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헬스장 여자 탈의실에서 이런 일 없나요?

옷장은 잠그지만 마음은 잠그지 않는 탈의실... 그 공간에서 깨달은 것

등록|2022.12.17 19:08 수정|2022.12.17 19:08
바쁘게 아이들을 키우다보니 어느새 40대. 무너진 몸과 마음을 부여잡고 살기 위해 운동에 나선 엄마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편집자말]
탈의실에서의 대화

헬스장에서 탈의실은 공적인 공간이자 사적인 공간이다. 공적으로는 헬스장에 속하며, 샤워실로 이동하기 위한 중간계다. 그곳에서는 필연적으로 알몸을 볼 수밖에 없다. 샤워하지 않더라도 운동복은 갈아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운동복을 갈아입지 않고 겉옷만 걸친 채 바로 나가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옷을 갈아입는다. 간혹 사적인 대화들을 나누게 될 때도 있다. 오랫동안 운동을 하다 보면 얼굴이 익숙해지는데, 탈의실에서 자주 마주치면 내적 친밀감이 쌓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적 친밀감이 높아졌다고 해서 바로 누군가와 친해지거나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향형 성격의 나는 절대로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다.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어 주면 반갑게 대답하지만, 처음 말을 트기가 몹시 어렵다. 물론 말을 먼저 걸어야겠다는 생각조차 없지만 말이다.
 

▲ 탈의실에서 옷장은 잠그지만, 마음은 잠그지 않는다. ⓒ tlparadis, 출처 Pixabay


그런 나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헬스장 오픈할 때부터 다녔다는 분이었다. 나보다 조금 연배가 있어 보이지만, 탄탄한 몸을 지니고 있었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다른 이의 근육을 힐끔힐끔 보게 되는데, 그분은 오래된 운동으로 날씬하고 탄탄한 몸매가 돋보였다.

그냥 마른 몸이 아니라 오랫동안 관리해 왔던 몸이라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 그 몸을 보면서 어쩐지 나도 그런 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보디 프로필에 나오는 울룩불룩 강조된 근육보다 은근하게 탄탄한 몸이 더 아름다워 보였다. 탈의실에서 그분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참 운동 열심히 하셔요."

나는 말 걸어주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열심히 해도 살이 잘 안 빠지네요"라고 답했다. 그분은 호탕하게 웃으시더니 "살은 운동하다 보면 빠지는 시기가 있고, 안 빠지는 시기가 있더라고요"라고 말했다. 그 이후로 탈의실의 대화는 재미있는 정보와 사적인 대화로 진화했다.

동네 주민센터에서 하는 사물놀이 수업이 괜찮다던가, 어디 마트가 세일하는데, 어떤 물건이 괜찮다던가, 어디가 맛집이라던가 하는 쏠쏠한 생활정보에서부터 헬스장의 크고 작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오전에 보이던 청년들이 안 보이는 이유는 취직했기 때문에 저녁이나 주말에 오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결혼한 딸이 와서 엄마의 PT 수업을 등록해주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 모든 대화는 옷을 갈아입는 동안 짧게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알몸이거나 속옷만을 입은 채로 괜찮고 쏠쏠한 대화를 이어가는 것인데, 이것이 몹시 쑥스러우면서도 재미있다.

탈의실에서의 배려 

여자 탈의실이라고 해서 마냥 깔끔할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물론 관리자분이 주기적으로 청소와 관리를 하지만, 자주 드나드는 곳인 만큼 자주 지저분해진다. 탈의실을 나가면서 뒷정리가 안 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가장 큰 것은 머리카락이다. 샤워 후 머리를 말리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머리카락이 떨어지는데, 이 머리카락을 누군가는 치우고, 누군가는 방치한다. 여자들의 머리카락은 대부분 길다. 짧은 머리도 있지만 대부분 긴 머리카락이 눈에 더 뜨이게 된다.

간혹 머리카락이 정말 많이 떨어지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탈의실을 이용하고 나면 발 디딜 틈이 없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회원분일수록 겉모습은 깔끔하고 우아하다. 지저분해진 탈의실의 모습과 화장품과 향수 냄새를 풍기며 나간 뒷모습이 전혀 매치되지 않는다.

하지만, 탈의실을 지저분하게 만들기만 하는 사람만 있지는 않다. 어차피 자신이 써야 할 공간이므로 머리카락을 열심히 치우는 사람 또한 있다. 탈의실에는 빗자루와 쓰레받기가 마련되어 있는데, 자신이 샤워 후 머리를 말리고 나서 타인이 흘리고 간 머리카락까지 치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배려의 차이 아닐까 싶다. 헬스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탈의실을 사용할 권리가 있지만, 청소까지 책임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배려는 권리와 책임의 사이에서 존재한다. 탈의실을 이용할 다음 사람을 배려한다면, 공용 공간인 만큼 내가 사용한 공간을 조금은 깨끗하게 사용하고 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 자신이 사용한 자리를 청소하는 것은 다음 사용자를 위한 배려다. ⓒ 출처 Unsplash


나도 처음부터 누군가를 배려해서 머리카락을 잘 치우는 사람은 아니었다. 앞서 이야기를 나누던 분이 탈의실에 놓인 청소도구로 자기 머리카락을 열심히 치우고 가는 것을 보고 배운 것이다. 혹은 조금 늦게 나가게 되면 "내가 머리 말리고, 치울 테니 그냥 놔두고 가요"라고 배려해주기도 한다.

탈의실에서 안부를 묻다

얼마 전 식구들이 돌아가면서 코로나 확진이 되어 약 이 주간 운동을 가지 못했다. 탈의실에 들어서자 항상 같은 시간대에서 만나던 그분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한동안 안 보여서 궁금했어요."
"애들부터 남편, 저까지 차례대로 코로나에 걸려서 한동안 격리였어요."
"아, 난 또 이사했나, 어디 아픈가, 다른 시간대로 옮겼나, 엄청 궁금했지."


이런 대화를 또 우리는 속옷만을 입은 채 나누었다. 문득 탈의실 문을 나서면서 깨달았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도, 나이도, 전화번호도 모른다. 단지 동네 헬스장에서 운동하며 얼굴과 서로의 몸만 알고 있을 뿐이다. 내일부터 당장 운동을 나오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을 관계다. 그런데도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한다.

공적인 공간에서 사적인 정을 나누면서 이루어지는 오묘한 관계. 탈의실이라는 공간은 이런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곳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혜선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longmami)에도 실립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