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수영, 하기 싫은 마음이 찾아왔을 때
감정은 날씨와 같은 것... 원하는 게 있다면 '되는 환경'부터 만들기
바쁘게 아이들을 키우다보니 어느새 40대. 무너진 몸과 마음을 부여잡고 살기 위해 운동에 나선 엄마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편집자말]
글의 주제를 몇 번이나 바꿨는지 모른다. 급기야 마감을 넘겼다. '이번엔 못 쓴다고 할까?' 나오라는 글은 안 나오고 도망갈 궁리만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한 번 주제를 바꿔 글쓰기를 시도한다. 기어이 써내고야 말리라는 다짐을 하며!
하기 싫은 마음 넘으니 생긴 일
하기 싫은 마음은 글쓰기에만 찾아오는 특별함이 아니다.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면 마주하는 일상적인 감정에 가깝다. 나를 단련하는 과정에서 찾아오는 필수적인 과정이 아닐까. 수영에도 예외는 없었다. 처음 수영을 배우며 느끼는 재미가 사라지고 나에게도 드디어 권태기가 찾아왔다. "수영 가기 싫다"가 육성으로 나올 만큼 하기 싫은 날들이 이어졌다.
▲ 정말 수영하기 싫은 날에도, 수영장 냄새가 나면 물에 들어가고 싶어진다. ⓒ 이영실
세상 가장 먼 거리는 내 방에서 현관까지라고 했던가. 수영 시간이 다가올수록 머릿속은 바빠졌다. '오늘 내 컨디션은 괜찮은가? 몸이 으슬으슬한 것 같은데, 이런 날은 쉬어야 할 것 같다.' 한쪽에선 멀쩡한 몸을 두고 아픈 것 같다 했고, 또 한쪽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을 움직여야 한다고 했다.
나의 선택은 언제나 수영장이었다. 강한 의지 탓은 아니다. 아이들을 수영장에 보내야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아이들이 강습을 받는 동안 옆 레인에서 자유 수영을 했다. 수영하는 '나' 이전에 수영장에 데려다 주는 '엄마 역할'에는 충실해야 했기에 선택지가 없었다.
수영장에 도착하면 본전(?) 생각이 났다. '여기까지 왔으니 샤워는 하고 갈까?' 이왕 온 김에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나를 샤워장으로 데려갔다. 뜨거운 물 아래서 한참 몸을 데우고 나면 마음도 데워졌다. '이렇게 된거 수영복이라도 입어야겠다'를 거쳐, '한 바퀴만 돌고 나오자'를 지나면, 결국 '열심히 운동해서 뿌듯하다'까지! 움직이는 마음을 따라 몸도 움직였다.
수영가기 싫은 날은 몇 주에 걸쳐 계속 됐다. 그때마다 나는 아이들 라이딩을 목적으로 움직였고, 야금야금 마음을 움직이며 원하는 목표에 닿았다. 몇 주의 권태기가 지나면 몸은 아무렇지도 않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런 기간 후엔 신기하게도 내 수영 실력이 늘거나 새로운 영법 등을 익히며 수영에 재미가 붙었다. 의도는 아니었지만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수영을 이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 겨울 수영 필수템. 목도리 모자 장갑 덕분에 겨울 수영을 지킬 수 있다. ⓒ 이영실
고비는 반복적으로 찾아왔다. 이번엔 겨울이었다. 포근한 이불을 제치고 집을 나서야 하는 겨울은 어느 때 보다 하기 싫음이 충만한 계절이었다. 특히 추운 날씨를 싫어하는 나에게 겨울 수영은 빅 챌린지였다.
'따뜻한 이불을 걷어낸다. 한기가 도는 가운데 옷을 갈아 입는다. 찬바람이 달려드는 문 밖으로 나선다. 꽁꽁 언 핸들에 손을 올린다.'
생각만으로도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응…? 그렇다! 이 생각이 나를 움츠러들게 하는 거였어!!'
수영장에 가기 싫은 나를 관찰하다 보니 나를 망설이게 하는 건 겨울 수영이 아닌 이불과 수영장 사이의 추위였음을 발견하게 됐다. 진짜 추위 속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그 장면을 상상하며, 이불을 나가기 싫다고 되뇌는 내가 보였다.
즉시 목도리, 장갑, 모자를 준비했다. 문을 열자 마자 파고 드는 바람은 목도리와 모자가, 핸들의 한기는 장갑이 막아 줄 터였다. 이 생각만으로도 겨울 수영의 괴로움이 사라졌다. 든든했다.
차를 타면 수영장까지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그대로 직진해서 수영장 물 속에 들어가면 되니까. 행동 트랙이라는 환경에 몸을 올려 놓으면 다음부터는 자동이다. 나의 행동에 걸림돌이 되는 그 무언가를 찾는 일이 어려울 뿐. 걸림돌을 제거한 후의 겨울 수영은 어느 때 보다 신나는 운동이 되었다(겨울 수영장은 한적해서 좋다!).
버티면서 알게 된 것
감정은 날씨와 같다. 맑았다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잠잠해진다. 문제는 몸이 감정을 따른다는 거다. 작심삼일의 대명사였던 나는 쉽게 감정에 휩쓸리는 사람이었다. 쉽게 시작했고, 쉽게 끝을 냈다. 나를 똑같이 따라하는 두 아이를 얻은 후 정신이 들었다. 내 아이들이 작심삼일의 대명사가 되는 건 엄마인 내게 큰 두려움이었다.
두려움은 나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었다. 무언가 해내고 싶은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내가 원하는 걸 선언 하고 공개 기록을 이어가거나, 직접 프로젝트를 만들어 사람을 모으고 앞장섰다. 의지가 약하고 감정에 쉽게 주저 앉는 나를 믿지 않았기에 적극적으로 되는 환경으로 들어갔다.
내가 사용한 방법은 자성예언 또는 피그말리온 효과로 불린다. '타인의 기대나 관심으로 인하여 능률이 오르거나 결과가 좋아지는 현상'인데, 실제 내 삶에 이 개념을 적용하고 효과를 경험한 세월이 10년이다.
▲ 2022년 1월 1일 아이들과 새해 계획을 세웠다. 많은 일이 현실이 되었다. ⓒ 이영실
그간 나는 새벽기상, 매일책읽기, 영어공부, 블로그, 글쓰기, 새벽수영 등 나를 위한 습관을 하나씩 세우고 지켜왔다. 뭐 하나 순탄했던 일은 없다. 초기의 열정은 금세 사그라 들었고 그만 둬야 할 이유는 너무 많았다. 다행히도 나는 되는 환경 안에 있었고, 때때로 버티면서 알게 됐다.
'하기 싫음은 밀물처럼 밀려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감정이다. 감정이 드나드는 동안 나는 내 자리를 지키면 될 뿐이다. 환경은 거센 감정의 바람 속에서도 나를 단단히 붙들어 주는 닻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새해에도 하기 싫은 마음은 계속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처럼 내 자리를 지키고 있겠지. 어느 때 보다 하고 싶은 일이 많은 신년이지만, 어느 때보다 종이에 옮기는 일을 망설이고 있다. 말하면 다 이룰 것을 알기에, 속도조절 중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영실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successmate) 및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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