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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이슈인 '윤석열 신당 창당설'... 과거 사례 살펴보니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역대 대통령과 신당 창당의 역사

등록|2023.02.06 11:36 수정|2023.02.06 11:36

▲ 2021년 11월 9일, 당시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후보(오른쪽)가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신평 변호사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신 변호사와 대화하고 있다. ⓒ 남소연


국민의힘 당권 경쟁에서 유승민·나경원에 이어 안철수가 부각되자 윤석열 대통령의 신당 창당 가능성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윤석열의 '책사'로도 불리던 신평 변호사는 지난 3일 페이스북에 "아마 무난하게 김기현 의원이 윤 정부의 성공을 바라는 책임당원들의 견고한 지지를 얻어 당대표에 당선될 것"이라면서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에는 신당 창당이 추진될 수도 있다고 썼다.

그는 "경우에 따라서는 윤 대통령은 국힘당을 탈당하고 정계개편을 통한 신당 창당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릴 것"이라며 "그는 자신에 대한 심판적 의미를 갖는 총선을 자신을 간판으로 내거는 선거로 하고 싶은 강렬한 희망과 의지를 포기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썼다.

그는 <오마이뉴스>와의 5일 인터뷰에서는 "취임 첫날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대통령을 공격하고 괴롭히고 하는, 같은 여당 내에서 그런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또 얼마나 소모적인 일이겠습니까"라며 "이런 사람들을 계속 거느리고 국정운영을 해야 되느냐, 하는 그런 의문을 대통령 자신도 가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한 뒤 "윤석열 대통령께서 후보 또는 이전 시절부터 국민의힘에 과연 계속 몸을 담가야 하느냐 하는 그런 의문을 가지고 있었죠"라고 말했다.

현직 대통령과 신당 창당의 역사
 

▲ 이승만 대통령과 조병옥 내무부 장관. 1951.3.23 ⓒ 연합뉴스


현직 대통령을 앞세운 신당 창당은 역대 정권에서 자주 이슈가 돼왔다. 한국민주당(한민당)의 힘으로 일어선 이승만 정권은 1951년 12월 23일 자유당을 창당했고, 군부 쿠데타로 일어선 뒤 1963년 2월 2일 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그해 12월 제3공화국을 출범시킨 박정희 정권은 유신체제하인 1973년 3월 10일 유신정우회(유정회)를 창립해 공화당과 병립시켰다. 대통령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된 국회의원 3분의 1를 공화당이 아닌 유정회로 묶었던 것이다.

'유정회와 공화당의 2원 체제'라고 평한 그해 3월 9일자 <조선일보> 1면 '삼면경' 코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유정회는 일반 정당이 아닌 국회 교섭단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공동여당이었다. 유정회 창립과 함께 공화당은 기구가 축소되고 위상이 저하됐다. 일반적인 신당 창당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런 효과를 발휘했던 유정회 창립을 통해, 박정희는 국민과 당원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만 바라보는 국회의원들을 훨씬 많이 거느리게 됐다.

신군부 세력에 힘입어 집권한 전두환은 그해 9월 대통령에 취임한 뒤 이듬해 1월 15일 이 세력을 기반으로 민주정의당(민정당)을 창당했다. 민정당 창당은 대통령 임기 중의 창당이지만, 집권 이전부터 함께한 세력을 정치적으로 결합시키는 창당이라는 점에서 자유당 창당이나 유정회 창립과 달랐다.

민정당이 6월항쟁의 타격을 받은 이듬해인 1988년에 출범한 노태우 정권은 신군부 세력인 민정당을 중심으로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을 묶어 1990년 2월 15일 민주자유당(민자당) 창당을 완성했다. 이질적인 세력들이 결합되기는 했지만, 민자당은 민정당이라는 뿌리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민자당을 기반으로 1993년에 등장한 김영삼 정권은 민정당 출신들을 약화시키고 재야세력 등을 충원해 1995년 12월 6일 민자당을 신한국당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이 역시 민정당 뿌리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1997년에 이회창 주도로 신한국당이 한나라당으로 바뀐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 취임식을 마친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로 가고 있는 모습(출처: 국가기록원). ⓒ 국가기록원


1998년에 출범한 김대중 정권은 386세대 등을 영입해 2000년 1월 20일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했다. 그렇지만 새로운 세력이 김대중 당의 컬러를 바꾸지는 못했다. 2003년 2월에 출범한 노무현 정권은 진보세력을 더 광범위하게 결합시켜 그해 11월 11일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이 당은 새천년민주당과는 별개의 정당이었다.

2008년에 집권한 이명박 정권은 한나라당을 그대로 계승했다. 정권 말년인 2012년 2월 13일에 한나라당이 새누리당으로 개칭됐지만, 이를 주도한 것은 이명박 정권이 아니라 박근혜 진영이었다. 새누리당 역시 민정당-민자당 뿌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013년에 출범한 박근혜 정권은 새누리당을 그대로 유지하다가 촛불혁명으로 몰락했다.

2017년에 출범한 문재인 정권도 재임 중에 신당을 창당하지 않았다. 2015년 12월 28일 새정치민주연합에서 개칭된 더불어민주당 당명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명박 집권 이후로는 현직 대통령이 재임 중에 신당을 창당하는 일이 없었지만, 그 이전 역대 정권들에서는 그런 일이 반복됐다. 4·19 혁명으로 집권한 직후에 구파와 신파가 별도의 국회 교섭단체를 등록한 민주당 정권하에서도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그런 움직임이 있었다.

집권세력이 당명 개칭이나 외부세력 영입 또는 정당 흡수의 수준을 넘어 신당 창당을 성사시키는 것이 어떤 상황에서 수월한가를 살펴보려면 자유당 창당, 유정회 창립,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승만의 자유당은 보수세력이라는 점에서는 한민당과 다르지 않았지만, 지방 토착세력과 신흥 상공인들이 주축이 됐다는 점에서는 많이 달랐다. 김영모 중앙대 명예교수의 책 <한국 권력지배층 연구>에서는 "한민당의 친일 보수세력과는 그 성격이 다르고, 특히 지방에서 좌익계를 타도하는 데 기여한 지방의 친일 부르주아지들이 그 핵심"이라고 평한다. 이승만이 지방세력과 신흥 기업인들이 결집한 것이 자유당 창당의 원동력이 됐던 것이다.

박정희의 유정회는 국민 선출이 아닌 대통령 추천으로 국회의원이 된 사람들의 집단이었다. 이들은 국민과 당원이 아닌 박정희에게만 신경을 쓰는 집단이란 평가를 받았다. 이들은 1973년 총선에서는 219석 중 73석을 차지해 민주공화당과 공동으로 제1당이 됐고, 1978년 총선에서는 231석 중 77석을 차지해 공화당(68석)과 신민당(61석)을 제치고 제1당이 됐다.

박정희가 유정회를 띄운 것은 정당 정치 무력화를 위해서였다. 위의 <조선일보>는 "종전과 같은 정당 중심의 국회 운영은 지양되지 않을까 여겨진다"라고 한 뒤 "장기적으로는 여야의 개념이 모호해져 거국적 총화를 통한 국력 집약만이 부각되게 한다는 전망"이라고 소개했다.

박정희가 정치 무력화를 위해 유정회를 만들었다는 점은 1978년 12월 20일자 <동아일보> 2면 하단에서도 언급됐다. "물의를 일으킬 소지가 있는 당료를 당에서 물러나게 하는 대신 유정회에서 조용한 일을 하도록 하고, 당은 무색투명화된 가운데 유정회와 이원체제의 균형을 유지시키"는 게 박 정권의 의중이라고 기사는 말한다.

유정회는 정치 성향이나 출신성분에서는 기존 보수정당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비판 없이 무조건 따르는 보수세력이라는 점에서는 달랐다. 역사에서 흔히 나타나는 군주와 특권층의 갈등을 없애기 위해 고안된 여당이라고 할 수 있다. 국회 견제 없이 독재정치를 하고자 했던 박정희의 의도가 이곳에 투영됐던 것이다.

박정희는 1965년 한일협정 강행과 1969년 3선 개헌 강행으로 국민들의 신망을 크게 잃었다. 하지만, 3선 개헌에 뒤이은 유신 선포와 공안정국으로 집권층에서 자신을 신격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집권을 2원화하고 상호 견제시켜 자신에 대한 견제를 없애려는 시도로 이어졌던 것이다.

유정회는 새로운 정치를 이끌 역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유정회 창립 자체가 새로운 세력에 기반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력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 새로운 집권당을 만들어내고 유지했기 때문에, 이 시기 박정희의 정치는 한층 폭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과 신당 창당, 가능한 조건들 보면... '윤석열 신당'은 어떨까

노무현의 열린우리당도 이전의 정통 야당과 많이 달랐다. 이는 노무현 정권의 엘리트 충원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2005년 5월 <문학과 경계>에 게재된 정병기 서울대 대우교수의 논문 '참여정부 이후 정치적 파워엘리트의 교체와 전망'은 "노무현 정부의 엘리트 충원망은 대구사회연구소, 미래전략연구원, 한국정치연구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등과 같이 권력의 변방에 위치했던 그룹들로 짜였다"라고 설명한다.

이승만은 새로운 정치세력을 충원한 결과로, 박정희는 공포정치로 국민과 야당뿐 아니라 집권당까지 겁준 결과로, 노무현은 진보적인 세력을 한층 충원한 결과로 종전 집권당과 다른 신당 창당을 성사시켰다. 당명 개칭, 외부인사 영입, 정당 흡수를 넘어서는 신당 창당은 이런 조건들이 갖춰졌을 때 한국사에 쉽게 등장하곤 했다.

윤석열 정권은 국민의힘을 배경으로 집권했다. 검찰 출신들이 가담하기는 했지만, 대선을 이끈 것은 기존의 보수정당이다. 검찰 출신들이 대선 뒤에 대통령실과 행정부에 배치되기는 했어도, 이들이 국민의힘을 '장악'했다고 볼 수는 없다.

윤석열과 함께 새로운 길을 걸을 정치세력은 아직 뚜렷이 부상하지 않았다. 윤 정권이 새로운 주역들을 정치권 외부에서 충원할 힘이 있다는 것도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 만약 새로운 세력이 충원되지 않은 상황에서 신당을 창당하고 이를 유지하고자 하게 된다면, 유신체재 때와 비슷한 장면이 연출되지 않으리라 단정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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