.envato


항암으로 떨어진 체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주말마다 가까운 산을 찾던 중이었다. 가을의 정취도 느끼고 자연이 주는 여유를 한껏 느낄 수 있어서 매주 기다리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수북이 쌓인 낙엽 밑으로 물기가 있었고 축축해진 바닥에 쌓인 낙엽이 미끄럼틀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체력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다시 무산되는 것 같았다.

산행에서 사고를 당하면 당연히 119에 구조를 요청할 수 있다는 것을 평소라면 충분히 생각했어야 하는데 막상 벌어진 일 앞에서 생각은 하얗게 지워졌다. 한쪽 발을 디디지 못해 어쩔 줄 몰라하는 남편을 두고 옆에서 더 당황하고 허둥댔다. 남편을 업지도 못하고 부축하는 것도 시원찮은 채로 어찌어찌 주차장까지 내려왔고, 세워둔 차를 몰아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가니 발목이 두 배로 부어 있었다. 그야말로 응급처치만 받고 집에 돌아왔다. 부기가 빠져야 수술을 할 수 있어서 수술은 이틀 후로 잡혔다. 부기를 빼고 통증을 완화시키는 약을 먹고 마음이 진정되고 나니 남편은 본인이 다쳐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부러진 다리로 학교를 오가야 하고 계단을 오르내리고 수업을 해야 하는 상황보다는 자신이 다친 것이 낫다며.

더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는 위로였다. 앞으로 한 달 이상의 혼란을 조금은 편하게 버틸 수 있도록 하는 넉넉한 배려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말이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해서 다가온 상황을 자연스럽게 넘기려는 지혜 같은 것으로.

부러진 다리에 핀을 박는 수술을 했다. 남편의 발이 묶이고 두 주가 지났다. 더는 못 가겠다고 하지 않은 것을, 그 길로 돌아가도록 기꺼이 허락한 것을 내내 후회했다. 구급차를 부를 생각도 못한 미련함도 자책했다. 하필 남편인 것도 속상했다.

작년에 남편의 암 발병과 항암치료라는 어려운 시간이 있었지만, 어려운 수술을 끝내고 난 후, 6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큰 사건이나 사고 없이 무난하게 지나온 삶에 대해 감사한 마음도 들기도 했다.

사고를 당하고 나니 몸의 나타나는 노화의 과정처럼 사고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간과했다는 생각을 했다. 삶은 확신할 수 없고 사고는 아침에 끼는 뿌연 안개처럼 조용히 스며들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마라톤을 뛰는 사람들이 '레이스 도중 자신을 질타하고 격려하기 위해 어떤 만트라(원뜻은 불교, 힌두교의 진언, 신들에 대하여 부르는 신성하고 마력적인 어구)를 머릿속으로 되풀이해서 외운다'(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고 한다. 42.195km를 달리는 데도 끝없이 자신을 채찍질하고 안전을 기원하는 주문이 필요한데, 길면 100세를 바라보는 인생의 레이스에는 얼마나 많은 만트라의 순간이 필요하겠는가.

어떤 삶이든 무사고 완주는 없다. 그러니 지나치게 안전을 자신하지도, 벌어진 사고에 지나치게 자신을 몰아붙일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더불어 어떤 사고를 만나든 마음의 근육을 탄탄하게 단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잘 사는 지혜가 아닐까 생각했다.

바쁜 두 주가 지났다. 할 일은 많고 시간은 한정되니 시간 운용의 묘를 자연스럽게 발휘하는 것 같다. 급한 것과 아닌 것,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빠르게 구분하고 시간을 쪼갠다. 그렇게 하며 그동안 느슨하게 풀어진 몸을 다시 팽팽하게 긴장시키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본인이 다친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는 남편의 말에 '새옹지마'의 노인이 갑자기 생각났다. 지금의 사고가 무슨 의미일지는 모르지만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라고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했다. 노인만큼의 혜안은 없지만 길흉화복은 의지와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교차한다는 것을, 때문에 슬퍼할 것도 노여워할 것도 없다는 경험칙은 하나 얻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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