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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2월 인천 조병창에서 만들어진 총, 비극의 역사

[내돈 내산 공연관람기] 연극 <빵야>

등록|2023.02.01 13:38 수정|2023.02.01 13:38

▲ 2023년 1월 31일 캐스팅입니다. ⓒ 안정인


극장 대기 공간 바닥에는 "일제 강점기 인천 부평조병창에서 탄생, 만주로 운송된 후 4.3 사건 시기의 제주를 거쳐 한국 전쟁에 참여했던, 지금은 영화 촬영 소품으로 살고 있는" 장총의 삶을 그린 표가 그려져 있다. 무려 78년이다. 아이가 태어나 장총과 같은 여정을 거치며 78년을 살아왔다면 지금쯤 어떤 외양과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있을까. 무엇을 보고 느꼈고, 어떤 말을 들려줄까. 즐거운 기억일까? 악몽 같은 과거일까?

극장에 들어서면 정의하기 애매한 무대가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박제된 사슴 대가리가 달려 있는가 하면, 피아노가 있고, 한구석에 칠판이 놓여 있는가 하면 각종 그릇과 형형색색의 보따리도 흩어져 있는 공간이다. 가정집 거실이라기엔 정신없고 사무실이라기엔 두서가 없다. 영화 소품들을 보관하는 창고다. 장총 '빵야'는 이곳 소품실 피아노 위, 세고비아 기타 케이스 옆에 누워 있었다. 언제부터 인지 모른다. 소품 창고 할아버지가 가진 기다란 목록에도 빵야의 이름이 빠져 있었을 정도니까.

역사를 전공하고 드라마 작가가 된 나나는 '잘 나가는' 후배작가의 수상식 뒤풀이에서 공짜 술을 잔뜩 마시고 취해 있었다. 사람들은 나나를 향해 '한물간 작가'라고 수군거리며 '요즘은 뭐 하시냐'고 근황을 물었다. 근래 발표한 작품이 전혀 없다는 소리다.

그때 나나의 눈에 오래된 장총 '빵야'가 들어온다. 정신이 번쩍 든다. 저 총이면 뭔가 그럴듯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저 소재를 어떻게든 써먹을 방법이 없을까? 뭔가 신선하고 재미있는 작품이 나올 것도 같은데… 잘만 하면 반 백수 상태인 자신이 새로운 작품으로 계약을 따낼 수 있지 않을까.

나나의 욕망이 장총의 기억을 흔든다. 장총에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른다. 장총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말을 할 수가 없다. 괴롭고 아프고 힘든 과거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야아아, 날 한 번만 믿어줘." 콧소리를 내며 장총에게 애교를 부린다. 마침내 장총은 묻는다.

"내 이야기를 들려주면 내 소원을 들어줄 수 있어?"

물론이다. 작가와 장총은 손가락을 걸고 약속한다. 그런데 장총의 소원은 무엇일까.

이 연극에는 아홉 명의 배우가 출연한다. 등장인물은 몇 명쯤 될까. 대충 잡아도 20명은 넘는다. 장총 '빵야'와 작가 '나나'를 제외한 일곱 명의 배우들이 나머지 모든 배역을 해낸다. 기무라 역의 배우는 나나의 선배가 되기도 하고, 무근이 됐다가 박만근으로 나타나고 다시 이름 없는 병사가 되는 식이다. 배우들은 일본군이었다가 팔로군이 되었다가 빨치산이 되기도 하고 토벌대로 변신하기도 한다.

이 정도 되면 무대 뒤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일이 무의미하다. 아홉 명의 배우는 무대 이곳저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벌떡 일어나 자신의 역할을 소화한 뒤 어둠 속으로 돌아간다. 어쩌면 우리 조상들도 인생에서 이와 비슷한 일을 겪은 것은 아니었을까. 평범한 아이는 일제 강점기 일본군대에 끌려갔다 6.25 때에는 북쪽에서 혹은 남쪽에서 총을 들고, 제주에서는 또 어느 편으로 설 수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 한 인간이 한 가지 역할만 하고 살 수 있도록 우리 역사는 내버려 두질 않았다. 한 형제가 남 북으로 나뉘어 총을 든다는 소재는 한때 한국 영화의 단골 소재 중 하나였다.
 

▲ 연극 '빵야' 소개문 일부. ⓒ (주)엠비제트컴퍼니


1945년 2월 인천 조병창 제3공장에서 77020번째로 만들어진 아리사카 99 장총인 '빵야'는 일본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조선인을 공격하는 것으로 삶을 시작했고, 일본인이 사라진 땅에서도 남한 혹은 북한 군의 손을 옮겨 다니며 사람을 죽였다. 제주에서도 지리산에서도 마찬가지다. 비극의 역사다. 총은 사상을 가리지 않는다. 인간이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을 뿜을 수밖에 없다.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는 총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중동의 어느 나라에서, 아프리카 어느 곳에서 총은 발사되고 사람을 죽이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은하수를 끌어와 무기를 씻을 수 있을까

자신의 운명을 괴로워하는 장총 '빵야'에게 나나는 중국의 시인 두보가 지었다는 시구 한 구절을 들려준다.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하는 말 같다. 우리는 어떻게든 무기를 씻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김은성 작가가 2020년 완성했다는 이 연극은 이번에 처음 무대에 올려졌다. 현대사를 관통하는 무거운 내용만 가득할 것 같지만 의외로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 몇 년 만에 작품을 써서 방송사 편성에 한번 올려보겠다는 나나의 의지와 술, 그놈의 술 때문에 그녀와 한 배를 타게 된 제작자 대표의 좌충우돌이 웃음 포인트다. 대중 소설을 읽듯 이야기는 쉽게 술술 머릿속으로 들어오지만 대사 하나하나가 기억하고 곱씹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다.

이야기에는 나나가 대본 속에 빵야의 과거를 1회분, 1회분 녹여가는 일과 제작자를 만나고 회의하고 희망에 넘쳤다 이상하게 뒤틀리는 현재의 상황이 교차 등장한다. 빵야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의 비극적 상황에 눈물을 훔치다 나나의 현재 상황을 바라보며 낄낄 거리는 일이 반복적으로 벌어진다. 무거운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풀어가는 방법이 있다니 놀랍고 신선하다.

총은 군대와 함께 한다. 군대라면 군가가 빠질 수 없다. 배우들은 군가에 맞춰 같은 동장과 몸짓을 선보인다. 마치 뮤지컬 코러스팀의 단체 군무 같은 느낌이다. 가라앉으려는 관객의 마음에 흥이 차오른다. 군가 같은 걸로 또 이런 걸 해낸다. 능력자들.

배우들은 연신 총을 쏘고, 맞고, 쓰러지고 뒹군다. 보통 체력으로 견디기 쉽지 않을 것 같다.

빵야를 연기한 하성광 배우도 좋았지만 귀엽고 어딘가 허점 많아 보이는 나나 역의 정운선 배우는 특히 사랑스러웠다. 이 연극을 선택한 이유는 당연히 김세환 배우 때문이다. 나의 편애는 이번에도 만족스러운 시간을 돌려주었다. 하지만 이 배역들 중 가장 마음이 가는 역할은 김세환 배우가 연기한 제작자가 아니었다.

바로 '살구'였다. 누굴까? 그리고 과연 나나는 장총과의 약속을 지켰을까? 그 약속은 과연 뭐였을까? 궁금한 분들은 직접 무대를 찾아 주시길 바란다. 이 연극은 엘지아트센터 유플러스 스테이지에서 2월 26일까지 공연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개인 브런치 '지안의 브런치'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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