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20년차 편집기자가 제목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

[제목의 이해] 잘 '심은' 제목은 독자를 깨우쳐 줄 수 있다

등록|2023.03.09 15:59 수정|2023.03.09 16:07
사는이야기 담당 편집기자로 일하며 더 좋은 제목이 없을까 매일 고민합니다. '우리들의 삶'을 더 돋보이게 하고, 글 쓰는 사람들이 편집기자의 도움 없이도 '죽이는 제목'을 뽑을 수 있도록 사심 담아 쓰는 본격 제목 에세이.[편집자말]
고경태는 제목을 뽑지 않는다. 심는다. 기사를 써 던지면 그 손에서 뚝딱 스트라이크로 꽂힌다. - <유혹하는 에디터> 뒷표지 추천의 말 <중앙일보> 문화 데스크

<유혹하는 에디터>(2009)를 쓴 고경태 기자(이하 존칭 생략)는 출간 당시 영화 주간지 <씨네21> 편집장이었다(그 전엔 <한겨레> esc팀장(매거진팀장), <한겨레21> 편집장 및 기자로 일했다, 현재 한겨레신문 이노베이션랩 실장).

이 책에는 <한겨레> 신문사와 주간지 <한겨레21> 등을 거치는 동안 그가 해 온 '편집' 이야기와 편집과 관련해 해 온 일들 가령, 주간지 표지, 신문광고 카피부터 콘텐츠 기획까지 편집에 대한 모든 것이 총망라되어 있다(아쉽게도 책은 지난해 절판되었다).

제목을 '심는다'고요?
 

▲ 신문 ⓒ 언스플래쉬


내가 고경태를 만난 것은 입사 3년차였을 때인 2005년이었다. 편집 실무야 회사에 들어와서 배우고 익혔지만 다른 곳에서 하는 편집은 어떤지 궁금했다. 특히 온라인 매체 편집기자인 내가 경험해보지 않은 오프라인 일간지 편집기자들은 어떻게 일하는지 알고 싶었다. 모르는 게 있다면 배우고 싶었다.

그때 나는 젊고, 열정이 넘쳤고, 뭐든 배우고 싶었으니까. 그러면 일을 잘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많은 것을 알게 되면 더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도. 입사 3년차 일 욕심을 부리기 딱 좋은 때였으니까. 더불어 회사 밖에서 객관적으로 내가 하는 일을 관찰해 보고도 싶었다. 그렇게 세상 밖을 두리번거리다가 그가 하는 '편집기자 실무학교' 강의를 알게 되었다.

고경태는 사실 말을 잘 하는 달변가는 아니었다. 말로 정신을 쏙 빼놓기보다는 자꾸 정신을 놓치게 할 때가 많았다. 말과 말 사이의 텀, 말하는 시간보다 침묵의 시간이 더 잦았다. 그럼에도 글을 쓰고 책을 내고 강의를 여는 것을 보면서 '편집'이란 일을 대하는 그의 진심은 알 것 같았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했다. 편집기자가 말을 잘 해서 뭐한담, 편집한 기사로 보여주면 됐지. 고경태는 그가 '편집한 결과물'로 설명이 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배우는 시간은 일하는 데 활력이 되었다. 그런 기억을 떠올리며 근속 20년차에 다시 읽게 된 <유혹하는 에디터>는 한 마디로 '책으로 만든 이력서' 같았다(저자의 말에서 고경태는 입사 18년 만에 낸 책이라고 했다). 책은 언제 읽느냐에 따라 똑같은 내용이 달리 이해되기도 한다는데 내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책 뒷면에 있는 추천사에 시선이 계속 머물렀다. '(제목을) 심는다'라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제목을 심는다' 이게 무슨 말이지?'. '기사를 써 던지면 그 손에서 뚝딱 스트라이크로 꽂힌다'라는 설명으로는 다 이해되지 않는 문장이었다.

가만히 떠올려 봤다. 제목에 붙는 다양한 서술어들을. 제목을 뽑는다, 제목을 짓는다, 제목을 단다, 제목으로 올린다, 제목을 정하다, 제목으로 썼다 등등의 표현을. 그런데 '제목을 심는다'라고 말하는 건 새로웠다. 들어보지 못했기에 신선했다.

비슷비슷한 수많은 문장들 사이로 '이런 건 처음이지?' 하고 고개를 쑤욱 내미는, 낯설지만 좋은 표현, 몇 번이고 곱씹게 되는 문장을 만났을 때 미세하게 떨리는 감정을 그때 느꼈던 것 같다.

추천사를 쓴 사람에게 '고경태는 왜 제목을 심는다'라고 한 건지 확인할 수 없어서 직접 알아봤다. 우선 '심는다'의 사전적 의미부터 확인해 봤다.

사전에 따르면, '심다'는 '1. 초목의 뿌리나 씨앗 따위를 흙 속에 묻다. 2. (비유적으로) 마음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게 하다. 3. (비유적으로) 어떤 사회에 새로운 사상이나 문화를 뿌리박게 하다'라고 했다. '제목을 심는다'라고 한 것은 아마도 2, 3번의 비유적인 표현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했다.

보통은 여기서 멈추고 말았을 텐데 호기심 많은 내 성격상 한 발 더 깊이 들어갔다. 사전을 찾아보는 김에 영어사전도 검색해 봤다. 심다는 보통 'plant'를 쓰는데, 여기에도 비유적으로 '(인상·생각 등을) 심다'는 뜻이 있었다. 다른 외국어 사전도 살펴보았다. 그중 심다라는 뜻을 가진 독일어 'einpflanzen' 풀이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누구의 마음속에 무엇을 깊이 심어(깨우쳐)주다.'

굉장했다. 제목 안에 이렇게 고급진 의미가 숨어 있었다니. 이러니까 '제목을 심는다'는 행위 자체가 대단히 멋지게 들렸다. 똑같은(물론 진짜 같은 거라고는 볼 수 없겠지만) 초밥이지만, 런치메뉴로 먹는 15000원짜리 모듬 초밥이 아니라 오마카세로 먹는 45000원짜리 초밥 같았다.

제목 '뽑기' 아닌 제목 '심기'로

자연스럽게 그동안 내가 지은 제목을 돌아보게 되었다. 좋은 기사를 더 많은 독자들에게 보이고 싶은 마음에 새롭고 재밌고 기발한 제목을 고심할 때가 많다. 하지만 모든 기사에 대해 100% 그랬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매일 습관적으로 시간 되면 세 끼 밥을 먹듯 큰 의미 없이 뽑은 제목도 있을 거다.

제목은 짧을수록 좋고 임팩트가 있어야 하며 독자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만 하면 된다고, 거기에 재치와 재미 즉 유머를 가미할 수만 있다면 기본은 하는 거라고. 엄청난 맛보다 기본에 충실한 맛만 내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제목에 이런 의미가 숨어 있다는 걸 알게 되니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될 소중한 무언가를 손에 쥐고 있는 듯했다. 대학신문사에서 기사를 쓰던 스무 살 이후부터 편집기자로 산 20년 동안 마르고 닳도록 들었던 '제목을 잘 뽑아야 한다'는 말은 그저 그런 뻔한 말이 결코 아니었다. 잘 '심은' 제목은 독자를 깨우쳐 줄 수 있다는데 그런 제목을 어찌 허투루 대할 수 있을까.

물론 안다. 그렇다고 내가 검토하는 모든 기사 하나 하나마다 의미를 담아 독자의 마음에 심어 깨우쳐 줄 수 있는 제목을 뽑을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를 거다. '이제까지 열심히 제목을 '뽑기'만 했다면 가끔은 제목을 '심어' 보는 날도 있을 거라는 말이다.
덧붙이는 글 제목을 '뽑지' 않고, 제목을 '심는' 고경태가 오는 3월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오랜만에 특강을 연다. 특강 제목은 '제목이 온다'. 처음 듣는 표현에 또 한번 무릎을 쳤다. 어떻게 제목이 온다는 것인지, 관심 있는 분들은 찾아보시길.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