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집 앞에 동그란 원 두개가... 무서운 진실
[내 남편 목수 만들기] 현실 벗어나 흙집 있는 가상 세계로 떠난 남편
남편이 몇 년 전 8월에 흙집과 관련된 책 하나를 주문해서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뭔가 조짐이 불안했다. 하지만 흙 부대를 쌓아서 리모델링한 집이 완벽한 실패로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터라 '설마' 했다.
그런데 남편은 농사를 지으며 8월 한 달 내내 그 책을 반복해서 3번을 읽었다. 공포스러운 사건이 곧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남편의 행동을 빈틈없이 감시하는 한편 매일 통장의 잔고를 체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남편이 비록 주변 사람들에게 '경솔의 아이콘'으로 유명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책 한 권 읽고 흙집을 짓겠다고 나서지는 않겠지, 하고 생각했다. 책 하나 읽고서 흙집을 지을 수 있다면, 세상은 온통 DIY 흙집으로 가득 차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밤송이들이 살짝 벌어지기 시작할 때쯤 남편은 갑자기 한옥학교에서 사용한 수공구와 전동공구들을 창고에서 꺼내 점검하기 시작했다. 기계톱과 전동대패를 어루만지며 실실 웃는 남편을 보니, 뭔가 엄청나게 큰 암흑의 회오리가 들이닥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와! 기계톱과 전동대패 멋지다. 이걸로 한옥학교에서 일한 거야?"
남편은 1/3이 어른이고 1/3이 질풍노도의 사춘기 청소년이며 나머지 1/3은 알 수 없는 뭔가로 구성돼 있다. 그런 남편이라 이럴 때는 적당히 비위를 맞춰 주며 구슬리거나 외계인과의 첫 만남처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남편은 고개를 휙 돌려 나를 쳐다봤는데 어이없게도 거만한 표정이었다.
내가 어이없다고 표현한 것은 남편이 한옥학교 6개월을 못 버티고, 졸업을 한 달 앞두고 자퇴했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표정이면 몰라도, 거만한 얼굴을 내게 들이밀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멋지지? 이걸로 나무도 자르고 대들보도 깎아 만들고, 안 한 게 없다고."
"쿨하네. 근데 곧 밤을 주워야 하는데, 이것들은 왜?"
남편은 말없이 내 눈을 잠깐 쳐다봤고, 나는 그 눈빛에서 많은 것들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뭘 하려는지 대강은 감이 왔는데, 남편도 갈등 중인 것은 분명했다. 이 지점에서 너무 닦달하면 남편은 궤도를 벗어나 저 멀리 안드로메다 은하계로 날아가 버릴 것이 뻔하다.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일단 밤부터 줍는 게 어떨까? 지금 뭘 시작하면, 밤 줍기가 힘들어서 회피하는 꼴이 되는 거니까, 좋은 모양새는 아니지. 대의명분이 부족해, 안 그래?"
전해, 남편은 밤 줍는 것을 많이 힘들어하며, 이제 이런 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투덜거리곤 했다. 이 부분을 공략하면 남편의 계획을 잠시 미룰 수 있을 것 같았다. 밤 줍기가 싫어서 흙집을 짓는다는 건 누가 들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밤농사는 시골에서 그나마 손쉬운 돈벌이가 아닌가! 남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말이야, 올해 밤을 줍는 것보다는 내 계획을 실행하는 게 살림에 더 보탬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래도 뭐 밤을 다 줍고 나서 시작해도 그다지 늦은 건 아니니까···. 아무튼 당신은 너무 근시안적인 사고방식이랄까, 뭐 그런 게 있어. 좀 고쳐야 한다고."
일단은 남편이 한발 물러나는 것으로 대화는 대충 마무리됐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요랬다조랬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남편이다 보니, 한 달 보름 정도 밤을 줍고 나면 마음이 바뀔지도 몰랐다. 그리고 밤농사가 끝나면 체력이 달려서 집짓기는 엄두도 못 낼 거라 생각했다.
돌 옮기고 쌓는 사이 밤은 비오듯 쏟아지고
밤 줍기가 시작되고 일주일 정도가 지난 9월 중순, 엄마가 사는 집의 마당 빈터에 동그란 원 2개가 페루의 나스카 유적 지상화처럼 그려져 있었다. 동심원을 만든 원 2개 위에는 하얀 석회 가루도 뿌려져 있었다. 나스카 유적에 대해 아직도 정확한 설명이 불가능하듯이, 이 2개의 원에 대해서도 미스터리 그 자체로 남겨 두고 싶었다.
"어때? 멋지지 않아?"
안쪽 원의 지름이 5.5m, 바깥쪽 원의 지름이 5.9m인 동심원이 뭐가 멋지다는 것인지 남편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뭐야?"
"이 위에다 동그란 흙집을 세울 거니까, 땅으로 옮겨진 일종의 도면이라고 할 수 있지. 어차피 요즘은 밤이 많이 안 떨어지니까, 오전에는 밤 줍고 오후에는 돌을 좀 주우러 가자고. 산에서 밤도 줍고 돌도 줍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부아를 삭이기 위해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돌은 왜? 밤은 주워서 농협에 내면 돈이라도 주지, 돌은 어디다 팔려고?"
"파는 게 아니라 돌로 기초를 만들어서 그 위에다 흙집을 세워야 하거든. 멋지겠지?"
남편은 이미 현실을 벗어나 멋지게 완성된 흙집이 존재하는 가상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 세계에는 밤나무도 없고 가족도 없는 듯했다. 내가 예상하는 바로는 남편의 가상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 흙집이 옮겨지면, 분명 미완성인 채로 폐허로 변할 것이다. 하지만 더는 남편을 말릴 수 없는 상태였다. 아무리 말려도 어차피 시작할 것이고, 더구나 남편은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오전에는 밤을 줍고 오후에는 산에서 굴러다니는 돌들을 집으로 가져온 지 4일 정도가 되자, 남편은 크고 작은 돌들을 두 개의 원 사이에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약속한 대로 나는 산에서 돌을 옮기는 작업만 도왔을 뿐, 냉정한 관찰자 겸 냉혹한 비평가로 변해 남편의 행동을 하나하나 지켜보며 악담과 참견을 늘어놓았다.
"어이구, 저 저주받은 손 좀 보소. 그 돌은 거기에 가면 안 되지. 거기는 더 큰 돌이 놓여야 균형이 맞지. 저 손을 갖고 뭘 하겠다고, 쯧쯧쯧!"
내가 뱉는 비아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편은 이틀에 걸쳐 돌을 쌓은 뒤, 시멘트 모르타르를 발라서 돌들을 고정했다. 내가 보기에도 제법 그럴듯한 돌 기초 작업이 끝난 듯했다.
"돌 기초 작업도 마쳤으니, 기왕 시작한 김에 바로 벽체 올리면 안 될까?"
남편은 애원하듯 내게 물었다. 돌을 옮기고 쌓는 사이 밤은 비가 오듯 후두두 쏟아지며 산을 뒤덮고 있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남편은 농사를 지으며 8월 한 달 내내 그 책을 반복해서 3번을 읽었다. 공포스러운 사건이 곧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남편의 행동을 빈틈없이 감시하는 한편 매일 통장의 잔고를 체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밤송이들이 살짝 벌어지기 시작할 때쯤 남편은 갑자기 한옥학교에서 사용한 수공구와 전동공구들을 창고에서 꺼내 점검하기 시작했다. 기계톱과 전동대패를 어루만지며 실실 웃는 남편을 보니, 뭔가 엄청나게 큰 암흑의 회오리가 들이닥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와! 기계톱과 전동대패 멋지다. 이걸로 한옥학교에서 일한 거야?"
▲ 남편이 대팻날을 갈기 위해 전동대패를 분해 중이다. ⓒ 노일영
남편은 1/3이 어른이고 1/3이 질풍노도의 사춘기 청소년이며 나머지 1/3은 알 수 없는 뭔가로 구성돼 있다. 그런 남편이라 이럴 때는 적당히 비위를 맞춰 주며 구슬리거나 외계인과의 첫 만남처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남편은 고개를 휙 돌려 나를 쳐다봤는데 어이없게도 거만한 표정이었다.
내가 어이없다고 표현한 것은 남편이 한옥학교 6개월을 못 버티고, 졸업을 한 달 앞두고 자퇴했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표정이면 몰라도, 거만한 얼굴을 내게 들이밀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멋지지? 이걸로 나무도 자르고 대들보도 깎아 만들고, 안 한 게 없다고."
"쿨하네. 근데 곧 밤을 주워야 하는데, 이것들은 왜?"
남편은 말없이 내 눈을 잠깐 쳐다봤고, 나는 그 눈빛에서 많은 것들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뭘 하려는지 대강은 감이 왔는데, 남편도 갈등 중인 것은 분명했다. 이 지점에서 너무 닦달하면 남편은 궤도를 벗어나 저 멀리 안드로메다 은하계로 날아가 버릴 것이 뻔하다.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일단 밤부터 줍는 게 어떨까? 지금 뭘 시작하면, 밤 줍기가 힘들어서 회피하는 꼴이 되는 거니까, 좋은 모양새는 아니지. 대의명분이 부족해, 안 그래?"
전해, 남편은 밤 줍는 것을 많이 힘들어하며, 이제 이런 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투덜거리곤 했다. 이 부분을 공략하면 남편의 계획을 잠시 미룰 수 있을 것 같았다. 밤 줍기가 싫어서 흙집을 짓는다는 건 누가 들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밤농사는 시골에서 그나마 손쉬운 돈벌이가 아닌가! 남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말이야, 올해 밤을 줍는 것보다는 내 계획을 실행하는 게 살림에 더 보탬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래도 뭐 밤을 다 줍고 나서 시작해도 그다지 늦은 건 아니니까···. 아무튼 당신은 너무 근시안적인 사고방식이랄까, 뭐 그런 게 있어. 좀 고쳐야 한다고."
일단은 남편이 한발 물러나는 것으로 대화는 대충 마무리됐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요랬다조랬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남편이다 보니, 한 달 보름 정도 밤을 줍고 나면 마음이 바뀔지도 몰랐다. 그리고 밤농사가 끝나면 체력이 달려서 집짓기는 엄두도 못 낼 거라 생각했다.
돌 옮기고 쌓는 사이 밤은 비오듯 쏟아지고
밤 줍기가 시작되고 일주일 정도가 지난 9월 중순, 엄마가 사는 집의 마당 빈터에 동그란 원 2개가 페루의 나스카 유적 지상화처럼 그려져 있었다. 동심원을 만든 원 2개 위에는 하얀 석회 가루도 뿌려져 있었다. 나스카 유적에 대해 아직도 정확한 설명이 불가능하듯이, 이 2개의 원에 대해서도 미스터리 그 자체로 남겨 두고 싶었다.
▲ 석회 가루를 뿌린 원 2개. 이 원 위에다 흙집을 만들 예정이다. ⓒ 노일영
"어때? 멋지지 않아?"
안쪽 원의 지름이 5.5m, 바깥쪽 원의 지름이 5.9m인 동심원이 뭐가 멋지다는 것인지 남편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뭐야?"
"이 위에다 동그란 흙집을 세울 거니까, 땅으로 옮겨진 일종의 도면이라고 할 수 있지. 어차피 요즘은 밤이 많이 안 떨어지니까, 오전에는 밤 줍고 오후에는 돌을 좀 주우러 가자고. 산에서 밤도 줍고 돌도 줍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부아를 삭이기 위해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돌은 왜? 밤은 주워서 농협에 내면 돈이라도 주지, 돌은 어디다 팔려고?"
"파는 게 아니라 돌로 기초를 만들어서 그 위에다 흙집을 세워야 하거든. 멋지겠지?"
남편은 이미 현실을 벗어나 멋지게 완성된 흙집이 존재하는 가상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 세계에는 밤나무도 없고 가족도 없는 듯했다. 내가 예상하는 바로는 남편의 가상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 흙집이 옮겨지면, 분명 미완성인 채로 폐허로 변할 것이다. 하지만 더는 남편을 말릴 수 없는 상태였다. 아무리 말려도 어차피 시작할 것이고, 더구나 남편은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오전에는 밤을 줍고 오후에는 산에서 굴러다니는 돌들을 집으로 가져온 지 4일 정도가 되자, 남편은 크고 작은 돌들을 두 개의 원 사이에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약속한 대로 나는 산에서 돌을 옮기는 작업만 도왔을 뿐, 냉정한 관찰자 겸 냉혹한 비평가로 변해 남편의 행동을 하나하나 지켜보며 악담과 참견을 늘어놓았다.
"어이구, 저 저주받은 손 좀 보소. 그 돌은 거기에 가면 안 되지. 거기는 더 큰 돌이 놓여야 균형이 맞지. 저 손을 갖고 뭘 하겠다고, 쯧쯧쯧!"
▲ 기초로 놓은 돌에다 시멘트 모르타르 처리를 끝낸 상태 ⓒ 노일영
내가 뱉는 비아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편은 이틀에 걸쳐 돌을 쌓은 뒤, 시멘트 모르타르를 발라서 돌들을 고정했다. 내가 보기에도 제법 그럴듯한 돌 기초 작업이 끝난 듯했다.
"돌 기초 작업도 마쳤으니, 기왕 시작한 김에 바로 벽체 올리면 안 될까?"
남편은 애원하듯 내게 물었다. 돌을 옮기고 쌓는 사이 밤은 비가 오듯 후두두 쏟아지며 산을 뒤덮고 있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함양타임즈에 함께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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