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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동실 다진 마늘을 보고 떠오르는 한 사람

우리가 먹는 모든 것들은 누군가의 피땀어린 노동의 산물

등록|2023.01.26 08:24 수정|2023.01.26 11:22
한 달에 한 번, 친정에 다녀오는 내 손엔 늘 판판하게 펴서 얼려진 다진 마늘 두어개가 들려 있다. 다진마늘 뿐이랴. 참기름, 들기름, 쌀 등등. 명절 지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준중형차 트렁크가 택배를 가득 실은 트럭처럼 친정에서 뽑아온 살림으로 가득 찼다.

그렇게 한 달에 한 번, 나는 구석구석 친정 살림을 쏙쏙 뽑아오는 도굴꾼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얄미운 딸이다. 헐렁해진 친정 냉장고를 보며 머쓱해진 내가 "엄마,아빠 드셔"라고 한사코 거절하면 엄마는 "늘 집에 많다, 우리는 시간이 많으니 또 하면 된다"라는 말들로 딸의 마음 속 부담을 덜어주신다.
 

▲ 친정엄마가 직접 만든 다진 마늘,피땀눈물이 서렸다. ⓒ 이유미


두 아이 육아 하느라 늘 시간 부족에 허덕이는 나는, 엄마의 말에 못이기는 척 그것들을 받아 들고 온다. 우리집 냉동고에 무지개떡처럼 켜켜이 쌓인 다진 마늘을 보며 나는 집에 올라가기 전 언뜻 스쳐본 엄마의 발갛게 부르튼 손을 떠올렸다.

이번 명절엔 두 동생들 포함 우리 네 식구까지 얹혀져 엄마의 손엔 물 마를 새가 없었다. 그뿐이랴, 장남인 아버지로 인해 명절 제사 음식을 하느라 허리에 파스까지 붙이고 계실 정도로 엄마의 명절 노동은 상당했다.

다행히 팔순이 훌쩍 넘으신 할머니께서 다음 추석에는 차례를 지내지 말자라고 선언하신 바람에 엄마는 명절 차례 음식 노동으로부터 늦은 은퇴를 했다. 안타깝게도 건건이 돌아오는 제사에서는 은퇴 일이 미정이지만.

철없던 어린 시절 설날, 추석이 되면 나는 괜스레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외벌이 살림에 늘 먹을 것이 부족했던 우리 삼남매는 우리집이 큰집이라는 사실이 마냥 기쁘기만 했다. 큰집이라는 것은 즉 제사를 지내는 집이고 제사 음식도 우리 차지였으니 기름 냄새 가득한 전, 떡 등이 집 안에 한가득이었기 때문이다.

장남 며느리 타이틀을 어깨에 무겁게 얹고 손이 부르트도록 음식을 홀로 해야 했을 엄마의 짠눈물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명절 전날이 되면 3평 남짓한 좁은 부엌은 갖가지 전 재료와 생선들이 즐비했다. 장남에게 시집 온 업보로 엄마는 늘 일년에 최소 두 번 이상을 밀가루 뒤집어쓰고 온몸에 향수 대신 눅진한 기름 냄새를 밴 채 명절 음식 준비를 홀로 감내했다.

그 당시 엄마 혼자 하는 수고를 덜어주겠다며 팔을 걷어붙인 우리 삼남매에게 주어진 첫 역할은 바로, 엄마가 밑작업을 마친 전에 밀가루 묻히고 털어내기 였다. 엄마에게서 지시가 떨어지면, 우리는 뭔가 큰 도움을 주는 양 어깨가 귀에 걸린 채 코에 밀가루를 묻혀 가며 신나게 작업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에겐 그저 재미로만 느꼈기에 장난치다 밀가루를 바닥에 엎어 엄마의 가재미 눈을 여러 번 목도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런 우리의 역할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진화해갔다.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엔 꼬치에 재료 끼우기,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넘어갈 무렵엔 계란옷 입혀 직접 기름에 전을 부치는 최고 수준까지 갔다. 큰집 세 남매라는 업보로 우리는 전부치기 최전선을 경험하며 커 왔다. 하지만 우리의 역할은 엑스트라 정도의 수준이었을 뿐 모든 지휘와 감독은 엄마 차지였다.

그 이후엔 세 남매 모두가 흩어져 제 갈길을 가는 바람에 우리는 그 작은 노동에서조차 해방되었고 명절 음식은 모두 엄마의 독차지가 되었다. 해마다 맛보았던 기름냄새나는 고소한 전들은 묵묵히 홀로 행해 온 엄마의 피땀어린 노동의 산물이었으리라. 우리는 명절마다 그 음식을 입으로 밀어넣으며 애써 그 고통을 외면해 왔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예순이 넘은 엄마지만 음식 노동에서 여전히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 명절을 제하고서라도 일년에 제사 4번, 그때마다 엄마는 제사 음식을 혼자 다 차려내셨고 나는 분통을 터뜨리며 이제 음식 좀 사서 하라고 해도 "정성으로 음식해서 조상 잘 모시면 그 덕이 다 너희에게 돌아간다"라며 옅은 웃음만 지으실 뿐이다.

제사 뿐만 아니다. 작은 텃밭을 일구어 고구마, 방울토마토, 각종 채소 등을 가꾸시느라 쉴 틈이 없다. 파스를 붙여가며 고구마 몇 박스를 캐서 우리에게 꼬박꼬박 택배를 보내시고, 전화로 우리집 냉장고의 다진마늘, 고춧가루 안부를 묻는다.

딸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음에도 딸을 위한 엄마의 원격 가사 노동은 계속 된다. 정년 없이 자식들을 위해 평생 몸을 가만두지 못하는 엄마의 삶에 나를 가만히 앉혀본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서야 알았다. 지금의 내가 있게 된 건 엄마의 무수한 가사와 돌봄노동 덕분이었음을. 밥솥에 밥이 있는 것은 누군가가 쌀을 씻어 취사 버튼을 누르는 노동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며, 냉동실에 가지런히 놓인 다진 마늘도 손이 얼얼하도록 마늘을 까서 일일이 빻고 곱게 펴야 하는 고된 노동의 산물임을.

명절 아침에 먹은 떡국도 쌀을 정성스레 농사 지은 누군가의 손에서 떡집 사장님의 손으로, 또 떡국떡을 사기 위해 열심히 노동한 누군가의 손으로 옮겨와 먹을 수 있게 된 수많은 노동 집약체의 산물이었다.

우리가 먹는 모든 것들은 그렇게모두의 노동이 합작을 이루어 만든 소중한 무언가이며, 먹거리를 통해 생면부지의 누군가와도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져온다.

누군가의 손에서 나온 그 재료를 손질할 때 좀 더 정성을 기울이고, 누군가가 해준 음식을 먹을 때 그 수고로움을 떠올리며 먹어야겠다는 무언의 다짐이 마음을 깊게 흔든다.

연휴가 끝나고 이른 아침 된장찌개를 끓이느라 당연스레 꺼낸 다진 마늘을 보며 엄마의 발갛게 부르튼 손을 떠올린다. 작은 마늘 조각 하나 바닥에 떨어질까 염려하며 두 손 그러모아 조심스레 찌개로 퐁당 넣어 본다. 엄마의 피땀 어린 마늘이 찌개국물 속으로 홀연히 풀려나가 더없이 깊은 감칠맛을 낼 것이다.
덧붙이는 글 작가의 브런치 계정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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