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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명필, 여기서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서원, 경주 옥산서원

등록|2022.12.12 15:58 수정|2022.12.12 15:58

▲ 경주 옥산서원 하마비 앞에서 촬영한 옥산서원 전경 ⓒ 한정환


경주의 북쪽 안강읍, 안강읍에는 조선시대의 경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 양대 산맥이 이곳에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역사마을로 등재된 경주 양동마을과 2019년 7월 전국의 9곳 서원이 묶여 '한국의 서원'으로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린 경주 옥산서원이다. 지난 8일 오후 이곳을 찾았다. 옥산서원은 양동마을에서 11km 떨어진 멀지 않은 거리에 서로 이웃하고 있다.

옥산서원이 자리한 옥산 2리 마을에는 서원을 비롯해 독락당,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등 소중한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다. 2019년 5월 문재인 전 대통령이 이앙기로 모내기를 하며 농민들을 격려했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옥산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2차선 도로로 좁다. 지난 9월 우리나라 남부지방을 휩쓸고 간 태풍 힌남로의 피해를 입어, 아직까지 도로 양쪽으로 막바지 복구공사가 한창이다. 2차선 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다다르면 옥산서원 마을길로 접어든다.

마을길 입구는 조선시대 선비의 마을답게 단정하게 잘 가꾸어져 있다.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는 삭막한 겨울 풍경이지만, 고즈넉한 마을길을 따라가다 보면 이내 옥산서원과 만난다.
  

▲ 경주 옥산서원유물관 전경 ⓒ 한정환


서원 앞에는 옥산서원유물관이 보인다. 옥산서원유물관에는 국보로 지정된 <삼국사기> 본질 9책 50권, <동국이상국전집>을 비롯한 <번역소학>, <주자대전> 등 고서들과 많은 무형유산, 기록유산 등이 보관되어 있다. 아쉽게도 유물관은 출입이 금지되어, 열람은 불가능하다.

경주 옥산서원 건축구조

옥산서원은 동방오현 중의 한 사람인 조선시대 학자 회재 이언적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1572년 건립되었다. 옥산서원을 바라다보면 주변 경관과 함께 서원 특유의 기풍과 위엄이 느껴진다.
 

▲ 경주 옥산서원 정면, 강당으로 사용된 구인당 모습 ⓒ 한정환


옥산서원은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곳의 서원 중 하나이다. 1967년 3월 8일 사적 제154호로 지정된 옥산서원은 서원 전면에 강학공간을 두고, 후면에 사당을 배치한 전형적인 서원 건축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정문인 역락문을 통해 들어가면 중층으로 된 누각 '무변루'가 보인다. '끝이 없는 누각'이라는 의미를 가진 무변루는 유생들의 휴식공간이다. 누마루를 서원 건축에 도입한 최초의 사례가 바로 옥산서원이다. 2층 누마루에 올라 판문을 열면 서원 내부는 물론 바로 앞 자옥산과 옥산천(자계천) 계곡이 그림처럼 펼쳐져 아름답기 그지없다.
 

▲ 경주 옥산서원 유생들의 휴식공간으로 사용된 무변루 모습 ⓒ 한정환


정면에 강당인 구인당이 있고, 좌우로는 유생들이 학문을 닦으며 기거하던 민구재와 암수재가 자리하고 있다. 유생들 간에도 위계가 있어 나이가 많은 유생들이 동재 즉 민구재에 기거하였다. 서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인 구인당은 강의와 토론이 열렸던 곳이다. 마루 양쪽의 양진재와 해립재는 교수와 유사(有司)들이 기거하던 곳으로 현대 학교의 교무실에 해당된다.

마당 가운데는 관솔불을 피워 서원을 밝히던 정료대가 세워져 있다. 정료대는 원래 정혜사지에 있던 것을 옥산서원으로 옮겨 놓았다. 강학공간 뒤에는 회재 이언적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을 비롯해 신도비, 경각, 전사청 등이 배치되어 있다.

조선 최고 명필들의 향연이 펼쳐지는 곳

옥산서원에는 편액이 많이 걸려 있다. 강당 전면에 걸린 '옥산서원' 편액은 조선의 명필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고, 강당 안쪽에 있는 '옥산서원' 편액은 문신이자 명필인 아계 이산해가 썼다. 마루 안쪽에 걸린 '구인당' 편액은 '무변루'와 함께 석봉 한호의 글씨다. 조선 최고 서예가들의 글씨를 한곳에서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옥산서원이다.
 

▲ 경주 옥산서원 세심대 용추폭포와 외나무다리 모습 ⓒ 한정환

 
옥산서원 바깥에는 옥산천이 흐르는데, 옥산 1곡부터 9곡까지 계곡을 따라 펼쳐진다. 옥산서원 바로 앞에는 옥산 3곡이라 불리는 세심대가 자리하고 있다. 세심대 주위로 옥산천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와 작은 용추폭포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소리가 경쾌하여, 이곳을 찾는 이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만든다.
 

▲ 경주 옥산서원 옥산천 너럭바위에 퇴계 이황이 쓴 '세심대' 글씨 모습 ⓒ 한정환


용추폭포 바위에 새겨진 '용추'라는 글씨와 너럭바위 중앙에 새긴 '세심대'라는 글씨는 퇴계 이황이 썼다. 세심대는 유생들이 심신을 깨끗이 씻고 자연을 벗삼아 학문을 연마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옥산서원 명품 둘레길

옥산서원을 관람하고 나오면, 세심대와 옥산서원 사이에 독락당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으로 가는 숲길이 정비되어 있다. 지난 4월 말 조성된 옥산서원 명품 둘레길이다. 옥산천 개울을 따라 거슬러 오르는 아름다운 숲길이다. 산책을 즐기며 거닐기 좋게 야자수 매트와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 경주 옥산서원 명품 둘레길 모습 ⓒ 한정환


옥산 2리 마을회관을 출발하여 옥산서원 – 세심대 – 관어대 - 징심대 -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 옥산서원 하마비 – 옥산서원 원점으로 회귀하는 코스로 총연장 3.6km이며, 관람시간 포함하여 2시간 30분이 소요되는 걷기 좋은 길이다.
 

▲ 경주 옥산서원 옥산구곡 중 제7곡에 해당하는 징심대 개울 모습 ⓒ 한정환


독락당 최고의 이색적 포인트, 살창
 
둘레길을 거닐다 보면 회재 이언적 선생이 이름을 붙인 너럭바위 관어대와 징심대를 만날 수 있다.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에 잠시 심취해 걷다 보면, 곧바로 독락당에 다다른다. 보물 제413호로 지정된 독락당은 조선시대 유학자 회재 이언적이 중종 27년(1532)에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파직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별장이다. 옥산정사라고도 한다.

"어진 선비도 세속의 일을 잊고 자신의 도를 즐긴다"라는 이름을 가진 독락당에서 그는 조정으로 복귀할 때까지 이곳에서 성리학 연구에만 몰두하며 학문을 닦았다. 사랑채 옥산정사와 그 뒤편에 정자 계정(溪亭)이 관어대 개울을 끼고 자리해 있다.
 

▲ 경주 독락당 최고의 이색적 포인트 ‘살창“ ⓒ 한정환


독락당 옆쪽 담장에는 좁은 나무로 살을 대어 만든 살창이 보인다. 독락당과 계곡 사이의 담장에 살창을 설치해 계곡의 풍경을 독락당 안으로 끌어들인 모습이 인상적이다. 독락당 최고의 이색적인 포인트로 독락당 대청에서 계곡을 바로 내다볼 수 있다. 사랑채 뒤에 있는 정자인 계정에서 내려다보는 계곡의 풍광도 한 폭의 풍경화를 보듯 수려하다. 독락당은 이름 그대로 홀로 사색하고 즐기며, 머물고 싶은 공간이다.
  

▲ 경주 독락당 정자'계정' 모습 ⓒ 한정환


또 독락당에는 회재 선생이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친구로부터 종자를 얻어 심었다고 전해지는 조각자나무가 있다. 천연기념물 제115호로 지정되었지만 수령이 470년이 넘어 상태가 썩 좋지 못하다.

독락당에도 조선 최고의 명필을 만나 볼 수 있는데 독락당 현판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아계 이산해의 글씨며, 옥산정사 현판은 퇴계 이황의 친필이다. 계정에 걸린 편액은 석봉 한호 선생이 썼다고 전해 내려온다.
  

▲ 국보 제40호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모습 ⓒ 한정환


독락당에서 멀지 않은 둘레길 끝 지점에 독특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탑이 하나 있다. 국보 제40호로 지정된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이다. 통일신라시대 대부분의 석탑이 3층 또는 5층인데 비해 정혜사지에 있는 석탑은 십삼층으로 특이하다.

조금 작은 편이지만 탑의 위용만큼은 하늘을 찌를 듯 그 기상이 느껴진다. 통일신라시대 탑으로는 유사한 형태를 찾아볼 수 없는 사례로, 남북국시대 석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 찾아가는 길
 

- 주소 :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 주차료 및 입장료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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