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영재 해녀'가 완도로 오게 된 사연
[지방소멸대응프로젝트 - 해녀 이야기] 강복연 완도 청산도 해녀
▲ ⓒ 완도신문
"아프지는 않는데 이제는 바닥에 안 나갑니다. 자식들의 성화에 못 이겨 작년 가을부터 집에서 쉬고 있어요. 심심하기도 해서 노인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습니다."
전남 완도군 청산면복지회관에서 만난 청산도 해녀 강복연(76)씨의 첫마디이다.
당시의 제주도 여자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강복연 해녀 역시 8살이 되자 동네 친구들과 함께 갓물질을 배우기 시작했다.
11세가 되자 우미(우뭇가사리)를 뜯고 13세에는 미역을 채취하는 등 물질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다 드디어 18세 때 어른들만 참여하는 먼 바다 물질에 나서 미역을 채취했다. 우도의 새로운 별이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우리 마을이 130호가 넘어요. 친구들이 15명 정도 됐는데, 나 혼자 상군해녀들과 함께 깊은 곳에서 미역을 딸 수가 있었어요."
그런 강복연 해녀는 19세가 되자 다른 해녀들처럼 육지로 첫 원정물질에 나섰다. 해녀 모집책이 알선해 준 곳은 구룡포였다.
"엄청나게 부푼 가슴으로 원정물질에 나섰는데 큰 돈을 벌지 못하고 경험삼아 다녀왔어요. 다음에 다시 가기로 했는데 20살 때는 청산도로 갔습니다."
강복연 해녀가 청산도로 물질을 온 이유는 사촌언니인 김정자(작고)씨가 결혼해 청산도에서 물질을 하고 있었는데 불러서 왔다고 한다. 매년 200~300명 정도가 왔는데 강씨 역시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강씨는 이후 3년을 연속해서 청산도로 오게 됐다.
"당시는 육지물질을 오면 방을 얻어 합숙을 했는데 옆집에 잘 생긴 총각이 있었어요. 가끔 과자를 사서 던져주기도 하고 고구마를 삶아 보내기도 하고 우리에게 아주 잘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이 들어 결혼까지 하게 됐다.
슬하에는 아들과 딸 2명씩 4남매를 뒀다. 큰아들은 중국의 한국법인 회사에 근무하고 있고 큰딸과 작은 아들은 부산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막내딸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교수로 지내며 버지니아에서 살고 있다.
"신랑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뒤 빚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애들은 어린데 앞날이 너무 막막했습니다. 그래도 내가 정신을 차리고 중심을 잡아야 되겠다 생각하고 물질도 열심히 하고 겨울이면 제주도의 밀감농장에서 밀감을 땄습니다. 그때 일당이 2만5천 원이었는데 한 달을 쉬지 않고 일해 막내딸의 학교 기숙사비와 용돈을 조금씩 줄 수 있었어요."
친정에는 1년에 한번 정도 다녀오는데 형제들이 제주시에 살고 있어 어릴 때 살았던 우도를 잘 가지 못한다고 한다.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유영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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