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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병'도 막지 못한 사랑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루게릭병 환우 이야기 다룬 <내 사랑 내 곁에>

등록|2022.12.28 09:42 수정|2022.12.28 09:42
강하늘, 고두심 배우 등과 함께 지난 27일 종영한 드라마 <커튼콜>에 출연한 하지원은 지금처럼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약 3번 정도 크게 도약했던 해가 있었다. 먼저 서울관객 75만의 영화 <폰>과 전국 400만 관객의 영화 <색즉시공>, 그리고 드라마 <햇빛사냥>에 출연하며 신예 하지원의 이름과 얼굴을 대중들에게 확실히 각인시켰던 2002년이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그리고 30%에 육박하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안방극장을 점령했던 51부작 드라마 <기황후>에 출연했던 2013년 역시 하지원에게는 잊을 수 없는 해다. 하지원은 당시 영화 < 7광구 >와 <코리아>의 흥행이 기대에 미치지 못 하면서 슬럼프에 빠질 위기에 놓였지만 <기황후>를 통해 최고의 여성배우임을 재확인했다. 하지원은 <기황후>로 2013년 MBC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2002년, 2013년과 함께 하지원의 배우인생에서 가장 뜻 깊었던 해는 바로 2009년이었다. 하지원의 배우 커리어에 매우 큰 의미가 있는 영화 두 편이 개봉했기 때문이다. 하나는 하지원의 배우 인생 최고 흥행작이었던 1100만 관객을 동원한 <해운대>였다. 그리고 <해운대>보다 두 달 늦게 개봉한 하지원의 또 다른 대표작은 그녀에게 데뷔 첫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긴 박진표 감독의 처절한 멜로영화 <내 사랑 내 결에>였다.
 

▲ 두 배우의 열연이 돋보인 <내 사랑 내 곁에>는 전국 210만 관객을 동원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 CJ 엔터테인먼트


때론 남자주인공의 불치병이 더 슬프다

물론 현실에서는 경험하지 않는 게 가장 좋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불치병'이 멜로물의 좋은 소재가 되기도 한다. 물론 불치병은 영화와 드라마 모두 남자주인공보다는 여자주인공이 걸리는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게 사실이다. 여자 주인공의 투병이 시청자와 관객들의 감성을 자극하기 더욱 수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로는 남자주인공이 불치병에 걸리는 작품들도 시청자들이나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서울에서만 72만 관객을 동원하며 1998년 청룡영화상 최다관객상을 수상한 이정국 감독의 <편지>는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으로부터 오는 편지를 통해 남편에 대한 사랑을 깨닫는 내용의 멜로 영화다. 영화 <유리>와 <쁘아종> 등에 출연했지만 큰 인상을 주지 못했던 박신양은 <편지>를 통해 '멜로왕자'로 급부상했고 고 최진실 역시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에 이어 <편지>로 연타석 홈런을 날렸다.

<편지>가 관객들로 하여금 눈물, 콧물 다 짜내게 하는 전형적인 최루 멜로 영화였다면 약 두 달 후에 개봉한 이 영화는 남자주인공의 질병과 죽음을 담담한 시선으로 보여주며 또 다른 감동을 선사했다. 바로 허진호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었던 한석규와 심은하 주연의 < 8월의 크리스마스 >였다. < 8월의 크리스마스 >는 남녀주인공이 부둥켜 안고 오열하는 장면 없이도 관객들을 잔잔하게 울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멜로 영화였다.

21세기 들어서는 남자 주인공의 불치병이 드라마로 전염(?)됐다. 2002년 양동근과 이나영, 공효진 등이 출연한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에서는 주인공 고복수(양동근 분)가 드라마 시작 2회 만에 자신이 뇌종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고복수는 자신의 상황을 비관하기 보다는 누구보다 열심히 인생을 살아간다. <네 멋대로 해라>는 방영 당시 20~30대 시청자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지지를 얻으며 드라마 최초로 '팬덤'이 형성된 작품이다.

<네 멋대로 해라>의 고복수가 드라마 시작 2회 만에 머리 속에서 종양이 발견됐다면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차무혁(소지섭 분)은 첫 회에서 옛 애인의 결혼식장에 갔다가 머리에 총알이 박힌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 대한 분노가 가득 찬 차무혁은 한국에서 은채(임수정 분)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끝내 숨을 거둔다. 그리고 차무혁의 묘비에는 은채에게 마지막으로 남겼던 '미안하다, 사랑한다(I'm Sorry. I love you)'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촬영기간 20kg 이상 감량한 김명민의 연기투혼
 

▲ 촬영 기간 동안 백종우라는 캐릭터에 완벽하게 몰입한 김명민은 청룡영화상과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 CJ 엔터테인먼트


<내 사랑 내 곁에>를 만들기 전, 박진표 감독의 전작은 1991년에 있었던 고 이영호군 유괴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그 놈 목소리>였다. 70대 노인의 사랑이야기(<죽어도 좋아>)를 시작으로 에이즈에 걸린 여성과 농촌총각의 사랑이야기(<너는 내 운명>), 실제 있었던 유괴사건을 모티브로 한 범죄 스릴러(<그 놈 목소리>)를 연출했던 감독이 차기작으로 루게릭병 환자와 장례지도사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멜로 영화 <내 사랑 내 곁에>를 만든 것이다.

루게릭병은 MVP 2회와 올스타 7회에 빛나는 메이저리그의 강타자 루 게릭이 앓았던 질병으로 지능, 의식, 감각은 정상인 채 온 몸의 근육이 점차 마비되는 희귀병이다. 멀쩡한 정신으로 하루하루 자신의 몸이 굳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병'으로 불리기도 한다. 루게릭병 진단을 받은 후 50년 넘게 생존한 영국의 천재 물리학자 고 스티븐 호킹 박사가 루게릭병을 극복한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불멸의 이순신>과 <하얀 거탑> <베토벤 바이러스>에 잇따라 출연하며 배우로서 최전성기를 달리던 김명민은 <내 사랑 내 곁에>를 통해 쉽지 않은 도전을 선택했다. 하지만 김명민은 대한민국 최고의 '메소드 배우'답게 촬영기간 동안 20kg 이상 감량하는 투혼을 발휘하며 촬영을 마쳤다. 그렇게 <내 사랑 내 곁에>에서 최고의 연기를 선보인 김명민은 2010년 청룡영화상과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휩쓸며 커리어에 정점을 찍었다.

오랜 병원생활을 해본 사람은 환자만큼 간병을 하는 사람 역시 매우 힘들고 지루한 시간을 견뎌야 하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종우(김명민 분)의 온갖 짜증과 히스테리를 받아준 장례지도사 지수를 연기한 하지원의 연기 역시 김명민 못지 않게 눈부셨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데뷔 후 주요 영화제에서 한 번도 여우주연상을 받은 적이 없었던 하지원은 <내 사랑 내 곁에>를 통해 김명민과 청룡영화상 남녀주연상을 동반 수상했다.

영화의 제목인 <내 사랑 내 곁에>는 1991년 사후에 발매된 고 김현식 6집 타이틀곡에서 제목을 따왔다. 실제로 '내 사랑 내 곁에'는 두 주연배우 하지원과 김명민이 부른 버전으로 종우의 장례 과정 장면과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흘러 나온다. 그리고 <내 사랑 내 곁에> 못지 않게 영화 속에서 두 사람의 러브송으로 중요하게 쓰이는 노래는 김돈규 2집에 수록된 김돈규와 에스더의 듀엣곡 '다시 태어나도'였다.

브라운아이드걸스 가인이 여기에 왜 나와?
 

▲ 강렬한 스모키 화장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브라운아이드걸스의 가인은 <내 사랑 내 곁에>에서 영화 내내 민낯연기를 선보였다. ⓒ CJ 엔터테인먼트


집안 사정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던 지수와 종우는 비슷한 질병을 앓고 있는 환우들과 함께 6인 병실에 입원해 있다. 그리고 종우의 옆 침대에는 기껏해야 20대 초반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젊은 여성이 누워있다. 이 여성의 정체(?)는 경기 도중 착지실패로 척추를 다쳐 마비가 온 피겨스케이팅 선수 서진희였다. 그리고 서진희를 연기한 배우는 <내 사랑 내 곁에> 개봉 당시 한창 전성기를 달리던 걸그룹 브라운아이드걸스의 막내 가인이었다.

<내 사랑 내 곁에>는 가인의 연기 데뷔작으로 환자 역할이다 보니 크게 움직이는 장면은 없지만 감정적으로 결코 쉬운 연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서진희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면 백지영의 <총 맞은 것처럼>을 절규하듯 부르는 캐릭터였기 때문에 '연기신인' 가인이 소화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가인은 2014년 하지원의 '흑역사' <조선미녀삼총사>에서 주연을 맡아 연기의 쓴맛을 경험한 후 다시 노래에 전념하고 있다.

코미디언으로 더욱 유명하지만 2000년대 영화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던 임하룡은 <내 사랑 내 곁에>에서 식물인간이 된 아내를 지극정성으로 간병하는 보호자 박근숙 역을 맡았다. 박근숙은 아내가 순간적으로 의식을 되찾은 순간 화장실에 가는 바람에 그토록 기다렸던 아내가 깨어나는 순간을 보지 못했다. 박근숙의 아내 춘자 역은 영화 <대한민국 헌법 제1조>와 드라마 <동이> 등에 출연했던 아나운서 출신 연기자 임성민이 맡았다.

여러 작품에서 선역과 악역을 오가는 팔색조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이자 사회 문제에도 목소리를 내는 소셜테이너 김여진은 <내 사랑 내 곁에>에서 종우가 입원한 병원의 의사 손영찬 박사로 출연했다. 손영찬 박사는 종우가 자살을 시도하거나 춘자가 의식이 돌아오는 등 보호자 입장에선 엄청나게 큰 일에도 언제나 냉정을 잃지 않는다. 실제로 요양병원 의사들은 보호자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어지간한 일에는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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