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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섬을 떠나며 내가 외친 조금 색다른 인사말

포르투갈인이 칭한 '일라 포르모사'의 의미

등록|2023.01.09 14:28 수정|2023.01.09 14:28
짧은 타이완 섬 여행을 마쳤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른 도시에도 들려보면 좋겠지만, 이번에는 타이베이에만 잠깐 머문 뒤 베트남으로 발길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날, 저녁 비행기를 타러 공항으로 가기 전 타이베이 외곽에 있는 단수이로 향했습니다. 타이완 '섬'이라는 곳에 들렸다는 인상을 남기기 위해, 왠지 바다가 보고 싶어서였습니다. 단수이에는 꽤 독특한 유적이 하나 있습니다. '홍모성(紅毛城)'이라는 유적입니다. 여기서 '홍모'라는 것은 유럽인을 의미합니다. 네덜란드에서 전해진 대포를 '홍이포(紅夷砲)'라고 하는 것처럼요. 이곳에 처음 성을 쌓은 사람들은 스페인 사람들이었습니다.
 

▲ 단수이에 정박된 선박들. ⓒ Widerstand


우리는 중국 문화권의 일부로 알고 있는 타이완 섬에 웬 스페인 사람들인가, 하실 수도 있겠지만, 타이완 섬은 청나라 강희제 시절까지 중국에 지배당한 적이 없습니다. 타이완 원주민들이 독자적인 정치체를 이루고 있던 이 섬에는 오히려 동남아시아에 무역 기지를 건설하고 있던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 스페인이 먼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타이완 섬의 북부로는 17세기 초반 스페인이 먼저 들어왔고, 이곳에 '산 도밍고 요새'라는 요새를 건설했습니다. 그것이 지금 '홍모성'의 원형입니다. 이후 남쪽으로는 네덜란드가 들어왔고, 스페인이 동남아시아 무역에서 혼란을 겪던 틈을 타 네덜란드는 스페인을 타이완 섬에서 몰아냅니다. 이제 타이완 섬 전체는 네덜란드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네덜란드는 이곳을 기지로 한동안 무역을 진행했습니다. 이후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대륙을 차지하는 혼란 속에서 남중국해를 주름잡던 해적이자 무역상, 정성공이라는 사람이 1662년 네덜란드를 몰아내고 타이완 섬에 정씨 왕조를 세우게 됩니다.
 

▲ 정성공 영정 ⓒ Widerstand


이 정씨 왕조가 청나라에 의해 멸망하는 1683년에야 타이완 섬은 중국의 지배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후 200여 년이 지난 뒤 청나라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죠.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대가로 타이완 섬은 일본에게 할양됩니다. 그 사이 중국 대륙에서는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성립되었지요. 일본은 1945년 패망과 함께 타이완 섬에서 물러났습니다. 중국 대륙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 끝에 중화민국이 타이완 섬으로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 홍마오 성도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청대로 넘어오며 더이상 군사기지로 사용되는 일은 없었지만, 청나라는 1867년 홍마오 성 일대를 영국에게 할양합니다. 영국은 이곳에 영국 영사관을 설치했지요. 타이완 섬의 지배자는 일본으로, 또 중화민국으로 변했지만 영국은 여전히 이 일대를 소유하고 영사관을 운영했습니다.

이후 1972년 영국이 타이완 섬에서 영사관을 철수함에 따라 이 지역은 영국의 우방국인 호주가 대신 관리했고, 호주도 중화민국과 외교관계를 단절하자 관리는 미국의 몫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1979년 미국과 중화민국이 단교하며 곧 홍마오 성은 중화민국 정부에게 반환되었고, 얼마 뒤 일반에게 공개된 것입니다.

'아름다운 섬' 타이완
 

▲ 홍마오성 앞의 국기들 ⓒ Widerstand


홍마오 성 앞에는 이 곳을 거쳐간 많은 나라들의 국기가 걸려 있습니다. 스페인, 네덜란드, 정씨왕조, 청나라, 일본, 영국, 호주, 미국. 그리고 마지막에 걸린 국기는 역시 중화민국의 국기입니다. 막상 이렇게 같은 곳에 이들 국가를 나열하고 나니, 중화민국도 타이완 섬에게는 다른 국가와 같은 일시적인 지배자일 뿐이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 분명하게 와닿았습니다.

중화민국에게 이 섬은 탈출해야 하는 섬이었을 것입니다. 어서 대륙을 수복하기 위해 잠시 거쳐가는 곳이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다음을 도모하는 일시적인 때이고, 그래서 지금의 고통과 억압은 잠시 견뎌내야 한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법의 효력을 정지하고, 선거를 치르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옳다고 믿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 섬을 삶의 터전으로 여긴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잠시 거쳐가는 곳이 아니라, 발 붙이고 사는 현실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이 섬은 탈출해야 할 곳이 아닌, 무엇보다 아름다운 섬이었습니다.

처음 타이완 섬에 닿은 포르투갈인들은 이 섬을 '일라 포르모사(Ihla Formosa)'라고 칭했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섬'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줄여서 '포르모사'라고만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포르투갈어를 중국어로 번역해 '미려도(美麗島, 메이리다오)'라고 말하기도 하지요.
 

▲ 잡지 <메이리다오> 창간호 ⓒ Widerstand


그리고 국민당의 독재가 이어지던 1978년, 타이완의 민주파 지식인들이 모여 만든 잡지의 이름도 <메이리다오(美麗島)>였습니다. 이 잡지를 창간하고, 국민당 독재를 비판하며 집회를 열었던 사람들이 대규모로 체포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메이리다오 사건'이라고 부르지요.

후일 가오슝 시장을 지내는 천쥐, 민진당 주석을 지내는 야오자윈, 스밍더, 황신제, 중화민국 부총통을 지내는 뤼슈렌 등이 모두 이 메이리다오 사건의 주역이었습니다. 중화민국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룩하며 총통에 오른 천수이볜은 이 사람들을 변호하는 변호인단이기도 했지요.

결국 이 섬을 '아름다운 섬'이라 부르던 이들이 지금의 민진당을 만드는 주역이 되었고, 그 민진당은 현직 차이잉원 총통이 소속된 여당으로 집권하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들이 승리한 셈입니다.
 

▲ 단수이 해변 풍경 ⓒ Widerstand


현재의 사람들이 만든 '진보'

지난 며칠, 짧게나마 이 섬의 일부를 돌아다니며 저는 그들이 말했던 '아름다운 섬'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이 섬에 현실을 발붙이고 사는 사람들이 가진, 이 섬을 더 아름답게 만들고자 하는 의지가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단지 수려한 자연이나 환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아름다운 섬'은 누구도 억압받지 않는 섬, 누구도 착취받지 않는 섬, 누구나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당당하게 누릴 수 있는 섬이었습니다. 그런 현실을 만들고자 하는 이들을 보았습니다.
 

▲ 단수이 진리대학 전경 ⓒ Widerstand


더 이상 타이완 섬은 국민당에게도 민진당에게도 탈출해야 할 섬은 아닙니다. 이제 중화민국 정부가 타이완 섬으로 넘어온지 70년이 넘게 지났습니다. 대륙의 중화민국을 기억하는 사람조차 이제는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장제스의 증손자인 장완안이 타이베이 시장에 당선되었습니다. 누구보다 중화민국의 대륙 수복을 주장해야 하는 혈통 같지만, 그조차 타이완 섬에서 태어났고 무리한 통일을 주장하지 않는 현실입니다.

결국 이제 타이완 섬에 남은 세대들은, 이 섬을 지키고 더 아름답게 만들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세대가 된 것입니다. 언급했듯 그것은 꼭 타이완 섬이라는 장소의 지리적인 아름다움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타이완 섬을 떠나며 이 섬에 발붙이고 살았던 사람들, 타이완이라는 현실을 살았던 사람들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섬'을 생각했습니다. 지금 여기를 사는 사람들의 힘이 만들어낸 진보를 생각했습니다. 여전히 이 섬을 지배하는 정부를 '중화민국'이라 칭하는 저이지만, 떠날 때 만큼은 이렇게 인사를 남겨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안녕, 나의 일라 포르모사."
덧붙이는 글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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