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의 아픔을 그림으로... 늘그막에 존재 찾지요"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 7] 최옥경 화가 인터뷰
"그림은 저에게 동경의 대상이었죠. 풍경이나 인물화에 매진한 것도 그 때문이죠. 그러다 언제부턴가 더 간절한 게 생겼어요. 제 마음을 그리고 싶었죠.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의 아픔, 촛불을 든 시민들의 의지, 나이 들어감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미술은 제 존재가 돼 가나 봐요. 양평에 와서 늘그막에 평안을 얻은 걸 보면요. 노장자도 제 그림에 담을 수 있겠죠?"
'여주양평 문화예술인의 삶' 일곱 번째 주인공 최옥경 화가의 말이다. 11일부터 여드레간 아신갤러리(양평 옥천면)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그를 13일 오후 만났다. 폐열차 두 칸을 이어 만든 전시실에서 페도라 모자를 눌러쓴 채 기자를 맞은 그는 진한 원두커피 한 잔부터 권했다.
이태원 참사와 세월호 아픔을 담은 작품, 촛불행진을 하는 시위 그림, 노인 인물화, 스러져 가는(낙엽) 것들의 슬픔과 삶의 고뇌를 담은 추상화 등 20여 점을 전시하고 있었다. 사회성 짙은 작품들이었다. 민중미술을 해 온 화가인가 싶었는데,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는 나주 태생이다. 의사 아버지와 교사 어머니를 둔 유복한 집안의 딸(2남 6녀의 여섯번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때 부친 작고로 가계가 쪼들리며 갑작스런 빈곤을 피할 수 없었다. 고교를 마치고 몰래 서울의 한 미대에 합격했지만 학자금이 없어 포기해야 했다. 교대(2년) 가라는 가족의 강권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방황했는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염세에 빠졌고요. 하지만 현실과 타협이 불가피했어요. 둘째 언니가 음대를 중퇴(빈곤)하고 피아노 학원을 운영했는데, 거기서 알바를 했습니다. 미술을 접을 수 없어 이종상 교수(서울대 동양화과) 등을 만나며 꿈을 키웠죠."
그렇게 30대 초까지 등록금을 벌어 결국 미대에 들어갔다. 덕성여대 동양화과(1회)를 장학금을 받고 입학할 수 있었다. 이어 이화여대 교육대학원(미술교육)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학원 등에서 알바(강사)를 하느라 그림 작업은 많이 할 수 없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예술에 관심이 컸다고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담임교사가 "미술에 재능이 있다"며 미술대회 출전을 권했고, 거기서 상을 탔다. 중고교 때는 미술부 특활을 했다. 특히 교교시절 미술부 교사가 일본서 동양화를 전공한 덕에 4군자를 배웠고, 자연스럽게 동양화(한국화) 공부를 하게 됐다.
대학원을 졸업하고는 부업으로 초중고나 학원 미술 강사를 했지만 그림을 그리지는 못했다. 10여 년 화폭과 멀어졌던 그는 2000년 이후 예술혼을 다시 깨웠다. 남편을 따라 여주에 거주하던 시절 한 도예가에게 수업을 받기 시작한 것. 8년여 각고 끝에 전시회도 했지만, 지병인 류마티스가 도지며 그만둬야 했다.
그 뒤 펜션 사업을 시작했다. 갤러리를 만들려다 돈벌이가 여의치 않아 펜션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화가들이 펜션 앞 강가에 와 야외스케치 하는 모습을 여러 번 봤어요. 너무 그림을 하고 싶었죠. 한국풍경화가회, 양평사생회 등에 가입해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작업을 그만 둔지 10여 년 만이죠. 두 가지를 하는 게 힘들어 보였던지, 남편이 펜션을 그만두라고 하더군요. 남편의 인테리어(건축) 사업도 괜찮았고요."
도자기·펜션 그만두고 다시 회화
2020년 그의 작품이 달라졌다. 풍경, 인물, 누드에서 마음으로 화폭 내용이 바뀐 것이다. 남편과 자신의 진보적 성향을 그림에 반영한 것. "1998년 이후 여주양평에 정착했는데, 보수라는 데 반민족이고, 북한을 주적으로 여기며, 노동자와 서민을 무시하는 가짜 보수를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어요."
그는 애초 한국미협(추천자가 서양화로 등록)과 양평미협 활동을 했다. 양평에 민예총 등 진보적 단체가 없었던 탓이기도 했다. 민예총 설립 논의를 했는데 여의치 않아, 양평문화예술인네트워크를 결성해 활동해왔다. 그러다보니 사회적 아픔을 자연스럽게 주제로 다루게 됐다. 추상표현주의로 방향을 틀었다고 할까.
그럼 그에게 그림은 무엇일까?
"오랜 세월 동경의 대상으로 봐왔다면, 이젠 존재의 확인이라 생각합니다. 내용이 바뀐 까닭이지요. 미술에서 완성이란 게 있을 수 없겠지만, 앞으론 노·장자 등의 철학도 표현하고 싶어요. 동양화(한국화)로 출발했지만 영역을 넘나드는 실험을 계속 해야죠."
1937년 스페인 독재와 내전의 참상을 그린 작품 '게르니카'. "보는 대로 가 아닌 생각하는 대로 그린다"는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이다. 프랑크 슐츠 교수(독일 라이프치히대 예술교육)는 그의 저서 <현대미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다>(국내 번역출간)에서 "미술의 본질은 인간, 눈에 안 보이지만 내면세계에서 메시지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음악에서 표현주의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1798년)을 꼽는다.
그는 왜 양평에 머물고 있을까? 애초 도시가 싫다(건강도 안 좋아)는 남편 따라 여주로 내려왔다. 남편이 2년 먼저와 헌집을 고쳤고(그 계기로 남편은 건축 관련 사업으로 전업), 그 뒤 자연스럽게 합류하게 됐다. 지금은 그가 더 좋아한다고 했다. 번잡하지 않고 너무 멀지 않으며 공기가 좋아서 그렇단다. 그의 주 활동무대가 양평이어서 여주에서 다시 이주하게 된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다"
"양평 삶은 어떠냐"는 질문엔 "너무 좋다"고 즉답한다. "제가 늘그막에 미술대학을 갔는데, 생활전선에 얽매이다보니 미술작업도 다시 늘그막에 본격화하네요. 헌데, 지금이 가장 행복합니다. 몸은 늙었어도 마음은 평안해요. 더 이상 욕심도 없고요."
예부터 큰 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고 했다. 큰 종과 큰 솥을 쉽게 만들 수 없는 것처럼. 노자가 도덕경에서 언급한 대기만성 이야기다. 슈베르트가 9개의 교향곡을 작곡했는데, 가장 늦게 그것도 마치지 못한 8번 교향곡(미완성)을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꼽는다. 스필버그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사용된 그 음악이다. 몽유도원도 등 전통 그림을 재해석하는 작품을 해보고 싶다니 그 미래가 궁금하다.
작품 판매를 물으니 가끔 구입하는 이가 있지만 크게 도움은 안 된단다. 작품으로 돈 벌 생각도 애초 없었고. "잘 팔려면 구매자 구미에 맞춰야 하는데, 그럼 내 그림이 아닌 거잖아요. 난 그런 예술 하고 싶지 않아요. 미술이 당당해야죠. 진보예술이니까요."
그는 두 번의 개인전(2017년 조형갤러리와 진행중 아신갤러리)과 남북평화미술전, 대한민국미술축전, 뉴욕아트페스티벌, 근맥전 등 수많은 단체전을 열었다.
'여주양평 문화예술인의 삶' 일곱 번째 주인공 최옥경 화가의 말이다. 11일부터 여드레간 아신갤러리(양평 옥천면)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그를 13일 오후 만났다. 폐열차 두 칸을 이어 만든 전시실에서 페도라 모자를 눌러쓴 채 기자를 맞은 그는 진한 원두커피 한 잔부터 권했다.
▲ 개인전 연 최옥경 화가. ⓒ 최방식
그는 나주 태생이다. 의사 아버지와 교사 어머니를 둔 유복한 집안의 딸(2남 6녀의 여섯번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때 부친 작고로 가계가 쪼들리며 갑작스런 빈곤을 피할 수 없었다. 고교를 마치고 몰래 서울의 한 미대에 합격했지만 학자금이 없어 포기해야 했다. 교대(2년) 가라는 가족의 강권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방황했는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염세에 빠졌고요. 하지만 현실과 타협이 불가피했어요. 둘째 언니가 음대를 중퇴(빈곤)하고 피아노 학원을 운영했는데, 거기서 알바를 했습니다. 미술을 접을 수 없어 이종상 교수(서울대 동양화과) 등을 만나며 꿈을 키웠죠."
그렇게 30대 초까지 등록금을 벌어 결국 미대에 들어갔다. 덕성여대 동양화과(1회)를 장학금을 받고 입학할 수 있었다. 이어 이화여대 교육대학원(미술교육)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학원 등에서 알바(강사)를 하느라 그림 작업은 많이 할 수 없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예술에 관심이 컸다고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담임교사가 "미술에 재능이 있다"며 미술대회 출전을 권했고, 거기서 상을 탔다. 중고교 때는 미술부 특활을 했다. 특히 교교시절 미술부 교사가 일본서 동양화를 전공한 덕에 4군자를 배웠고, 자연스럽게 동양화(한국화) 공부를 하게 됐다.
대학원을 졸업하고는 부업으로 초중고나 학원 미술 강사를 했지만 그림을 그리지는 못했다. 10여 년 화폭과 멀어졌던 그는 2000년 이후 예술혼을 다시 깨웠다. 남편을 따라 여주에 거주하던 시절 한 도예가에게 수업을 받기 시작한 것. 8년여 각고 끝에 전시회도 했지만, 지병인 류마티스가 도지며 그만둬야 했다.
그 뒤 펜션 사업을 시작했다. 갤러리를 만들려다 돈벌이가 여의치 않아 펜션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화가들이 펜션 앞 강가에 와 야외스케치 하는 모습을 여러 번 봤어요. 너무 그림을 하고 싶었죠. 한국풍경화가회, 양평사생회 등에 가입해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작업을 그만 둔지 10여 년 만이죠. 두 가지를 하는 게 힘들어 보였던지, 남편이 펜션을 그만두라고 하더군요. 남편의 인테리어(건축) 사업도 괜찮았고요."
도자기·펜션 그만두고 다시 회화
2020년 그의 작품이 달라졌다. 풍경, 인물, 누드에서 마음으로 화폭 내용이 바뀐 것이다. 남편과 자신의 진보적 성향을 그림에 반영한 것. "1998년 이후 여주양평에 정착했는데, 보수라는 데 반민족이고, 북한을 주적으로 여기며, 노동자와 서민을 무시하는 가짜 보수를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어요."
▲ 최옥경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아신갤러리. ⓒ 최방식
그는 애초 한국미협(추천자가 서양화로 등록)과 양평미협 활동을 했다. 양평에 민예총 등 진보적 단체가 없었던 탓이기도 했다. 민예총 설립 논의를 했는데 여의치 않아, 양평문화예술인네트워크를 결성해 활동해왔다. 그러다보니 사회적 아픔을 자연스럽게 주제로 다루게 됐다. 추상표현주의로 방향을 틀었다고 할까.
그럼 그에게 그림은 무엇일까?
"오랜 세월 동경의 대상으로 봐왔다면, 이젠 존재의 확인이라 생각합니다. 내용이 바뀐 까닭이지요. 미술에서 완성이란 게 있을 수 없겠지만, 앞으론 노·장자 등의 철학도 표현하고 싶어요. 동양화(한국화)로 출발했지만 영역을 넘나드는 실험을 계속 해야죠."
1937년 스페인 독재와 내전의 참상을 그린 작품 '게르니카'. "보는 대로 가 아닌 생각하는 대로 그린다"는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이다. 프랑크 슐츠 교수(독일 라이프치히대 예술교육)는 그의 저서 <현대미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다>(국내 번역출간)에서 "미술의 본질은 인간, 눈에 안 보이지만 내면세계에서 메시지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음악에서 표현주의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1798년)을 꼽는다.
그는 왜 양평에 머물고 있을까? 애초 도시가 싫다(건강도 안 좋아)는 남편 따라 여주로 내려왔다. 남편이 2년 먼저와 헌집을 고쳤고(그 계기로 남편은 건축 관련 사업으로 전업), 그 뒤 자연스럽게 합류하게 됐다. 지금은 그가 더 좋아한다고 했다. 번잡하지 않고 너무 멀지 않으며 공기가 좋아서 그렇단다. 그의 주 활동무대가 양평이어서 여주에서 다시 이주하게 된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다"
"양평 삶은 어떠냐"는 질문엔 "너무 좋다"고 즉답한다. "제가 늘그막에 미술대학을 갔는데, 생활전선에 얽매이다보니 미술작업도 다시 늘그막에 본격화하네요. 헌데, 지금이 가장 행복합니다. 몸은 늙었어도 마음은 평안해요. 더 이상 욕심도 없고요."
예부터 큰 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고 했다. 큰 종과 큰 솥을 쉽게 만들 수 없는 것처럼. 노자가 도덕경에서 언급한 대기만성 이야기다. 슈베르트가 9개의 교향곡을 작곡했는데, 가장 늦게 그것도 마치지 못한 8번 교향곡(미완성)을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꼽는다. 스필버그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사용된 그 음악이다. 몽유도원도 등 전통 그림을 재해석하는 작품을 해보고 싶다니 그 미래가 궁금하다.
▲ 이태원 참사 등 사회성 짙은 최옥경 화가의 작품들. ⓒ 최방식
작품 판매를 물으니 가끔 구입하는 이가 있지만 크게 도움은 안 된단다. 작품으로 돈 벌 생각도 애초 없었고. "잘 팔려면 구매자 구미에 맞춰야 하는데, 그럼 내 그림이 아닌 거잖아요. 난 그런 예술 하고 싶지 않아요. 미술이 당당해야죠. 진보예술이니까요."
그는 두 번의 개인전(2017년 조형갤러리와 진행중 아신갤러리)과 남북평화미술전, 대한민국미술축전, 뉴욕아트페스티벌, 근맥전 등 수많은 단체전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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