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끈 묶을 줄 모르는 고아, 그를 세상 밖으로 이끈 '격려'
[인터뷰] 연극 <오펀스>에서 동생 고아 '필립' 역을 맡은 배우 김주연
▲ <오펀스>를 하며 힘든 점“신체를 많이 쓰는 작품을 좋아하기도 하고, 또 몸을 통해서 얻는 희열이 저와 잘 맞아요. 사실 <오펀스>가 육체적으로 엄청 힘들지는 않아요. 물론 2막이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이 캐릭터를 만들 때가 좀 고단했죠. 아, 그래도 확실히 1막에 처음 등장해서부터 트릿이 들어오기 전까지, 위층으로 올라갈 때는 그냥 숨이 계속 여기 (손으로 목을 가리키며) 차 있어요. 1막에 서로 주고받으면서 ‘티키타카’가 빨라야 되는 신들이 있다 보니까, 숨이 많이 위에 차 있긴 한 것 같아요.” (웃음) ⓒ 곽우신
"원래 다른 작품의 오디션을 한 번 보러 오라고 해서 리딩을 하려고 김태형 연출을 만났어요. 그런데 그 역할을 하기에는 제가 좀 너무 어린 거예요. 그런데 연출께서 '내년에 <오펀스>를 하는데, 필립이라는 역할이 너무 잘 어울릴 것 같다'라고 해주셨죠. 그때부터 작품에 참여하는 데 대한 이야기를 나눴어요."
2022년을 닫으면서 2023년을 여는 시간, 배우 김주연이 선택한 작품은 연극 <오펀스>였다.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세 고아의 이야기이다. 미국 북부 필라델피아의 낡은 집에서 트릿과 함께 단둘이서 사는 필립은, 각종 알레르기가 두려워 세상 밖에 나가지 못한 채 집 안에서만 지낸다. 신발끈도 묶을 줄 모르고, 특정한 색깔의 타일만 밟고서 지나갈 수 있다.
"연출께서 많은 걸 요구하셨죠. 대본에 그냥 '붙인 글'로 지문을 넣어주세요. '필립은 광고 속의 많은 말을 따라 하고 있다', '스파이더맨처럼 움직인다' 그리고 '가끔 정제되지 않은 목소리를 낸다'라는 것들이요. 가장 중요했던 건 필립의 장애에 관한 거였죠. 어떻게 보면 자폐가 있는 것 같잖아요. 갇힌 공간에 있고, 사람들과 인간적인 소통이 성숙하게 이루어져 온 아이가 아니잖아요. 하지만 그 지문에 정확히 기재되어 있었어요. '자폐는 아니다'라고.
장애를 희화화하는 것처럼 묘사하지 않으려고 되게 신중하게 연출과도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다만, 연출께서는 필립이 사회화 과정을 거치지 못한 게 좀 드러나도 괜찮다고 얘기해주셨어요. 왜냐하면 2막에서 필립이 달라지고 성장하는 게 있잖아요. 필립이 처음부터 너무 말을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면 좋겠고, 또 이게 장애를 비하하는 게 안 되게 하려고 필립을 맡은 다른 배우들과도 이야기를 많이 했죠. 행동으로 연기를 하다 보면 손이라든가, 이런 표현들이 정제되지 않고 나올 수도 있으니까요. '이건 좀 그렇게 보이니까 이렇게 바꿔볼까, 이건 빼볼까?' 하며 배우들끼리 서로 맞춰가는 시간이 있었어요."
언젠가부터 트릿과 필립의 시간은 멈춰 있다.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야 했던 트릿은, 필립을 과보호하고 그를 사실상 감금한다. 물론 트릿은 필립을 사랑한다. 필립도 그 점을 알고 있다. 하지만 필립도 필요한 성장을 하지 못한 채 어느 순간에 머물러 있다. 그랬던 두 사람의 시간이 한 사람을 만나 바뀌기 시작한다. 해롤드가 이 낡은 집에 머물게 되면서, 트릿과 필립은 격려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특히나 필립은 해롤드의 가르침 속에 세상 밖으로 나가는 법을 조금씩 배우게 된다.
▲ 마지막 춤 “마지막에 추는 춤은, 그게 해롤드를 추모하는 우리들의 방식이라고 생각했어요. 너무 행복해서 춤을 추는 것도 아니고, 뭔가 슬퍼서만 추는 춤도 아니에요. 우리가 해롤드에게 보답으로 줄 수 있는 게 뭘까 했을 때 할 수 있는 것. 그 시작은 해롤드 앞에 꽃을 놔주는 것부터죠. 그리고 처음에는 춤으로 시작하지만 마지막에는 거의 막춤이 되고, 결국에는 거의 그냥 포효하는 게 되잖아요. 필립과 트릿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 곽우신
배우 김주연에게 '필립'은 마냥 낯선 인물은 아니었다. 2015년에 데뷔한 1993년생 배우는 그렇게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 동안 다양한 경험을 축적해 왔다. 뮤지컬 <인터뷰>에서는 날카로웠던 배우가, <빨래>에서는 따뜻했다. <줄리 앤 폴>에서의 사랑스러웠던 연기가,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에서는 서늘하게 변한다. <더 헬멧>에서의 강건함도 훌륭하지만, 그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는 무엇보다 <템플>을 빼어 놓을 수 없다.
"필립은 말을 되게 특이하게 하잖아요. 다행히 제가 <템플>을 했었으니까, 그때 확실히 언어 습관이나 시선이나 그런 걸 많이 연구했었거든요. 다만, '템플'과 또 '필립'이 비슷한 부분이 있어서, 이걸 어떻게 안 겹치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죠. 사회적으로 동떨어진 두 인물인데, <오펀스> 보신 분들이 '아, 김주연의 필립은 좀 템플이랑 너무 비슷한데?'라는 말을 안 들으려고 계속 저를 성찰했죠.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는데, 이제 장면 연습을 해가면서 '나만의 필립은 <정글북>의 모글리 같았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찻잔의 손잡이를 이렇게 쥐고 든다는 걸 알고 있지만, 모글리는 모르잖아요? '찻잔을 드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찻잔을 어떻게 들까?' 그러면 아예 다른 부분을 잡고 들겠죠? 밖에 나가서 생활하지 않았던 필립을, 사회화가 덜 된 아이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했죠.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템플과는 자연스럽게 좀 멀어지더라고요. 언어적으로는 자폐아답지 않고, 행동적으로는 좀 더 늑대 소년처럼 표현하면 어떨까 생각했죠. 하면 할수록 더 느꼈던 게, 2막에서는 필립이 그런 부분들을 확실히 아예 벗어나잖아요. 사회화하는 과정 안에서 표현하다 보니까 그런 부담감이 좀 많이 없어졌던 것 같아요."
<오펀스> 무대 위의 김주연은, 지금까지의 김주연과 비슷하면서도 분명히 달랐다. 그는 본인의 장점을 잘 아는 배우이고, 그 점을 십분 활용해 무대 위에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을 분명히 장악하는 이이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작품을 하든, 지금보다 더 잘 해낼 것이라는 가능성과 믿음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공연이 한창인 지난해 12월 말, 그를 삼선동의 작은 스튜디오에서 만난 이유이다.
"나 저 사람 마음에 들어. 좋은 사람 같아"
▲ 신발을 돌려주는 의미“주변에서 보신 분들이, 그 장면이 다 ‘눈물 버튼’이라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돌아가시는 분들을 깨끗하게 씻겨드리잖아요. 그가 준 깨끗한 신발을 돌려주는 건, 해롤드의 죽음을 필립이 인정하는 거죠. 해롤드가 준 사랑에 내가 보답하고, 그리고 이어서 트릿이 필립의 원래 운동화 끈을 묶어우잖아요. 트릿도 결국 필립의 사랑에 보답하는 거죠. 그렇게 각자가 더 인격적으로 온전해지는 거죠.” ⓒ 곽우신
해롤드는 술집에서 트릿을 처음 본 순간, 그가 자신과 같은 고아 출신이라는 걸 알았다. 트릿은 해롤드로부터 금품을 빼앗고, 그를 납치해 누군가로부터 몸값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성긴 계획을 세웠다. 트릿은 자신이 해롤드를 잘 구슬려서 집까지 데리고 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해롤드는 트릿이 '앵벌이 키즈'처럼 보여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필립은 그런 해롤드가 마음에 들었다. 그는 의자에 몸이 묶였는데도 '최고의 탈출 마법사 후디니'처럼 빠져 나오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일단 필립 자체가 사람에 대해서 반감을 갖는 아이는 아닌 것 같아요. 늘 바깥세상이 궁금하고, 사람들이 궁금하잖아요. 처음에 해롤드와의 대화에서도 늘 밖의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다고 하잖아요? 늘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긍정적인 마음은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필립은 개인적으로, 이 사람(해롤드)이 고아라는 것에 대한 동질감을 처음부터 확실히 느껴요. 해롤드가 술에 취해서 하는 간단한 이야기들이 있잖아요. 그때부터 '충분히 이 사람과 대화하고 싶다'라는 호기심이 드는 거죠. 필립에게는 아마 트릿 말고 이 집에 들어온 첫 사람이 해롤드였을테니까, 그래서 뭔가 사람을 너무 좋아는 하지만 낯선 사람에게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는 강아지 같은 거죠.
또 해롤드가 되게 유쾌하고 유머러스하게 이 아이의 마음을 풀어주잖아요. 필립의 눈높이 대로 후디니 얘기를 꺼낸 것도 그렇고, 로퍼를 사주겠다는 얘기도 그렇고... 필립은 정말 해롤드가 후디니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 이후로도 인생을 사는 법, 꼭 필요한 것들을 꺼내서 알려주잖아요. 진짜 마법사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요?"
연극 <오펀스>는 이번이 세 번째 공연이다. 초연과 재연을 거치면서 이번 시즌 가장 달라진 점은 '웃음'이다. 1막에서의 희극적 요소들을 덜어내고 무게감을 더했다. 트릿과 필립, 특히 해롤드와 소통의 오류가 빚어냈던 웃음들을 거두어내는 대신, 이들의 관계성이 더 잘 보이게끔 하기 위한 도전이었다. 트릿과 필립은 이전보다 더 날이 서 있고, 거칠고, 폭력적이다. 그런 만큼 이들의 변화도 더 극적이다.
"초연과 재연에서는 해롤드가 뭔가 필립의 이야기에 반발하거나 '쟤가 왜 이래' 같은 호흡을 강하게, 코미디적인 요소로 발현했어요. 해롤드와 필립이 서로 말이 안 통하는 장면도 그랬고요. 그런데 이번 시즌에는 김태형 연출께서 그런 웃음 포인트들을 덜어내자고 하셨어요. 재미난 요소는 충분하니까, 좀 덜 웃기더라도 그들의 삶의 방식이, 고아들의 이야기가 더 잘 담겼으면 좋겠다고요. 작품은 더 무거워지겠지만, 대신 관객들에게 더 진심이 다가갈 수 있도록 말이죠.
해롤드가 이 집 안에 있으면서, 잠깐이지만 필립의 모든 면을 어쩔 수 없이 보게 되는 거죠. 타일을 밟고 다니지 않고, 혼잣말을 되게 열심히 하고, 밖에 나가지 않고... 보통의 일반적인 아이는 아니라는 것을 해롤드가 알게 되고, 그래서 급격하게 마음을 열고 집에 남기로 해요. 필립이 하는 광고 대사를 따라 한다든가, '배고프다'고 했을 때 '진짜 배고프다'고 반응한다든가, 해롤드와 저희의 마음이 더 잘 붙는 지점이 되도록 바꿨어요. 실제로 '절대 네 곁을 떠나지 않겠다'라고 말하잖아요."
"고마워 형, 그래도 난 떠나"
▲ 트릿과 필립“트릿들도 연기할 때 엄청 힘들다고 해요. 왜냐하면 급발진을 많이 해야 해서…. 진짜 (손)지윤 언니는 대기실에서 맨날 ‘나 화났다’ 하거든요. (웃음) 뒤에서 계속 ‘나는 화 나 있다. 나는 화가 나 있다’ 이렇게 계속하고, 저는 계속 ‘바깥세상에 못 나갔어. 바깥세상에 못 나갔어’ 이렇게 하는데…. (웃음) 그런데 또 그렇게 하다 보면, 그 둘이 왜 그렇게밖에 살 수 없었는지 좀 더 공감하게 돼요.” ⓒ 곽우신
해롤드는 필립에게 신발끈을 묶을 줄 몰라도 밖에 나갈 수 있도록 로퍼를 사준다. 길을 잃지 않도록 필라델피아 지도를 선물한다. 마법의 토큰만 있으면 얼마든지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도 알려준다. 직접 요리해 먹는 음식의 맛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고, 필립이 스스로 걱정하는 질병이 생각만큼 대단치 않음도 경험하게 한다. 이제 필립은 스타키스트 참치와 헬만 마요네즈 엑스트라 사이즈를 먹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변화가, 트릿은 낯설다. 필립이 성장하는 만큼, 해롤드와 교감하는 만큼, 트릿은 그만큼 필립과 멀어지는 것 같다. 자신에게 주어졌던 가장으로서의 책무를 더 이상 수행하지 않는 혹은 못 하는 게 불안하다. 스스로 세상 밖으로 나갈 줄 알게 되는 필립이 정말로 떠날 것만 같다. 해롤드는 필립을 대하듯 트릿을 대하지 않고, 그런 해롤드에게 못내 서운한 트릿은 결국 삐걱대기 시작한다.
"해롤드의 교육도 물론 무조건 좋은 방식은 아니에요. 첫째한테 너무 매몰차고, 둘째한테만 사랑을 가득 주잖아요. 저희끼리 맨날 그 이야기하거든요.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하다'라고. (웃음) 절대 트릿에게는 잘했다고 이야기 안 해주죠. 그런데 그게 해롤드도 그렇게 사랑을 주는 방식을 잘 아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 사람도 고아였으니, 엄마가 처음이고, 아빠가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해롤드의 그 마지막 긴 독백이 있잖아요? 해롤드가 어렸을 때, 창문에 기대서서 고아들이 봐야 할 것을 봤다고 하잖아요. 서로 격려해주고 어깨를 토닥여주고 응원해주는 말을 하는 걸 봤다고. 그래서 자기 친구가 '엄마, 엄마' 하고 외쳤다고요. 트릿과 필립은 어쩔 수 없이 서로 의지해서 살아가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엄마를 늘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어요. 그러니까 필립도 옷장 안에 자꾸 들어가서 엄마를 느끼려고 하는 거고, 마지막에 트릿도 필립이 없어졌을 때 결국 엄마의 코트를 꺼내서 기대잖아요. 트릿도, 필립도, 사랑과 관심과 부모의 애정을 받고 자라야 하는 아이들이지 않았을까요."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커버렸지만, 그 안은 여전히 사랑받고 싶은 아이인 트릿은 그 괴리를 스스로 견뎌내기 어려워 한다. 해롤드에게 인정받고 싶지만, 해롤드가 주는 과제들은 너무 가혹하다. 격려를 거부하는 트릿에게, 해롤드는 더 이상 자신을 따뜻하게 품어주고 응원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과 필립의 관계를 망치려는 이이다. 어쩌면 자신에게서 필립을 뺏어갈지도 모른다. 결국 어쩌지 못하고 폭발해버린 트릿은 필립에게 해서는 안 될 짓까지 해버리고 만다. 정작 그 행동이 필립을 결정적으로 돌아서게 해버리는데도.
"필립은 해롤드와 밖을 한 번 나갔다 오면서 트릿과 자신의 삶이 잘못됐다는 걸 명확하게 느껴요. 물론 트릿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걸 알죠. 그렇게밖에 하지 못한 이유가 있으니 트릿을 이해하려고도 하고, 형이 너무 불쌍하고, 마음 아프죠. 하지만 필립은 '우리 그렇게 살면 안 돼, 이제'라고 해요.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라고 하게 됐으니까요.
그러니 형이 막 밉기보다는, 그냥 불쌍해요. 저렇게 칼로 위협을 하는 모습이, 저렇게밖에 표현을 못 하는 게요. 그게 트릿의 사랑이잖아요. 하지만 아무리 뭔가를 트릿에게 이야기하려고 해도, 트릿은 그냥 못 듣고,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라고 하잖아요. 대화 방식이 완전 다른 거죠. 그리고 변한 필립을 인정하고 싶지 않고... 필립은 트릿과 어떻게든 잘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지도를 찢는 순간, 내가 제일 아끼는 걸 무참히 찢어버리는 순간 마음이 끝났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대본에 나와 있는 필립의 원래 대사는 트릿에게 '그래도 나는 떠나'만 있었대요. 앞에 '고마워, 형'이 원래는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김태형 연출께서 그 말을 넣었다고 말해줬어요. 그거 하나만으로 되게 필립과 트릿의 관계가 완전히 달라지는데, 이게 훨씬 더 좋더라고요. 역시 천재 연출 김태형?! (웃음) 비록 필립도 불공평하게 살았지만, 트릿도 불공평했죠. 트릿도 어린아이인데, 어른이 될 수밖에 없었잖아요. 필립이 그거에 대한 온전한 고마움만큼은 진짜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냥 그 말 자체로 그런 거에 대한 모든 고마움을 표현하면서도, 더 이상 형이랑은 함께 할 수 없는 마음을 잘 표현한 것 같아요."
"필립, 넌 다시는 길을 잃지 않을 거다"
▲ 서로를 향한 응원“(양)소민 언니가 긍정적인 피드백을 되게 잘 공유해줘요. 그리고 (손)지윤 언니하고도 이야기를 진짜 많이많이 나눠요. 소민 언니도 이미 옆에 (추)상미 언니의 해롤드가 있으니까 고민을 엄청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또 소민 언니는 언니 나름대로 너무 멋있지 않나요? 짜증 나요. (웃음) 저 약간, 너무 잘하는 사람들은 볼 때마다 짜증 나거든요. 그 소민 언니, 반칙 스킬도 있거든요. ‘아, 왜 저렇게 잘해’ 하게 되는…. (웃음) 지윤 언니도 진짜 너무 잘하고, 그냥 그래서 서로 되게 응원해 줘요. 서로서로 ‘어, 잘하고 있어’라고요. 제가 ‘언니, 나 이렇게 하는 거 너무 좀 그렇지 않나?’ 하면 언제나 ‘아냐, 너 필립 좋은데? 왜?’ 이렇게 서로 위안하고 응원하면서 하고 있어요.” ⓒ 곽우신
시즌을 거쳐오면서 <오펀스>가 바뀐 점이 또 있다. '여성 배우 페어'가 늘어났다는 점이다. 초연 때 남배우만의 3인극이었던 이 작품은, 재연 때 처음으로 여배우 3인이 함께하는 회차들이 생겼고, 이번 삼연에는 역할마다 남배우 둘과 여배우 둘씩 캐스팅되면서 더 다양한 조합의 페어를 관람할 수 있게 됐다.
<오펀스>를 기술적으로 엄밀한 의미의 '젠더 프리' 작품이라 하기에는 조금 애매하다. 성별 구분을 완전히 없애고 역할을 오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통상적인 의미에서 젠더의 벽을 허무는 작품인 점만은 분명하다. 같은 작품, 같은 역할을 남성 배우들끼리 표현할 때와 여성 배우들끼리 연기할 때는 분명 그 페어만의 독특한 케미스트리와 아우라가 나오게 된다.
"<오펀스>라는 작품이 가진 의미가 있잖아요? 단순히 여배우들끼리 하니까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작품의 의미에 중점을 많이 두려고 하다 보니 여성 페어의 의미도 생긴 것 같아요. 남자만 고아가 있는 게 아니잖아요? 남자만 격려받고 싶은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남자나 여자냐는 것에 집중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꼭 남자일 필요 없잖아?'가 되면서 연출과 대표께서 여성 페어를 만들었다고 해요. 이게 단순히 남성 역할을 여성 배우가 소화하는 게 아니거든요. 여성 페어가 연기할 때는 실제 그 캐릭터도 여성이라는 설정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여자 해롤드, 여자 필립, 여자 트릿이 서로를 보았을 때 느끼는 감정도 뭔가 좀 다를 수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모두 고아는 아니지만, 그냥 모든 인간은 격려받고 싶잖아요? 누구나 격려받으면서 성장하니까... 누구나 첫째이기도 하고, 둘째이기도 하고, 엄마이기도 하고, 아빠이기도 하죠. 누군가는 필립의 마음으로, 누군가는 또 트릿의 마음으로, 누군가는 해롤드의 마음으로 작품을 볼 수 있어요. 그러니까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저희 어머니도 제주도에서 올라오셔서 보고 가셨는데 감동해서 엄청나게 우셨다고 하더라고요."
배우 김주연은 그게 쉽지만은 않은 과정이었음을 고백했다. 단순히 몸을 많이 써서는 아니다. <더 헬멧>에서도 <네이처 오브 포겟팅>에서도 몸은 많이 썼다. 트릿과 필립이 크게 얽히면서 싸웠다가, 이 응어리짐을 확연하게 풀어줘야 하는데, 막상 해보니 그 감정의 해소가 명확하게 잘 드러나지 않았다. 페어별로 어떻게 소화하는지 비교해보며, 서로의 장단점을 연구한 끝에야 어떤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었다.
만으로 서른을 채운 배우 김주연도 이 작품을 통해 또 격려받고, 성장했다. 로퍼를 신고, 필라델피아 지도를 보며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된 필립처럼. 그는 이제 자신이 어떤 공간과 시간에 있는지 정확히 안다.
"(양)소민 언니가 후기들 같은 거 잘 찾아다 주는데, 보면 '쭈필립 귀엽다'밖에 없던데요?! '너무 귀여워서 안 보면 손해' 이런 거 있더라고요. (웃음) 그런데 저 귀엽기만 하기 싫은데... 진짜 멋있게 하고 싶은데, 막상 그렇게 하려면 그냥 지질해지더라고요. (웃음) 실제로 제 말투가 필립이랑 가까운 게 있어요. 필립이 작품 속에서 하는 말버릇 같은 게, 일부러 만든 게 아니라 실제로 제가 종종 쓰는 거에서 많이 따왔어요. 트릿한테 해롤드랑 밖에 나갔다 온 거 자랑할 때 말투 같은 거요. (웃음) 제가 원래도 장난꾸러기이고, 오빠들한테도 많이 덤비거든요.
사실 매번 할 때마다 '오늘은 너무 안 나갔나?' 혹은 '너무 나갔나?' 이 경계선에서 늘 고민해요. 무대 위 필립의 마음이 아무리 100%여도 연기가 그렇게 안 보일 때도 있어서, 잘 보이는 중간 지점을 찾으려고요. 김태형 연출께서 정말 아낌없이 조언을 주시고, 격려도 많이 해주신 덕분에 그때부터 확신을 갖고 할 수 있었어요. 어차피 저는 (최)수진 언니처럼은 못 해요. (웃음)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하자, 그걸 밀고 가야겠다'라고 마음먹었고, '좀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도 어쩔 수 없어, 내 방향은 이거야' 이렇게 생각하니 더 잘 보이더라고요.
2022년에는 드라마에 짧게 나온 것까지 하면 아홉 작품이나 했어요. 하지만 이제 더는 조급해하지 않고, 욕심부리지 않으려고요. 스스로 '더 천천히, 천천히' 하면서 채찍질해요. 이제는 연구도 많이 하면서 한 작품씩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저는 제가 부족한 거에 비해서 충분히 사랑받으며 행복한 세상을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미 충분히 감사해요. 그러니 제 몸 건강과 마음 건강을 잘 지켜가면서, 감사한 제 주변 사람들과 함께 좋은 것들 나누며 조급하지 않게 사는 게 2023년의 목표입니다."
▲ 김주연의 필립“모든 작품이 다 그렇기는 하지만, 진짜 <오펀스>는 해롤드와 트릿, 필립들끼리도 진짜 다 달라요. 언니와 오빠들의 필립만 해도 저와 색깔이 너무 다르거든요. 저도 ‘아, 저건 안 되겠다. 나만의 필립을 해야겠다’ 싶었거든요. 저는 장단점이 뚜렷한 배우이지만, 저만의 필립을 하고 싶었고, 그 필립을 긍정적으로 봐주실 거라는 확신이 있었죠. 진짜 그게 너무 매력 있어요. <오펀스>는 ‘어떤 인물을 연기해야 된다’를 정해놓고 쓴 작품이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오펀스>는 처음 봤을 때도 너무 매력적이지만, 다시 볼 때 그들의 이야기에 같이 더 마음을 기울여서 볼 수 있고, 그래서 더 마음 아프고, 더 행복해지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너무 영업 같으니까 따뜻한 이야기라고 할게요. (웃음) 두 번은 보러 오셔야 합니다!” ⓒ 곽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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