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만에 돌아온 남편, 다른 사람이라고?
[김성호의 씨네만세 424] <마틴 기어의 귀향>
말도 없이 떠난 지 8년 만에 남편이 돌아왔다. 불쑥 나타나 인사를 건네는 그를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알아보기 시작한다. 어느 날 갑자기 떠나버린 이가 돌아왔단 소식에 조용하던 마을이 떠들썩 해진다.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그의 가족에게 향한다. 이미 아버지와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집엔 삼촌과 장모, 그리고 아내와 아들이 있다. 그가 제가 돌아왔음을 알리자 아내는 그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린다. 돌아온 남편과 산 게 어언 삼 년, 첫 째 아이는 죽고 그 뒤로 딸이 하나 더 생긴다. 부러울 것 없는 시간이 그렇게 흘러간다.
평화롭던 어느 날인가, 마을에 든 떠돌이들이 그녀의 남편을 알아본다. 그가 남편인 마르탱 게르가 아닌, 아르노 뒤 틸이라는 알 수 없는 소리를 한다. 심지어는 마르탱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다고 했다. 남편은 제가 마르탱이라며 말도 안 된다고 펄쩍 뛰지만 가만히 살펴보니 의심스런 점이 적지 않다. 얼마 뒤 남편은 그가 떠나 있는 동안 농장을 책임진 삼촌 피에르 게르에게 제가 없는 동안 불린 재산을 돌려 달라 말한다. 그가 없는 동안 처자식까지 책임진 삼촌은 어떻게 재산을 달라 하느냐고 벌컥 화부터 낸다. 둘은 그날로 철천지 원수가 된다.
16세기 법정다툼, 믿기 어려운 실화
갈등은 급기야 소송전으로 비화된다. 삼촌은 조카가 실은 조카가 아니라 그를 흉내 내는 다른 이라고 한다. 조카는 제가 마르탱이 맞다고 주장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마르탱이라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으로 나뉜다. 살을 맞대고 수년을 산 아내가 제 남편을 몰라봤던 것일까, 그의 말대로 삼촌이 그를 모함하는 것일까.
이야기는 놀랍게도 실화다. 16세기 중반 프랑스의 시골마을에서 벌어진 사건을, 직접 재판한 판사 장 드 코라스가 기록으로 남겼다. 이 흥미로운 이야기가 영화 <마틴 기어의 귀향>으로 만들어졌다. 유럽 중세사회의 풍속을 훌륭하게 고증한 사극이자, 20세기 후반 만들어진 명작 법정영화이며, 제라르 드빠르디유의 명연으로 기억되는 훌륭한 영화다.
이야기는 1542년 4월 프랑스 툴루즈의 작은 마을 아르티갓에서 시작된다. 열두 살 신부 베르뜨랑(나탈리 바이 분)과 한 살 많은 신랑 마르탱 게르(버나드-피에르 도날듀 분)는 혼례를 올린다. 그러나 이들은 첫날밤을 지내지 못한다. 아직 너무 어려서일까, 신부가 마음에 차지 않아서일까, 마르탱이 남자구실을 하지 못한 것이다.
아이를 갖지 못한 신혼부부를 마을 사람들은 괴팍하게 골려댄다. 신부를 내놓으라 떠들고 마르탱을 조롱하기 일쑤다. 보다 못한 마을의 사제가 나서 부부를 발가벗겨 기둥에 묶고는 악귀를 쫓는 시범까지 보인다. 이 일이 충격적이었을까. 마르탱과 베르뜨랑 사이에서 아들 하나가 태어나고 둘은 겨우 놀림을 피하게 된다.
어느 날 사라진 남편, 8년이 지나 돌아왔다
여기서 끝나면 영화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날 마르탱은 아버지와 갈등을 겪다 집을 나가버리고 만다. 농장일을 열심히 하라던 아버지가 곡식 두 자루가 사라진 책임을 마르탱에게 물었던 날, 그가 조용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나서 덩치도 훌쩍 커지고 유쾌하게 변한 사나이가 마을에 나타난다. 그는 마을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 사이에 있었던 사연을 제법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제가 옛날 마을을 떠난 마르탱이라고 주장하고 사람들은 그걸 믿어버린다.
영화는 법정다툼으로 곧장 옮겨간다. 마르탱과 삼촌 피에르가 물러서지 않는 가운데 판사 코라스가 무엇이 진실인지를 가려내려 고심한다. 마르탱이 돌아온 뒤 아내와의 관계는 더없이 행복했다. 그는 농장일도 열심히 했고 동생이며 장모, 마을 사람들과의 사이도 아주 좋았다. 그가 있어 그의 가족은 더 완전해졌다.
늘 불만이 가득했던 떠나기 전의 마르탱보다 늘 유쾌한 돌아온 마르탱이 더욱 든든한 가장이자 멋진 남편처럼 보였다.
남편이 내 남편이 아니라니
영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마르탱이 진짜 마르탱이 아닐 것이란 심증을 더하게 한다. 그가 마르탱이 아닐지 모른다는 증거를 하나 둘 화면 위에 풀어놓는다. 마르탱의 명석한 두뇌에 더해 아내며 장모의 굳건한 지지가 치열한 법정 공방에서 마르탱이 패하지 않도록 붙들고 있을 뿐이다. 그 사이 무죄추정의 원칙을 세우고 심증으로 누군가의 인생을 무너뜨리지 않으려는 코라스의 공정함이 선명하게 빛난다.
무려 40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임에도 지루함을 찾기 어려운 작품이다. 삼촌에게 모함을 당한 조카의 억울함일까, 남편을 몰라본 여자의 어리석음일까, 진실을 외면하는 이들에 대한 분노일까, 수많은 감정들이 곳곳에서 분명하게 튀어나온다. 재판은 시종 긴장감을 자아내고 가장 극적인 순간, 한 번의 실수를 잡아챔으로써 완전한 결말을 이룩한다. 이 시대 최고의 법정영화들과 자웅을 겨룬다 해도 쉽게 밀려나지 않을 완성도가 이 영화의 커다란 장점이라 할 만하다.
멋진 연기와 치밀한 구성, 무엇보다 훌륭한 고증은 영화를 더욱 특별하게 한다. 이후 프랑스를 대표하는 대배우가 된 제라르 드빠르디유와 남편을 깊이 사랑한 아내 베르뜨랑을 연기한 나탈리 베이는 보는 이를 절로 설득하는 연기를 펼치는 데 성공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 보는 이를 계속 집중하게 하는 구성이며, 그 시대 생활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고증 또한 공이 많이 들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 영화를 중세를 연구하는 사학도들이 애정을 갖고 살피는 데는 영화를 만드는 데 들인 무시할 수 없는 노력이 자리한다 하겠다.
지난 시대를 미화하지도, 무시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과거를 깔보지도 미화하지도 않는 태도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부에게 사탄이 들렸다고 채찍질을 하고, 이제 겨우 중학생이 되는 아이들을 강제로 짝지어 결혼하게 하는 풍습, 지옥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같은 모습을 그대로 등장시키는 건 그 시대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려는 공정한 자세다.
그러나 뒤에 태어난 자들의 흔한 오만을 범하는 대신, 영화는 그 시대 이들이 갖고 있는 미덕 또한 적절히 드러낸다. 신앙에 기대어 제 도덕을 지키려는 선량한 이들, 한 순간의 감상으로 누군가의 삶을 정할 수 없다 믿는 사려 깊은 법관의 자세 또한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 결과 남편도, 아내도, 장모며 삼촌 모두가 그저 선하거나 악하기만 한 평면적 인물이 아닌, 그 시대 안에서 열심히 살아가려 한 한 명의 인간이었음을 보여주게 된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 바로 이것이다.
결말 또한 무척 의미심장하다. 어느 한 악당의 일탈행위가 아니라 시대가 낳은 비극으로써 사건을 돌아보게 하는 결말이 관객에게 쉽게 해소되지 않는 먹먹함을 주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난 뒤 돌아본 세상은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지난 시대의 부조리함이 이 시대엔 이 시대의 방식대로 남아 있지는 않은가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로부터 우리는 또 다른 비극들을 마주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앞엔 이 시대의 선량하고 용감하며 사려 깊은 사람들을 더 많이 키워내야 하는 숙제가 놓여 있는 것은 아닐까.
한 편의 영화로부터 이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 영화가 보기 드물게 훌륭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평화롭던 어느 날인가, 마을에 든 떠돌이들이 그녀의 남편을 알아본다. 그가 남편인 마르탱 게르가 아닌, 아르노 뒤 틸이라는 알 수 없는 소리를 한다. 심지어는 마르탱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다고 했다. 남편은 제가 마르탱이라며 말도 안 된다고 펄쩍 뛰지만 가만히 살펴보니 의심스런 점이 적지 않다. 얼마 뒤 남편은 그가 떠나 있는 동안 농장을 책임진 삼촌 피에르 게르에게 제가 없는 동안 불린 재산을 돌려 달라 말한다. 그가 없는 동안 처자식까지 책임진 삼촌은 어떻게 재산을 달라 하느냐고 벌컥 화부터 낸다. 둘은 그날로 철천지 원수가 된다.
▲ 영화 <마틴 기어의 귀향> 포스터 ⓒ 프리미어엔터테인먼트
16세기 법정다툼, 믿기 어려운 실화
이야기는 놀랍게도 실화다. 16세기 중반 프랑스의 시골마을에서 벌어진 사건을, 직접 재판한 판사 장 드 코라스가 기록으로 남겼다. 이 흥미로운 이야기가 영화 <마틴 기어의 귀향>으로 만들어졌다. 유럽 중세사회의 풍속을 훌륭하게 고증한 사극이자, 20세기 후반 만들어진 명작 법정영화이며, 제라르 드빠르디유의 명연으로 기억되는 훌륭한 영화다.
이야기는 1542년 4월 프랑스 툴루즈의 작은 마을 아르티갓에서 시작된다. 열두 살 신부 베르뜨랑(나탈리 바이 분)과 한 살 많은 신랑 마르탱 게르(버나드-피에르 도날듀 분)는 혼례를 올린다. 그러나 이들은 첫날밤을 지내지 못한다. 아직 너무 어려서일까, 신부가 마음에 차지 않아서일까, 마르탱이 남자구실을 하지 못한 것이다.
아이를 갖지 못한 신혼부부를 마을 사람들은 괴팍하게 골려댄다. 신부를 내놓으라 떠들고 마르탱을 조롱하기 일쑤다. 보다 못한 마을의 사제가 나서 부부를 발가벗겨 기둥에 묶고는 악귀를 쫓는 시범까지 보인다. 이 일이 충격적이었을까. 마르탱과 베르뜨랑 사이에서 아들 하나가 태어나고 둘은 겨우 놀림을 피하게 된다.
▲ <마틴 기어의 귀향> 스틸컷 ⓒ 프리미어엔터테인먼트
어느 날 사라진 남편, 8년이 지나 돌아왔다
여기서 끝나면 영화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날 마르탱은 아버지와 갈등을 겪다 집을 나가버리고 만다. 농장일을 열심히 하라던 아버지가 곡식 두 자루가 사라진 책임을 마르탱에게 물었던 날, 그가 조용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나서 덩치도 훌쩍 커지고 유쾌하게 변한 사나이가 마을에 나타난다. 그는 마을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 사이에 있었던 사연을 제법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제가 옛날 마을을 떠난 마르탱이라고 주장하고 사람들은 그걸 믿어버린다.
영화는 법정다툼으로 곧장 옮겨간다. 마르탱과 삼촌 피에르가 물러서지 않는 가운데 판사 코라스가 무엇이 진실인지를 가려내려 고심한다. 마르탱이 돌아온 뒤 아내와의 관계는 더없이 행복했다. 그는 농장일도 열심히 했고 동생이며 장모, 마을 사람들과의 사이도 아주 좋았다. 그가 있어 그의 가족은 더 완전해졌다.
늘 불만이 가득했던 떠나기 전의 마르탱보다 늘 유쾌한 돌아온 마르탱이 더욱 든든한 가장이자 멋진 남편처럼 보였다.
▲ <마틴 기어의 귀향> 스틸컷 ⓒ 프리미어엔터테인먼트
남편이 내 남편이 아니라니
영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마르탱이 진짜 마르탱이 아닐 것이란 심증을 더하게 한다. 그가 마르탱이 아닐지 모른다는 증거를 하나 둘 화면 위에 풀어놓는다. 마르탱의 명석한 두뇌에 더해 아내며 장모의 굳건한 지지가 치열한 법정 공방에서 마르탱이 패하지 않도록 붙들고 있을 뿐이다. 그 사이 무죄추정의 원칙을 세우고 심증으로 누군가의 인생을 무너뜨리지 않으려는 코라스의 공정함이 선명하게 빛난다.
무려 40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임에도 지루함을 찾기 어려운 작품이다. 삼촌에게 모함을 당한 조카의 억울함일까, 남편을 몰라본 여자의 어리석음일까, 진실을 외면하는 이들에 대한 분노일까, 수많은 감정들이 곳곳에서 분명하게 튀어나온다. 재판은 시종 긴장감을 자아내고 가장 극적인 순간, 한 번의 실수를 잡아챔으로써 완전한 결말을 이룩한다. 이 시대 최고의 법정영화들과 자웅을 겨룬다 해도 쉽게 밀려나지 않을 완성도가 이 영화의 커다란 장점이라 할 만하다.
멋진 연기와 치밀한 구성, 무엇보다 훌륭한 고증은 영화를 더욱 특별하게 한다. 이후 프랑스를 대표하는 대배우가 된 제라르 드빠르디유와 남편을 깊이 사랑한 아내 베르뜨랑을 연기한 나탈리 베이는 보는 이를 절로 설득하는 연기를 펼치는 데 성공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 보는 이를 계속 집중하게 하는 구성이며, 그 시대 생활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고증 또한 공이 많이 들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 영화를 중세를 연구하는 사학도들이 애정을 갖고 살피는 데는 영화를 만드는 데 들인 무시할 수 없는 노력이 자리한다 하겠다.
▲ <마틴 기어의 귀향> 스틸컷 ⓒ 프리미어엔터테인먼트
지난 시대를 미화하지도, 무시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과거를 깔보지도 미화하지도 않는 태도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부에게 사탄이 들렸다고 채찍질을 하고, 이제 겨우 중학생이 되는 아이들을 강제로 짝지어 결혼하게 하는 풍습, 지옥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같은 모습을 그대로 등장시키는 건 그 시대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려는 공정한 자세다.
그러나 뒤에 태어난 자들의 흔한 오만을 범하는 대신, 영화는 그 시대 이들이 갖고 있는 미덕 또한 적절히 드러낸다. 신앙에 기대어 제 도덕을 지키려는 선량한 이들, 한 순간의 감상으로 누군가의 삶을 정할 수 없다 믿는 사려 깊은 법관의 자세 또한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 결과 남편도, 아내도, 장모며 삼촌 모두가 그저 선하거나 악하기만 한 평면적 인물이 아닌, 그 시대 안에서 열심히 살아가려 한 한 명의 인간이었음을 보여주게 된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 바로 이것이다.
결말 또한 무척 의미심장하다. 어느 한 악당의 일탈행위가 아니라 시대가 낳은 비극으로써 사건을 돌아보게 하는 결말이 관객에게 쉽게 해소되지 않는 먹먹함을 주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난 뒤 돌아본 세상은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지난 시대의 부조리함이 이 시대엔 이 시대의 방식대로 남아 있지는 않은가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로부터 우리는 또 다른 비극들을 마주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앞엔 이 시대의 선량하고 용감하며 사려 깊은 사람들을 더 많이 키워내야 하는 숙제가 놓여 있는 것은 아닐까.
한 편의 영화로부터 이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 영화가 보기 드물게 훌륭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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