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명 영정 놓인 합동분향소, 참사 47일만에 설치됐다
[현장] 유가족협의회, 이태원광장에 시민분향소 마련... 보수단체, 확성기 틀고 '혐오 발언'
▲ 10.29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가 14일 오후 서울 용산구 녹사평역 인근 이태원 광장에 시민분향소를 설치했다. 원하는 유가족들은 이 분향소에 희생자의 영정사진을 올린 뒤 오열했다. ⓒ 공동취재사진
▲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가 설치한 시민분향소가 14일 오후 서울 이태원 광장에 마련된 가운데, 유가족들이 오열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체감 기온 영하 17.5도, 부쩍 추워진 날씨에도 14일 서울 용산구 녹사평역 사거리 이태원 광장은 오전 10시부터 북적였다. 이태원 압사 참사로부터 47일, 희생자들의 49재를 이틀 여 앞두고 영정이 놓인 시민분향소 설치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언제든 연락해 아들" 영정 위에 놓인 아버지의 편지
보수단체 : "더 앞으로 가라니까."
시민 : "적당히 꼬투리 잡아야지. 여긴 분향소라고."
10.29 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가 전날인 지난 13일 서울 용산구청으로부터 분향소 설치를 위한 협조 공문을 받았음에도, 신자유연대 등 일부 보수단체는 사전에 해 둔 한 달짜리 집회 신고를 통해 현장에서 설치를 돕는 시민들과 실랑이를 벌였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15조에 따르면, 분향소 설치와 같은 관혼상제 관련 집회는 집시법 적용에서 배제하도록 돼있다.
몽골텐트 4동에 나무 합판 5개를 이어 붙인 제단. 검은 천과 흰 천으로 두른 제단 위에 158개의 영정이 올라왔다. 검은 리본 액자 속 사진과 이름이 담긴 영정은 76인이었다. 유가족들이 2차 가해를 우려해 이름만 밝힌 17인과 참여에 의미를 둔 5인의 영정, 그 외 희생자들의 영정은 국화꽃 사진으로 담겼다. 한 영정 속에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편지가 사진 위에 적혀 있었다.
"아들아, 아빠는 네가 너무나 소중한 아들이었어. 미안해. 너무.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아빠 아들로 태어난 것이 아빠는 너무 행복했다. 고마웠다. 언제든 연락해 우리 아들... 보고싶다, 사랑하는 아빠가."
교복 차림으로 웃는 소년, 커피 한 잔을 들고 멋진 표정을 지어 보인 청년, 나비 넥타이와 정장 차림의 늠름한 얼굴... 영정마다 모인 얼굴들은 생전 다양한 모습들로 가족과 시민들 앞에 섰다.
"엄마가 한 번이라도 불러봤으면 좋겠다. 밥을 한 번이라도 먹여 봤으면 좋겠다. 한 번 만이라도 만져봤으면 좋겠어..."
직접 영정을 모시기 위해 차례로 분향소에 들어선 20여 명의 유족들은 함께 무너져 내렸다. 영정을 품에 안고 분향소에 들어서던 딸을 잃은 어머니는 주저앉아 한참을 오열했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는 토하듯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한 유가족은 혼절해 부축을 받고 밖으로 떠났다. 30여 분간의 조문 동안 분향소 공간은 유족들의 울음소리로 가득찼다.
▲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가 설치한 시민분향소가 14일 오후 서울 이태원 광장에 마련된 가운데, 배우 고 이지한씨 어머니 조미은씨가 아들의 영정을 든 채 오열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오십 가까이 살며 처음 이태원이란 곳에 와봤습니다. 숨도 안 쉬어지지만, 녹사평역 1번 출구를 찾았습니다. 우리 아이들 잊지 않고 기억해주셔서, 분향소 설치를 위해 나오신다기에 머리 숙이러 왔어요. 그런데 저 골목을 보고 이해가 안 갔습니다. 전 너무나 긴 길인 줄 알았어요. 어른 발걸음으로 몇 걸음도 안 되는 곳에서 어떻게 그 많은 아이들이 죽었는지 상상이 안갑니다. 오후 6시 34분 신고 때부터 시민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면 이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머리 아닌 가슴으로 잘못을 인정하시고 합당한 죄를 받으십시오. 우리 아들을 이렇게 보낼 수 없습니다. 도와주세요. 우리 아이들 살려내 이놈들아..."
어머니는 이 말을 끝으로 마이크를 놓치고 주저 앉아 쓰러져 오열했다. 유가족협의회 대표이자, 고 이지한씨의 아버지인 이종철씨는 "윤석열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너무하십니다"라면서 "이곳에 오셔서 우리 아이들 앞에 와서 내가 잘못했다, 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진심으로 사과해주십시오"라고 요구했다.
고 이주영씨의 아버지인 이정민씨는 시민 분향소 현장을 찾아준 시민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동시에 희생자들의 49재인 오는 16일 오후 6시 시민 추모제 소식을 알렸다. 이씨는 "이제야 저희 아이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추모다운 추모를 받을 수 있게 됐다"면서 "16일 이태원역 입구에서 추모제를 지내려 한다. 많은 시민들께서 오셔서 저희 아이들에게 위로를 부탁드린다"고 요청했다.
▲ 14일 오후 서울 용산구 녹사평역 부근 이태원 광장에 마련된 ‘10.29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에서 유가족들이 직접 희생자들의 영정사진을 놓으며 오열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2차 가해 대비해 '밤샘' 지킴이 자처한 시민들
일부 보수 단체들을 둘러싼 소란은 분향소 설치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윤석열 잘한다!" 등의 펼침막을 광장 주변에 걸어 두거나, 분향소 설치가 완료된 시점부터는 차량에 설치된 확성기 방송으로 유족과 시민들을 향해 "뭘 더 바라냐" "선동 하지 마라" 등의 극언을 쏟아냈다.
"집회 방해죄로 데려가라고."
한 보수 유튜버는 항의를 전하기 위해 찾아온 유족에게 "가짜 유족 아니냐"고 묻기도 했다. '이태원 시민'이라 주장한 사람은 "왜 울고 XX이냐"며 "설치 하지마라"고 외쳤다. 길을 지나던 한 시민은 이들 발언을 듣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되받았다. 분향소 영정 앞에 선 한 유족은 트럭 위에서 방송을 이어가는 유튜버를 바라보며 "저들을 용서하세요"라고 읊조렸다.
▲ 분향소에서 10여미터 떨어진 곳에 ‘이태원 참사 추모제 정치 선동꾼들 물러나라’ ‘윤석열 잘한다’가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다. ⓒ 권우성
▲ 유가족협의회 대표인 이종철씨(고 이지한 부친)가 합동분향소앞에서 한 방송사와 인터뷰를 하는 가운데 한 보수단체 회원들이 ‘이태원 참사 추모제 정치 선동꾼들 물러나라’가 적힌 현수막을 내걸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 권우성
▲ 한 보수단체 회원들이 분향소에서 10여미터 떨어진 곳에서 ‘이태원 참사 추모제 정치 선동꾼들 물러나라’가 적힌 현수막을 내걸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 권우성
산발적인 갈등 상황을 제외하면,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이어진 분향소 설치 동안에는 시민들의 연대와 추모 참여가 줄곧 이어졌다. 20대 청년들로 대부분 구성된 청년 추모 모임 소속 40여 명은 행사 시작 전부터 마무리까지 제단 설치부터 장내 정리를 도왔다. 제단 설치는 관련 경험이 많은 민주화 열사 및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연대 관계자들이 나와 현장을 이끌었다. 청년추모행동을 비롯한 일부 시민들은 혹시 모를 2차 가해를 대비해 돌아가며 24시간동안 현장을 지키기로 했다.
"그냥 길을 지나가다가요... 너무 안 됐잖아요..."
▲ 이태원참사 발생 47일째인 14일 오후 서울 용산구 녹사평역 부근 이태원 광장에 10.29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가 마련한 합동분향소가 설치된 가운데, 시민들이 헌화를 하고 있다. 이날 합동분향소에는 유가족들이 직접 희생자들의 영정사진을 가져와 모셔둔 후 오열하며 헌화했다. ⓒ 권우성
산재사고로 목숨을 잃은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인 김미숙씨는 행사 시작 전부터 현장에서 분향소 설치를 기다렸다. 김씨는 "전 여당도 야당도 모르고 정치도 모른다... 그냥 열심히 산 죄밖에 없다... 나중에 애를 만나도 뭐라 설명할 길이 없다. 제 아이를 위해 이렇게 나왔다"고 울부짖는 한 유족의 등을 쓸며 위로했다. "우리가 옆에서 지키겠다, 어머니 뜻대로 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김씨의 말에 외동딸을 잃은 어머니가 말했다.
"속이라도 팍팍 썩이고 가지. 내가 쫓아가 만나야 하나 싶기도 하고요. 나 하나쯤 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아니겠지만요. 나중에 애들 생각해서라도. 살아 남아야 할 이유는 이것 같아요. 애한테 한 마디라도 할 수 있도록, 그래도 떳떳한 엄마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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