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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며 산 날들에게 감사를

이안나 지음, <흔들리며 살아도 괜찮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

등록|2023.01.19 11:07 수정|2023.01.19 11:07
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2007, 랜덤하우스)


음성으로 전해지는 시어들이 활자보다 더 큰 감동을 준다. 낭송가의 희노애락이 함께 느껴져서 그런가보다. 울음을 삼키는 듯 애절한 목소리로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를 낭송하는데 듣는 사람의 마음 또한 촉촉해졌다.

누구나 마음 속에 보듬어주어야 할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가 있다. 어린 시절의 상처, 시련으로 인해 성인이 되어서도 유독 예민해지고 간혹 트라우마가 되기도 하는 어떤 부분 말이다. 시간이 지나 괜찮을 거라 생각하지만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어떤 경험들.

<흔들리며 살아도 괜찮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2020, 도서출판 진포)를 읽으면서 이안나 작가의 '내면아이'와 만났다. 여섯 살이 될 때까지 엄마 젖을 빨았고, 그 후론 하얀 돌사탕을 빨았던 아이는 사랑이 고팠던거 같다. 딸만 여섯을 낳고 그 중 둘을 앞세운 어머니는 아들 못 낳은 죄를 몸 고생으로 갚으려고 했단다.

'아들인 줄 알고 낳았는데 딸이라서? 먹고 사는 게 지독히도 힘들어서?' 작가의 어머니는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몸을 혹사시키셨을까 헤아려 보려 하지만 어렵다. 부모님이 줄 수 있는 사랑보다 너무 큰 사랑 그릇을 가지고 있던 어린 작가에게 애잔한 마음이 든다.

여고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풍요롭지 못한 시대, 남자가 더 존중받던 시대에 작가가 겪었을 마음 고생을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다. 대학 가겠다는 선언에 돌아온 엄마의 한숨과 포기, 이웃집과의 법적 다툼, '스무 살 이야기'는 너무 화가 나고 마음이 아파서 한 번에 다 읽지 못했다. "왜 여자면 안되는데?", "왜 남자만, 아들만 찾냐고?" 스무 살 작가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행복은 몸에 좋다. 하지만 마음의 힘을 길러주는 것은 슬픔이다." (마르셀 프루스트)

구구단을 못 외운다고 모질게 혼났던 아이는 그 또래의 아이들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 할머니가 되었다. 물 공포심의 근원에 자리했던 우물에 빠진 일곱 살 소녀를 알아차리고 보듬어주자 평생의 물 공포를 이겨낼 수 있었다. 여고 선생님이 되고 싶던 소녀의 꿈은 좌절되었다. 하지만 독서와 글쓰기로 숨을 쉴 수 있었고 시집과 에세이를 출간한 작가가 되었다. 글쓰기를 통해 슬픔을 알았고 위로 받았고 치유할 수 있었다.

자신감을 상실하고 좌절과 고통의 시간이 있었지만 천천히 본인의 방식으로 극복해 낸 작가에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흔들리며 산 날들에게 감사하다는 작가에게 나 또한 감사하다. 작가는 '흔들리며 살아도 괜찮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고 했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라는 걸 이미 깨달으셨을 거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아렸다. 책 속의 작은 아이가 내 안의 작은 아이가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뭐가 그렇게 힘들었어? 흔들리며 살아도 괜찮아.' 묻어 버린 줄 알았던 기억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희미하게 목소리를 내는 것 같기도 했다.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치유의 과정이 시작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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