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 '한' 짓밟은 대통령이 잃은 것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한일협정' 박정희, 그리고 윤석열의 선택
▲ 윤석열 대통령이 30일 오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23년 금융위원회 업무보고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 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정권은 노동자나 야당에는 거칠지만, 미국과 일본에는 그렇지 않다. 특히 일본에 대해서는 굴종적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식민지배문제 해결책을 갖고 오라는 기시다 후미오 내각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고 있다.
윤 정권은 국민적 거부감을 무릅쓰고 한일관계를 봉합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일 및 한미일 군사협력을 전개하고 있지만, 이것이 허망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은 박정희 정권의 사례에서도 나타난다. 동일한 목표를 추구했던 박 정권 역시 한국인들의 한을 짓밟은 그 일로 인해 한일 군사동맹을 끝내 성사시키지 못했다. 한국인들을 억누른 일이 결국 한일 군사동맹에도 부정적 작용을 했던 것이다.
1960년에 시작된 베트남전쟁이 '남북 베트남 전쟁'에서 '북베트남 대 미국 전쟁'으로 전환되는 사건도 이때 있었다. 1964년 8월 7일,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이 전쟁에 전면 개입했다. 중국 남부 하이난섬 북쪽인 통킹만에서 미군 함정들이 공격을 받았다고 발표된 통킹만 사건이 터진 뒤에 미군뿐 아니라 한국 군인들도 이 전쟁에 빨려들었다. 9월 11일에는 한국군의 제1차 파병이 있었다.
식민지배 문제 봉합한 박정희가 잃은 것
▲ (왼쪽 사진) 서민정 외교부 아시아태평양국장이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후나코시 다케히로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과 일제 강제징용 배상 관련 한일 국장급 협의를 마치고 백브리핑을 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 협의를 마치고 외교부 청사를 떠나는 후나코시 다케히로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 ⓒ 공동취재사진/권우성
이처럼 안보 이슈가 부각되는 속에서 박 정권은 거국적 저항을 진압하고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을 체결했다. 박정희는 미·일의 지원하에 자국민들을 누르며 식민지배 문제를 봉합했지만, 이로 인해 그가 잃은 것은 한둘이 아니다. 국민들의 신뢰를 잃고, 한국사에 두고두고 악당으로 기록될 소지를 만든 것 외에도 그가 잃은 것은 많았다. 방일 티켓도 그중 하나였다.
5·16 쿠데타 6개월 뒤인 1961년 11월 11일, 케네디 대통령과의 회담을 사흘 앞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도쿄를 방문해 일본인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청구권 같은 문제 신경 쓰지 마시오, 그까짓 것 없어도 그만이오"(이동원 외무장관 회고록 <대통령을 그리며>) 등의 발언으로 일본 정재계에 신선한 충격을 준 그는 13일 "안락한" 마음으로 일본을 이륙해 미국으로 날아갔다.
"박정희 장군은 미국으로 시속 6백리의 젯트기 여행 중에 아무런 부자유스러운 것 없이 안락한 여행을 할 것이다."-11월 13일자 <동아일보> 1면.
이 기사는 노스웨스트항공사가 박정희의 여행을 위해 극진한 대우를 했다며 "한국 술까지도 준비해놓았다"고 보도했다. 이렇게 한·미·일 삼각체제 구축을 위한 그의 여행은 즐거웠지만, 그는 막상 대통령이 된 뒤에는 이런 여행을 할 수 없었다.
1963년 12월 17일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는 그 뒤 죽을 때까지 일본에 가지 못했다. 한일협정 체결이 임박한 1965년 3월 24일 사토 에이사쿠 총리가 막판 독려를 목적으로 그를 초대했지만, 그는 협정 반대 시위 때문에 가지 못했다.
그 뒤에도 그의 방일은 번번이 좌절했다. 굴욕적인 한일협정 강행으로 한층 굳어진 친일 이미지 때문에 일본 가까이 가는 것조차 힘들게 됐던 것이다. 행정안전부가 운영하는 대통령기록관 홈페이지의 '기록 컬렉션' 코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의 재임 중 해외 방문은 1964년 서독, 1965년 미국, 1966년 말레이시아·태국·대만·필리핀, 1968년 미국·호주·뉴질랜드, 1969년 미국뿐이었다.
한일협정 4년 뒤인 1969년 11월 20일, <동아일보> 1면 좌상단에 정일권 국무총리가 오사카 만국박람회 기간에 일본을 방문하게 된 사실이 보도됐다. 이 여행의 원래 주인공은 정일권이 아닌 박정희였다. 박정희가 갈 수 없어 대타를 보냈던 것이다.
<동아일보>는 "당초 일본 정부는 다른 여러 나라 국가원수와 함께 박정희 대통령 내외를 초청했으나, 박 대통령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방일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정 총리 내외가 그를 대리, 일본 정부의 빈객으로 방일하게 되는 것"이라고 전했다.
한일협정 강행으로 국민적 신망을 잃은 박정희는 1969년 10월 17일 3선 개헌을 국민투표로 관철시키는 과정에서 또 한번 국민적 반발에 직면했다. 이런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의 방일은 또다시 무산됐다.
'허망한 일'임을 보여주는 박정희 정권 사례
박정희의 방일에 관한 이야기들은 그 뒤에도 있었다. 죽기 1년 전인 1978년에도 미국 방문 기회에 일본을 방문하는 구상이 추진됐다. 그해 7월 29일자 <조선일보> 1면 좌상단은 "박정희 대통령은 미 정부의 초청으로 오는 12월이나 연초 미국을 방문한 후 귀국길에 일본을 방문할 것이라고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 돈 루스씨가 28일 서울의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하여 밝혔다"라고 보도했다.
이 방일 역시 실현되지 않았다. 다른 사정들도 작용했지만, 자신을 방일을 국민들이 안 좋게 볼 것이라는 박정희의 '자기 검열' 기제가 작용한 측면도 배제할 수 없다.
한국인들의 한을 짓밟은 일로 인해 박정희는 방일 티켓뿐 아니라 '한일 및 한미일 군사동맹 티켓'도 끝내 얻지 못했다. 미국이 한일협정 체결을 부추긴 근본 목적은 한미일 군사동맹 구축이었지만, 박정희가 한국 국민들을 두려워하는 바람에 이 목표는 끝내 좌절됐다.
▲ 기시다 후미오(오른쪽) 일본 총리와 하야시 요시마사(왼쪽) 외무상이 지난 23일 도쿄에서 열린 중의원 국회에 참석할 준비를 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한일협정 체결 당시만 해도 이 목표는 실현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됐었다. 협정 체결 1개월 전에 보도된 1965년 5월 15일자 <경향신문> '박 대통령의 세 번째 방미' 기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국교 타결이 뚜렷이 된 한국과 일본을 묶어 한미일 삼각체제의 방공 협력체를 구상하고 있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나오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정국의 안정, 경제부흥 그리고 방공이라는 점에서 극동방위체제에 관한 미국의 구상에 박 대통령이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을 것이고 이를 위한 한국의 역할을 다짐할 것도 뚜렷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 뒤 박정희는 한미일 동맹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다. 그 후 거듭거듭 이 동맹에 관한 질문을 받았지만, 그는 미국과 일본이 원하는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10년 뒤인 1975년 11월 26일 있었던 박정희의 AFP통신 인터뷰를 소개한 27일자 <경향신문> 톱기사에 따르면, 그는 "3개국이 서로 긴밀한 협조만 계속하면 3각 군사동맹 이상의 실질적인 기여를 할 수 있다"라고 대답했다. 한미일 군사동맹보다 낮은 단계인 한미일 협력에 그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입장을 그렇게 합리화한 것이다.
그는 한일 및 한미일 군사동맹을 성사시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두 나라의 대외전략에서 소외되는 일까지 경험했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일 때만 해도 그를 한껏 예우했던 미국은 자국의 패색이 짙어진 뒤에는 그의 비중을 떨어트렸다. 1972년에 미국이 중국과 상하이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일본이 중국과 수교할 때, 한국은 이 흐름에서 소외됐다.
박정희는 미·일 두 후원자를 믿고 한국인들의 한을 짓밟았지만, 그 뒤 그는 일본에 갈 수조차 없게 되고 한미일 군사동맹도 끝내 성사시키지 못했다. 도리어 1970년을 전후해 미·일로부터 소외되고 1974년을 전후해서는 인권문제로 미국의 압력까지 받게 됐다. 윤석열 정권처럼 자국민들의 한을 짓밟는 방법으로 대외 군사협력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를 박정희 사례는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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