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은 4·3 명예회복... 국가의 반성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제주 4·3 희생자 재심재판 방청 후기]
▲ 제주지방법원20230111 제주지방법원 ⓒ 제주다크투어
10일 화요일, 제주지방법원 제201호 법정에서는 제주4·3수형인희생자에 대한 군사재판 직권재심 재판이 진행되었습니다. 오전 10시 30분에는 20차 재판이, 오전 11시 10분에는 21차 재판이 진행되어, 4·3 군사재판 당시 내란죄, 국방경비법 위반 등으로 유죄를 받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였던 고(故)김응삼님 등 총 60명에 대해 전원 무죄가 선고되었습니다. 제주다크투어는 11시 10분에 진행된 21차 재판을 방청하였습니다. 군사재판 희생자 유족분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망 이기출님의 조카 이OO님은 "큰아버지(망 이기출 님)을 뵌 적은 없고 할머니와 고모님, 아버님 통해서 이야기만 들었고, 지금은 제사만 모시고 있는 형편입니다. 제가 대학에 진학할 때 육사시험을 보려고 하니까, 연좌죄로 시험 자체가 되질 않았습니다. 그 때 어린 나이였지만, 할 수 없구나. 자식들에게는 이런일 없게 해야겠다. 그런 생각으로 살아왔습니다. 사회적으로 다시 한번 4·3에 대해서 무죄선고가 되어서 기쁜 심정입니다. 아무쪼록 재판장님과 여러 검사님들이 애써주신 덕분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망 박태환님의 조카 박OO님은 "한림읍 중산간에 살았었는데, 당시 3살 정도였습니다.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4·3때 작은삼촌이 토벌대에 끌려가 행방불명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작은삼촌을 찾아다니시다가 제가 15살 난 해에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직전에 저에게 작은 삼촌의 제사를 지내달라고 부탁까지 하셨습니다. 돌아가신 날을 모르니까 작은삼촌의 생년월일로 해서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작은삼촌이 대전형무소에서 돌아가셨다고 들어서 대전 골령골을 찾아가 현장의 흙을 발로 몇 번 툭툭 차 봤는데 바로 유골이 나왔다"라고 회상하셨습니다.
망 김상순님의 조카 김OO님은 "저는 어릴 때 아버지, 작은아버지, 큰아버지와 아기들까지 북촌에 살다가 다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북촌서 돌아가시고, 작은어머니와 아이들, 형님, 다 북촌초등학교에 모아놓고 군인들이 와서 총살시켰습니다. 북촌마을은 집 하나도 없이 전부 불붙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덕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낮에는 성문을 열어 먹을걸 구해오고 밤에는 문을 닫고서는 숨어서 살았습니다. 먹을게 없어서 톳도 해다가 먹고 하며 살았습니다. 작은아버지(망 김상순님)는 군인들이 잡아서 대전형무소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 소식이 없어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명예회복이 지금 시점에서 너무 늦은 감이 들었습니다. 우리 가족 제사만 해도 50번 이상은 지냈는데, 너무나도 속이 아프고 안타까운 일"이라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장찬수 부장판사는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고 해도, 그 사람이 그 죄를 지었다고 인정할 만한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유죄가 아닙니다. 70여년 전 4·3이 일어났을 때 우리나라엔 나라법도 있었고, 헌법도 있었는데 그 절차가 별로 지켜진 게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피고인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하였습니다. 이어서 "오늘 무죄판결로 마음에 응어리진 한이 조금이라도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유족분들은 국가가 부모를, 가족을 빼앗아갔는데 그분들을 어떻게 빼앗아갔는지 알지조차 못합니다. 그런데 국가는 70여년간 그것을 모른척했습니다. 국가가 반성해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유족들의 아픔을 헤아리는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덧붙이며 재판을 마쳤습니다.
유족분들의 말씀처럼 지금에 와서 직권재심와 명예회복이 진행되고는 있지만, 이 명예회복 절차 너무나 늦게 시작된 것은 안타깝습니다. 7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4·3희생자들과 유족들은 후유증과 연좌제 등으로 고통받으면서도 호소할 데 없이 가슴에 묻고 살아왔습니다. 국가는 반성하고, 유족들의 아픔을 헤아려 4·3희생자들의 행적을 추적하고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등 여러 분야에 많은 노력과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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