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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국사가 하룻밤 사이에 조성했다는 마애불

남원 교룡산 둘레길 걸으며 역사와 설화를 떠올리다

등록|2023.01.06 08:55 수정|2023.01.06 13:16
전북 남원시의 북쪽에 교룡산(蛟龍山, 518m)이 있다. 교룡산 둘레길은 이 산 기슭을 한 바퀴 걷는 임도이다. 7㎞의 둘레길은 2시간이면 걷기에 충분하다. 교룡산성(蛟龍山城) 안의 선국사까지는 주차장에서 0.6㎞ 거리로 30분에 왕복할 수 있다. 보름 전에 많이 내린 눈으로 잔설이 두터운 1월 초순의 교룡산 둘레길을 걸어 보았다.
 

▲ 교룡산. 교룡산은 형제처럼 솟은 두 봉우리(밀덕봉, 복덕봉)가 남원 분지를 굽어보고 있다. (풍악산 기슭에서 사진 찍음) ⓒ 이완우


교룡산은 형제처럼 솟은 두 봉우리(밀덕봉, 복덕봉)가 남원 분지를 굽어보고 있다. 둘레길은 지형을 따라 물 흐르듯 부드럽게 이어진다. 푸른 대나무숲과 감나무 과수원을 둘레길이 지나간다. 소나무 숲의 그윽한 솔바람과 곧고 푸른 소나무의 바늘잎에서 올곧은 선비의 풍모가 서늘하게 느껴진다.

교룡산성은 '동학의 성지'라고 한다.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1824~ 1864)가 1861년 이곳 선국사의 은적암에 기거하면서 <동경대전>을 집필하였고, '도(道)는 천도(天道)라 하나 학(學)은 동학(東學)'이라며 '동학(東學)'을 이름 지었다. 동학농민혁명(1894년) 때에 김개남 장군의 전라좌도 동학농민군이 이 산성에 주둔하기도 했다.
 

▲ 교롱산 둘레길. 둘레길의 얼어붙은 눈을 밟는 소리가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겠다는 듯 사각거린다. ⓒ 이완우

 

▲ 교룡산 홍예문. 성벽의 돌 하나마다 교룡의 비늘 같이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로 더 견고하게 보인다. ⓒ 이완우


교룡산성의 동문인 홍예문(虹霓門)을 지나면 선국사까지 계곡물을 따라 돌길이 올라간다. 옹성으로 둘러싸여 있는 홍예문은 장대석을 3단으로 쌓고 아홉 개의 돌을 아치(arch)형으로 견고하게 맞추었다. 교룡산성은 포곡식 산성으로 계곡을 막은 성벽이 교룡산의 험한 능선을 향해 따라가며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남원 지역에서 교룡산은 배의 돛대처럼 든든한 구심점이다. 지리산 역사 문화권의 문화대간(文化大幹)을 수십 년 동안 튼실하게 엮어온 향토사학자 지리산문화자원연구소 김용근 소장은 교룡 설화를 이야기한다.

"남원에는 교룡이라는 지명이 두 곳에 있습니다. 이곳 교룡산과 지리산으로 향하는 백두대간 구룡계곡의 교룡담(蛟龍潭)입니다. 교룡은 아직 뿔이 없고 여의주를 얻지 못한 용인데, 이 교룡(왕, 지도자)이 승천하게 되면 물고기(백성)가 따라 올라갑니다. 남원에는 교룡이 머물러 있으며 고을과 백성을 보호한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교룡산에서 남쪽으로 남원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남원성(南原城)에서는 정유재란(1597년) 때 조선 군관민(軍官民) 7천명, 전라병마군 1천명과 명군(明軍) 3천명이 연합하여 성을 지키고 있었다. 명군 3천명은 중국 요동의 기마병으로 군마는 4천기였고 명군 부총병 양원(楊元)이 지휘하고 있었다.

조명연합군은 5만8천명의 일본군 정예 부대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남원성의 함락과 함께 조명연합군과 백성 1만1천명이 장엄하게 산화(散華)하였다. 이때 명나라 부총병 양원(楊元)은 50기의 기병과 함께 탈출했다.

조선군은 애초에 교룡산성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를 준비를 했다. 그러나 기마병으로 전공을 세워온 양원은 평지인 남원성에서 전투할 것을 고집하였다. 명군 지휘관의 독선적 결정으로 결국 남원산성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지 못했고, 양원은 남원성 전투가 어려워지자 탈출해 버리기까지 했다. 안타깝고 통탄할 일이었다.

일본군의 대규모 병력과 정보력이 남원성에 집중되고 남원성이 함락되는 참담한 시기에 조선에는 새로운 희망과 가능성이 열리고 있었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면되어 조선 수군 재건의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일본군은 남원성 전투가 막바지에 이를 때에야 이순신 장군이 조선 수군을 다시 지휘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 재건과 남원성 전투 과정
8월28일. 칠천량 해전 조선수군 참패.
9월13일. 장군 진주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면 교지 받고 구례 도착.
9월15일. 곡성 옥과에 머묾. 순천으로 진행 예정.
[일본군] (경상도 곤양 노량을 거쳐 광양 도착. 구례로 진행 예정)
9월17일.
[일본군] (구례(求禮)를 함락시키고 남원성(南原城)으로 향함)
9월18일. 장군 순천 도착.
9월22일. 남원성 전투 시작.
9월25일. 전투 4일째 남원성 함락과 옥쇄.
이날 장군은 보성에서 선조의 수군 철폐령 교지를 받고 반대 상소를 씀.


9월 13일부터 18일까지 이순신 장군은 구례에서 순천으로 향하고, 일본군은 광양에서 구례를 거쳐 남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가까운 장소에서 이순신 장군과 일본군이 비켜 지나가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9월 25일 남원성이 전투 4일째 함락되고 1만1천명의 군관민은 산화하였다.

9월25일 이순신 장군은 선조의 수군 철폐령의 교지를 받고 결연한 의지로 상소를 쓴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일본군은 조선 수군을 추격하며 이순신 장군의 수군을 완전히 제압하려고 작전을 세웠다. 그러나 10월26일 명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13척 조선 수군으로 일본군 정예함대 133척을 격파하였다. 바람 앞의 등불 같던 조선을 구해낸 기적 같은 대첩으로 정유재란의 판세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일본 수군이 이순신 장군에게 참패하자, 해상 보급로가 차단될까 우려한 일본 육군은 전라도에서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는 참담한 희생을 치렀지만, 우리 역사와 우리 마음에 우뚝 솟은 민족혼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김용근 향토사학자는 남원 지역에 전해오는 설화의 이야기를 역사의 씨줄에 날줄로 엮어 천년 고도 남원의 정체성을 밝혀내고 있다.

"정유재란 때 일본군은 월등한 군사력의 우세에도 남원성을 쉽게 공격하지 못합니다. 남원의 고지명이 용성(龍城)입니다. 일본군은 교룡산의 교룡과 만복사의 철불(鐵佛)이 남원을 지켜준다는 소문을 들었고, 남원성에 있을 불을 뿜는 용을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일본군은 만복사 철불을 끌어내어 남원성 밖에서 목에 쇠줄을 묶어 끌고 다니며 용의 기운을 빼려는 심리전을 전개했다고 합니다."

교룡산은 북쪽으로 풍악산을 바라보고 있다. 옛날부터 이 풍악산 기슭에 용의 여의주인 바위가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남원의 교룡은 고을의 수호자인데 여의주를 얻게 되면 머리에 뿔이 돋은 황룡이 되어 승천한다. 그러면 남원 고을의 생기가 약해지고 나라의 큰 길지를 잃게 되는 것이다.

한 스님이 여의주가 숨겨져 있는 곳을 예사롭지 않게 여겨서 대나무 지팡이를 꼽아두고 갔다. 이 지팡이가 싹이 터서 자라고 땅속에는 죽순이 돋으며 여의주를 땅 위로 밀어 올렸다. 백성들이 도선(827~898)국사에게 가서 알리니 국사는 그 바위에 마애불을 모셨다. 절은 짓지 않았는데 절을 지어 중생들이 찾아오면 교룡이 여의주를 발견하기 때문이란다.
 

▲ 남원 신계리 마애불. 소나무 숲 사이로 햇살이 마애불에 환하게 비쳤다. ⓒ 이완우


이 마애불이 남원시 대산면 신계리의 풍악산 기슭에 있는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이다. 높이 3m의 이 마애불은 줄에 꿴 구슬로 광배를 표현한 독특한 양식인데 도선국사가 하룻밤 사이에 조성했다고 한다. 여의주를 품은 이 마애불의 기운은 넘쳐서 교룡산 아래 만복사의 철불에 힘이 모였고 이 철불이 남원과 백성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 남원성. 폐허 된 남원성의 북쪽 일부를 복원했다. 역사적 현장에서 마음이 숙연하다. ⓒ 이완우


교룡산 둘레길 걷기를 하며 관련 깊은 문화재를 답사해 보았다. 신계리 마애여래좌상(08:30). 소나무 숲 사이로 햇살이 마애불에 환하게 비쳤다. 남원성(09:10). 폐허 된 남원성의 북쪽 일부를 복원했다. 역사적 현장에서 마음이 숙연하다. 교룡산 둘레길(9:25~10:45). 둘레길의 얼어붙은 눈을 밟는 소리가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겠다는 듯 사각거린다.

교룡산성 홍예문(10:55). 성벽의 돌 하나마다 교룡의 비늘 같이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로 더 견고하게 보인다. 선국사(11:05). 용천사(龍泉寺)를 나라의 안녕을 염원하는 선국사(善國寺)로 고쳐 불렀다.
 

▲ 선국사. 용천사(龍泉寺)를 나라의 안녕을 염원하는 선국사(善國寺)로 고쳐 불렀다. ⓒ 이완우


교룡산은 우리 역사와 강토를 보호하는 듬직한 호국의 산이다. 교룡 설화에서 국난과 역경을 극복하는 희망과 가능성을 확인하게 된다. 남원의 교룡 설화는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백성들의 염원과 믿음의 상징이며 생명력의 결정체이다. 교룡산 둘레길에서 살펴본 역사와 설화에서 우리의 힘으로 우리 강산과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교훈과 다짐도 되새겨 본다. 아! 남원성이여! 일만일천의 충혼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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