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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봐도 오래된 화장실에서 망신살이 뻗쳤습니다

잠금장치 때문에 119에 신고한 뒤 알게 된 세 가지

등록|2023.01.25 20:49 수정|2023.01.25 20:49
인생은 참 알 수 없다. 뼈를 묻을 것처럼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는 것도, 뒤늦게 경영대학원에 입학했지만 내가 반한 분야는 '컬러'라는 것도, 절대 벗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서울을 벗어나 대전에서 사는 것도. 어느 하나 예상하지 못했지만 모두 나에게 일어난 일이다(아! 회사는 그만두는 게 매일의 꿈이었으니까 예상했던 일이라고 해야겠지?).

누군가는 이렇게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이니까 사는게 즐겁고 재미있는 것 아니겠냐고 하지만 걱정과 불안이 많은 나는 언제나 '의외성' 보다는 '예측 가능성'을 선호하는 편이라, 최근 5년 동안 나에게 일어난 변화에 대해 주변에서는 적잖이 놀란다.

"어디에 산다고? 대전? 거길 왜 갔어? 뭘 한다고? 컬러테라피? 그게 뭔데?"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의 반응은 대체로 거의 똑같아서 '답변을 녹음해서 들고 다닐까?'라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이제 나는 스스로 자급자족해야 하는 자영업자이므로) 고객을 대하듯 아주 친절하게 최선을 다해 대답한다. 그러면 몇몇은 정말 나의 고객이 되어 주었는데, 얼마 전에도 그렇게 지인의 의뢰로 기업강의를 하게 되었다.

지인은 새해를 맞아 신년회도 할 겸 부여에서 회사 워크숍을 할 예정인데, 중간에 2시간 정도 직원들이 힐링 할 수 있는 특강을 해달라고 했다. 대부분이 남자인 데다 반도체를 다루는 사람들이라 그들에게 힐링이란 과연 어떤 것일지 감이 오진 않았지만, MBTI처럼 자신의 성격유형을 알아보는 건 대부분 좋아하니까 탄생 컬러로 알아보는 성격검사로 특강을 준비했다.

나의 지인이자 대표이사의 진지한 소개 덕분에(?) 엄숙한 분위기로 시작된 특강은 다행히 사람들의 관심도가 높아지면서 점점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스크린에 자신을 포함한 주변 인물들의 이름이 뜨고, 그 사람들의 성격 유형에 대해 설명하며 나의 조력자가 누구인지 알려주니 관심이 높을 수밖에..!!

모두가 집중해 준 덕분에 쉬는 시간도 없이 2시간 강의를 마치고 나니, 긴장이 풀리며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특강을 부탁했던 지인은 나에게 직원들과 같이 저녁식사를 하고 가라고 예의상 권했는데 그 제안을 덥석 물었고, 그렇게 그들의 신년회식 자리에 합석을 했다.

화장실에 갇혔는데 창피했다
 

화장실 문 동그란 손잡이와 고리로 된 잠금장치 ⓒ 김은성


식당은 차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직화구이 집이었다. 주택가에 있는 작은 식당은 우리 일행으로 꽉 찼고, 접시까지 씹어 먹을 것 같은 20,30대 청년 손님들의 계속된 주문에 식당 사장님은 바빠도 행복해 보였다.

길게 붙인 테이블에 다 같이 둘러 앉아 잔을 채우고, 건배를 외치는 가운데 앉아 있으니, 옛날 생각이 나며, 나도 그들과 함께 일하는 동료가 된 것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들이 예의상 건넨 말인지, 술김에 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오늘 강의가 너무 좋았다는 칭찬도 좋았고, 강사님 너무 동안이시라는 말도 기뻤다.

그래서 술이 술술 넘어 갔는데, 대표와 한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니, 자연스럽게 모든 직원들이 한 번씩 우리 테이블로 와서 술을 마시고 가는 바람에 덩달아 나의 술잔도 계속 비워지는 게 문제였다.

좌식용 식당에 정장 원피스를 입고 앉느라 무릎 위에 코트를 덮고 있었기 때문에 자리에서 한번 일어나려면 번거로운 게 이만저만이 아니라 웬만하면 화장실은 리조트로 돌아가서 가려고 했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최대한 조용히 일어나려고 했으나, 대각선 건너편에 앉은 상무님이 어딜 가냐며, 혼자 도망가면 안 된다고 큰 소리로 물으시는 바람에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됐다.

1층 식당에 있는 남녀 공용 화장실은 이미 남자들로 만원이었다. 다른 화장실을 찾으려고 2층으로 올라가니, 마침 2층 화장실이 열려 있었다. 건물이 오래 되어서 그런지 나무로 된 화장실 문은 딱 봐도 매우 낡아 보였고, 방문에나 달려 있을 법한 동그란 손잡이는 무늬일 뿐이라 불안했다.

다행히 안에서 잠글 수 있는 쇠로 된 고리가 있어서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볼일을 보고, 나가려고 하는데, 어라? 문이 안 열렸다. 고리를 들어올리는데 이 놈의 고리가 도무지 꿈쩍을 하지 않는 것이다.
 

고리식 원터치 잠금장치걸쇠 옆에 톡 튀어나온 부분을 누르면 잠금이 풀린다. ⓒ 김은성


만지면 바로 손에 녹이 묻어날 것처럼 생긴 고리는 가능한 안 만지고 싶었는데, 이제는 온 몸을 동원해서 들어올리려고 해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도구를 이용해야 하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니 대걸레가 몇 개 세워져 있었다. 대걸레 손잡이를 이용해 고리를 위쪽으로 쳐 올리면 열릴 것 같아 몇 번 시도했으나 그것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헐.. 연초부터 이게 무슨 X망신이야..!!'

화장실에 갇혀서 무서운 것보다 '직원들 회식 따라왔다가 화장실에 갇힌 강사'로 길이길이 회자되는 게 더 무서웠다.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그곳을 탈출해야 했다. 하지만 화장실 고리는 끝까지 꿈쩍하지 않았고, 결국 나는 핸드폰을 열어 119를 눌렀다.

"저.. 여기 OOO직화구이 건물 2층 화장실인데요.. 화장실 문이 안 열려요. 죄송합니다..."

혹시 위험한 상황때문에 화장실에 갇힌 건지, 건강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닌지, 나의 상태가 안전하고 양호한지 확인하는 119 대원에게 나는 너무 안전하고, 건강한데, 그냥 화장실에 갇힌 거라고 말하는 게 너무 미안하고 창피했다. 그냥 조금만 더 참을 걸, 아니, 술을 덜 마실 걸, 그냥 1층 화장실을 사용할 걸, 아니, 회식을 따라오지 말 걸 등등 온갖 후회와 자책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나의 불안증이 조금 줄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119는 빠르게 출동했고, 나는 무사히 구조(?)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화장실 문이 파손되어, 문 수리비를 지불했고, '술 마시다 갑자기 화장실에 갇힌 강사' 타이틀은 피하지 못했다.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지만 이렇게 적는 이유는 이 일을 통해 새로 알게 된 정보를 널리 공유하기 위함이다.

첫째, 고리식 잠금 장치도 원터치 방식이 있다. 다소 민망하지만 사실 화장실에서 날 구조한 건 119 구급대원이 아니었다. 119가 출동한 소리에 누군가 2층 사업장주에게 연락을 했는지 현장에 나타난 그분이 문고리 옆에 톡 튀어나온 부분을 누르면 열리는데 왜 문을 부수고 있냐고 항의하는 소리를 듣고, 내가 직접 문을 열고 나온 것이다. 이런 문고리가 원터치 방식으로 열릴 줄이야!!! 그때까지 문을 열기 위해 최선을 다하던 119대원의 허망한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다.

둘째, 화장실에 갇히면 119신고 전에 사업장주부터 찾아라. 지금 생각하면 그날 119에 바로 신고하는 게 아니라 먼저 1층 식당에 전화를 해서 물어보는 게 순서였는데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술 때문이거나 그 상황 자체가 너무 창피해서 판단력이 흐려진 탓이겠지만, 맨정신이라도 그런 경험이 처음이라면 당황해서 나처럼 119부터 찾을 것이다. 하지만 경험자로서 조언하자면 그럴 땐 119 보다는 그곳을 잘 아는 사람에게 묻는 게 우선이다.
 

▲ 차단된 번호 임시 해제 알림 ⓒ 김은성


셋째, 긴급전화가 걸린 후에는 차단한 모든 번호가 해제된다. 119에 신고를 하고 나니, 긴급구조를 위해 119에서 나의 휴대전화 위치를 조회했다는 문자가 바로 왔다. 그리고 2분 뒤 소방차량이 출동했다는 문자도 왔다. 그것도 놀라웠지만 더 놀라웠던 건 휴대폰에 뜬 알림이었다.

긴급전화가 걸린 후에는 차단된 모든 번호가 차단 해제된다는 내용이었는데, (광고전화를 받을 때마다 차단해서) 차단한 번호만 300개가 족히 넘는 나는 그게 다 해제 된다는 말에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인가 싶었는데, 나중에 다시 보니 2시간 동안만 해제되는 것이었고, 지금은 잘 차단되어 있다.

연초부터 나에게 일어난 '의외의' 사건으로 한바탕 곤욕을 치렀더니, 이제 웬만한 일은 다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 의외성에 대한 나의 불안이 조금 줄었다고나 할까?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기자의 SNS에도 실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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