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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보낸 3만 6천 시간... "후배님들, 잘 버티세요"

[인터뷰] 39년 비행 마친 박경진 승무원 "내 명예는 비행 그 자체... 꿈 이뤄 행복했다"

등록|2022.12.11 19:55 수정|2022.12.22 19:13
이제껏 지구를 745바퀴 돈 여성이 있다. 만 60세인 박경진씨는 39년을 대한항공 승무원으로 살았다. 1983년 입사, 나이는 21살이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입사 시험에 붙어 일을 시작하게 됐다. 그렇게 39년이 흘렀다. 39년 동안 3만 5800시간을 비행했다. 근무하는 동안 유니폼도 4번이나 바뀌었다.

올해 초, 박경진 승무원은 많은 이들의 축하 속에 39년의 비행 생활을 마쳤다. 수석 사무장급 최고령 정년퇴임자다. 그의 마지막 기내 방송 영상은 조회수 6만을 기록하며 SNS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함께 일한 후배들이 그의 마지막 비행편에 깜짝 이벤트로 탑승해 촬영한 영상이다.

"저는 여러분을 모시고 있는 객실사무장 박경진이라고 합니다. 저는 오늘 비행을 마지막으로 39년간의 승무원 직을 내려놓게 됩니다."

박경진 승무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내뱉곤 잠시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방송이 끝나자 승객들은 크게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여성으로서 39년간 한결같이 한 직업을 가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박경진 승무원과 지난 10월 30일, 12월 9일 두 차례 인터뷰를 진행했다.
 

▲ 강서구 한 카페에서 만난 박경진 승무원의 모습 ⓒ 정혜원


눈물 왈칵 쏟아지던, 3월 31일의 '마지막 비행'

그는 지난 3월 31일, 마지막 비행 날의 출근부터 스케줄까지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날은 울산을 찍고 김포에 돌아왔다가, 다시 제주를 갔다 오는 바쁜 하루였다고 한다. 지상 직원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문을 닫은 뒤, 평소처럼 사무장으로 이륙 방송을 했다.
 
"헤드셋을 딱 거는데, 이제 승무원으로는 마지막 이륙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참고 참았던 눈물이 확 쏟아졌어요."

박경진 승무원은 그날을 회상하다가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그는 "그러고 나서도 역시 나는 승무원이기 때문에 눈물 딱 그치고, 아주 씩씩하게 나왔다"고 말했다.

그렇게 승무원 생활이 끝나고 학원을 해라, 대학에서 강의해라, 여러 제안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평소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박경진 승무원이 말하는 '나선다'는 건 이런 의미다.

"내가 말한 '나선다'는 건 나를 내보인다는 걸 의미해요. 이름 석 자를 보이면서 빛내려고 하는 거요. 난 내 이름을 빛내기 위한 건 안 하고 싶어요. 승무원은 손님들 앞에 나서기는 하지만 나를 보이는 직업은 아니에요. 서비스직이기 때문에, 손님을 존중하고 기내 환경을 잘 조성하는 게 내 임무예요. 객실 내 안전에 대해선 거의 박사죠. 하나하나 생소한 게 다 눈에 들어와요. 그런데 그건 나를 내보이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 그의 39년 비행 생활이 늘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여자 승무원은 사원급 객실 승무원 4년을 거치고 나면, 부사무장(Assistance Purser·AP)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시험과 근무 성적을 보고 진급이 결정된다. 박경진 승무원은 1987년 바로 부사무장으로 진급했다. 진급한 연도가 뒤에 붙어 'AP 87'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 직급인 사무장(Purser·PS)이 되기까지 12년이 걸렸다. 7번이나 진급이 누락된 것이다.

"1987년도 입사 동기 중에서 제일 먼저 AP를 달았는데도 불구하고, 저만 안됐죠. 그래서 PS 99(1999년)였어요."


계속되는 진급 누락, 사무장 되기까지 걸린 12년
 

박경진 승무원은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타협하지 말아야 할 것엔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당시 뉴욕이나 LA 경우엔 한식당이 있으니까 차량이 픽업을 오기도 했어요. 하지만 다른 지역은 한식당이 없었어요. 그런데 (남자 사무장이) 한식을 먹고 싶어 하니까, 깻잎 같은 반찬에다가 쌀까지 싸 와서 밥을 해 먹었어야 했어요."
 

▲ 마지막 비행 공항 환송식에 온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 박경진 승무원 ⓒ 박경진


기내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기내에서도 서비스가 끝나면 사무장 밥을 차려줘야 했어요. 승무원 크루밀을 먹어도 되지만, 그래도 사무장이니까 일등석 여분의 음식을 차려주죠. 그러면 사무장들이 꼭 남자 승무원을 불러요. 남자라는 이유로. 나하고 같이 입사한 남자 승무원들을 따로 챙겨줬어요."

하지만 그는 절대 구부리지 않았다. 여자 승무원 중 가장 선배 격이 될 때까지도 확고했다.

"제가 탑 시니어를 할 때는 후배들한테 '절대 남자 승무원에게 음식 차려주지 말라'고 했어요. 사무장은 선배니까 어쩔 수 없지만, (여자 승무원이) 남자 승무원 밥 차려주는 건 꼭 바뀌어야 하는 문화라고 강조했어요."

위기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IMF 시기는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었다. 1997년, 박경진 승무원은 권고사직을 권유받았다.

"한 선배가 '1000만 원 더 준다니까, 그냥 이 기회에 명예롭게 퇴직하는 게 어떻겠냐' 그래요. 그 면담 끝나고 (제가) 얼마나 울었겠어요, 그렇게 좋아하던 비행인데. 그런데 비행을 끝나고 나오는데 계류장에 비행기 몇 대가 쭉 세워져 있잖아요. 그걸 보면서 '아, 내가 꿈을 이룬 사람인데' 하고. 여기서 사표를 쓰고 나가는 게 나 스스로 꿈을 포기하는 것 같은 거예요. 내가 내 꿈을 잘라 버리는 거잖아요."

박경진 승무원은 결국 사표를 쓰지 않았다. "이 세상에 자기 꿈을 이룬 사람만큼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겠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승무원 일에 대해 더 애착이 생겼다고 말했다.

"전 그때 명예를 버렸어요. 내가 가장 못 버리는 게 뭘지 생각했을 때, 박경진이라는 이름을 더럽히고 싶지 않은 그 명예였거든요. 그런데 (진급 누락과 권고사직을 겪고 나서) 승무원은 '박경진이라는 이름도 없이 있어야겠구나'라고 깨닫게 됐죠. 그때부터 승무직을 더욱더 천직이라고 느꼈어요."


그러고 나서 2년 정도 뒤에 진급이 됐다. 그땐 기쁠 것도 없었다고 한다.

"이미 저는 승무원 박경진이었지, 박경진이라는 인간 자체는 없어진 때였으니까요. 비행은 저한테 정말 전부였어요. 내가 뭐가 필요해요. 내 명예는 비행이고, 비행은 박경진 사무장이라는 그 자체인데."

그는 "자신이 알려줄 수 있는 기내의 모든 걸 후배들에게 다 알려줬다"며 "여한이 없다"고 했다. 내내 밝은 미소로 말을 이었지만, 눈물을 감추진 못했다.

"왜 이렇게 비행 얘기만 하면 눈물이 나지. 비행이 아직도 그리운 것 같아요. 더는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아쉬운 게 아니고, 뭐랄까 그냥 그리워요."

박경진 승무원은 39년을 한 직장에서 근무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결국엔 비행이 꿈이었고, 그 꿈을 이뤘기 때문인 것 같아요. 비행할 때가 너무 좋았어요, 유니폼을 입고 딱 서면 느끼는 자부심 때문에 잘 견뎠다고 생각해요."
 

▲ 유니폼을 입은 박경진 승무원의 마지막 비행 날 모습 ⓒ 박경진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할 수 있기를 꿈꾸는 후배 여성들에게 '버텨달라'고 당부했다.

"일 하면서 직언을 한 건 전혀 후회 안 해요. 제가 포기할 수 없는 것을 위한 직언이었으니까요. 만약 직언한 뒤에 불합리한 일을 당한다? 그런 상황이 오면 버티라는 거예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꼭 하겠다면. 그른 일을 그르다고 말하는 건 참지 마세요. 유연하게 말하면 되죠.

하지만 내 꿈을 위해서, 이 일을 통해서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게 있다면 인내하면 좋겠어요. 나도 버텼잖아요.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니까요."
덧붙이는 글 이 기사를 통해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어떻게 여성이 한 직장에서 39년을 일할 수 있었는가' 입니다. 39년을 버티게 한 꿈, 일에 대한 애착에 초점을 맞추어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본 의도와는 달리, '과거에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진' 부정적인 조직문화가 이슈화되고 있습니다. 엄연히 개인이 겪은 부당한 일이므로 없었던 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인터뷰이는 자신의 직업과 직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가 곡해되고 있는 것에 우려를 표하여, 내용을 일부 수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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