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낭만 가득했던 소래포구의 기막힌 변천사
어시장으로 번성한 포구는 붐볐으나... 시간의 흔적이 역력
오랜 시간 삶의 ‘흔적’이 쌓인 작은 공간조직이 인접한 그것과 섞이면서 골목과 마을이 되고, 이들이 모이고 쌓여 도시 공동체가 된다. 수려하고 과시적인 곳보다는, 삶이 꿈틀거리는 골목이 더 아름답다 믿는다. 이런 흔적이 많은 도시를 더 좋아한다. 우리 도시 곳곳에 남겨진 삶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다. 그곳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기쁘게 만나보려 한다. [기자말]
▲ 소래포구도심 한 켠이 되어버린 소래포구. 깊은 갯골이 만들어낸 천혜의 피항이다. 사진 가운데 멀리 삼각형 모양의 산이 소래산이다. ⓒ 이영천
골 깊은 포구는 모든 걸 받아안는다. 포구는 떠남이자 돌아옴이니 안락한 둥우리라 할만하다. 포구 밖은 갯벌이다. 얕은 간석지가 소금밭이 되었어도 탓하지 않았다. 오만한 인간이 바다를 메워 해안선이 곧아졌어도 의젓했다. 바닷물은 여전히 그 땅 밑을 흐를 것이기 때문이다. 높다란 아파트 숲이 갯골 양편에 늘어섰으니, 그 바람에 포구는 바다에 뜬 연꽃처럼 갇히고 말았다.
▲ 소래철교1937년 단선의 ‘수인선 협궤철도’가 놓이면서 소래포구 갯골을 가로지르는 소래철교가 탄생한다. 지금은 보행교량으로 사용 중이다. ⓒ 인천시청
뼈대만 남은 단선철도 수인선 침목을 밟고 갯골을 건너며, 빠지지 않으려 전전긍긍하던 기억이 흑백사진으로 남아 있다. 시흥과 인천을 가르는 경계다. 골이 깊은 만큼 물살도 세어 무동력어선이 물때에 맞춰 드나들곤 했다.
들쭉날쭉하던 해안선은 너른 갯벌을 품었고, 수많은 생명은 갯벌을 둥지 삼았다. 포구에 삶을 기댄 어민들은 그만큼 풍성했다. 어시장으로 번성한 포구는 그래서 늘 붐볐다. 새우며 게, 바닷고기는 백성들 밥상에 기꺼이 올라 맛을 뽐냈다.
짠물은 '바닷가 출신이나 바닷가에 사는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이다. 의미를 알고 쓰는지 모르겠으되, 흔히 인천 사람을 '짠물'이라 부르는 데에도 이런 놀림이 숨겨져 있다. 맹물보다 야무지고 근성이 강하다는 긍정보다 대체로 인심이 야박하고 인색하다는 부정이 녹아들어 있음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 1900년대 초 주안 소금밭1907년 천일제염 성공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소금밭이 되었다. 주안 소금밭의 영향으로, 일제시대 인천 해안가 간석지가 모두 소금밭으로 변한다. ⓒ 인천시청
인천을 왜 이렇게 부르게 되었을까. 소금밭 때문이다. 지금은 도시와 산업단지로 변모한 곳곳이 소금밭이었다. 1907년, 천혜의 간석지 주안에 1정보(약 3천 평)로 천일제염이 시도된다. 토판염이다. 그전까지는 바닷물을 가마솥에 끓여 소금을 얻었기에, 수요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소금값이 비싼 이유 중 하나다. 천일제염은 대량생산이 가능한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실험은 대성공을 거둔다.
일제가 서해안 소금에 눈독을 들인다. 미네랄이 풍부하여 품질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일제는 대한제국에 차관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주안 소금밭을 넓혀간다. 1정보가 2년 후 88정보가 되더니 212정보까지 넓혀진다. 지금의 북항에서 갯골 따라 십정동까지 이어진 양쪽 넓은 산업단지가 모두 소금밭이었다.
1921년 지금의 남동공단 자리엔 300정보가, 군자 소금밭은 1925년 575정보로 시작해 603정보까지 넓혀진다. 당시 전국 천일염 생산량의 21%를 이 3곳 소금밭에서 생산해낼 정도였다. 소래포구가 품고 있던 간석지에도 소금밭이 만들어진다.
▲ 소래 소금밭'소래습지 생태공원'에 남겨진 소래 소금밭의 일부. 멀리 빨간 지붕의 소금창고가 보인다. ⓒ 이영천
1930년대 전쟁광이 되어가던 일제는 소금이 대량으로 필요해진다. 순수결정 염화나트륨(NaCl)은 화약 제조에 빠질 수 없는 기초품목이었기 때문이다. 대량 수탈구조를 만들어나간다. 용현동과 숭의동 등 비어 있는 간석지가 소금밭으로 변한다. 인천의 모든 해안가가 소금밭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금밭 노동은 고되다. 수많은 조선인이 노동력을 착취당한다.
이렇듯 번창한 소금밭이 인천을 대표하는 수탈 품목이었다. 인천 짠물은 이런 배경에서 만들어진 속어다. 따라서 놀림이나 비아냥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위로받아야 하고 아픔으로 기억해야 하는 말이다. 소금 없이 살아갈 수 없듯 말이다.
철도와 화약공장
돈에 눈먼 일본 사설 철도회사가 1937년 '수인선 협궤철도'를 만든다. 목적은 소금 수탈이었다. 소래역이 생긴다.
▲ 수인선 협궤열차(1970)월곶에서 소래 쪽으로 향하는 협궤열차. 사진 왼쪽 나즈막한 산이 '장도 포대' 터다. ⓒ 인천시청
이 철도가 1942년 국영으로 귀속된다. 해방 후 수원역과 남인천역을 잇던 이 철도는 1988년 서울지하철 4호선 안산선 개통 이후 구간이 단축되고, 1995년 운행 중지되었다가 2015년 폐선된다. 대신 2020년 수도권 광역전철인 수인·분당선이 생겨나 소래포구 접근성이 다시 수월해진다.
중일전쟁 중이던 1941년 소래 소금밭과 남동 소금밭 가까운 곳에 일제가 화약공장인 '조선유지화약공판'을 설립한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 공장이 1955년 '한국화약'에 인수된 일도 소금 때문이다. 간석지 소금밭도 이 회사가 주인이다. 소금 효용이 낮아지자 공장 터와 소금밭이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바뀐다. 소래포구 갯골에 잇닿은 인천 쪽 소금밭 터에 이 회사가 지은 아파트 일색인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공단과 도시로 변모한 시흥 배곧과 정왕동 광활한 땅 주인도 이 회사였다.
▲ 비깥 갯골두 철로가 갯골을 가로지르고, 멀리 갯골 양편 소금밭 자리이던 곳에 아파트가 들어 서 있다. ⓒ 이영천
천혜의 갯벌이 소금밭이었다가 도시로 변모하게 만든 주인공은, 화약 만들 때 사용된 소금이다. 죽이려는 파괴물질을 채취하던 공간에 버젓이 삶의 뿌리를 내린 인간. 웃지 못할 희극이다. 갯벌을 막아 단조로운 해안선으로 바꿔버린 욕망이 빚어낸 아이러니다. 소래포구를 이루는 물길이 낸 드넓은 소금밭은 간석지이자 습지로 생태환경 가치가 뛰어나다. 하지만 이 터도 언제건 도시로 변모할 꿈(?)에 부풀어 있다.
애환의 어시장
포구는 땅과 바다를 잇는 가장자리(edge)이자 결절점(node)이다. 따라서 늘 붐빈다. 사람 모이는 곳에 시장이 들어서는 건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1930년대 젓갈로 시작된 소래포구 어시장이 1970년대 중반부터 성시를 맞는다. 발달한 교통과 도시 확산의 영향이다.
▲ 소래포구 어시장2021년 현대화 사업으로 마련된 소래포구 어시장. 2017년 화재 후 4년 만에 자리 잡았다. ⓒ 이영천
배가 드나드는 개 어귀 공지에 상인들이 자리한다. 하지만 국공유지 무단 점유였고, 건물도 허가받지 않은 가설물에 불과했다. 전선은 난마로 얽혀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러함에도 치열한 삶의 터전이었으며, 1989년부터 임대료도 내고 있었다. 2010년대 1~2평 남짓 좌판이 수천~1억에 매매되었고 재임대도 성행했다.
2010년을 시작으로 3~4년 주기로 큰불이 나기 시작한다. 가난한 상인들 삶의 터전이 그때마다 지워져 나갔다. 대책을 마련하고 자율소방대 등을 구성해 보지만, 근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2017년 3월 화재는 어시장 상인을 절망으로 빠뜨린 결정타였다. 수백여 점포가 사라져 버렸다. 수십 년 삶의 터전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허가받지 못한 가설물은 화재보험에도 가입할 수 없었다. 모든 희망이 검은 재 속에 묻혀 버렸다.
삶의 터전을 잃은 어시장 상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다소 여유가 있는 상인은 인근 상가 등을 임대해 횟집을 운영했지만, 그렇지 못한 상인은 포구 근처에 노점을 깔았다. 그마저 여의치 못한 상인은 다른 횟집에서 품을 팔거나, 근근이 버텨야 했다.
▲ 어시장 내부새로 마련된 소래포구 어시장 내부. 질박한 삶이 이어지는 현장이다. ⓒ 이영천
상가 신축이 타결되기까지 갈등의 골도 깊었다. 구청과 '소래포구 현대화사업' 실시협약 체결까지 꼬박 2년이 걸린다. 새 상가가 마련되기까지 만 4년 고단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배가 드나드는 개 어귀에 새로운 어시장이 들어섰다. 국공유지 위에 상인이 건물을 지어 기부채납 했다. 상인은 기부채납액에 상응하는 임대 자격을 얻었다. 재임대 등이 철저히 규제되고, 산지와 가격에 대한 자율정화 노력도 기울인다.
추억하는 포구
낭만이 가득하던 포구가 갇혔다. 고속도로와 전철이 갯골 남북을 가로지르고, 뒷면은 아파트 숲이다. 전철역 주변은 포구와 전혀 다르게 변했다. 갯골 맞은편 월곶도 도시화하였다. 그나마 옛 정취를 품고 있는 건 개 어귀와 갯골뿐이다. 그런데 많이 늙어 보인다. 퇴적된 시간의 흔적이 역력하다.
인천내항이 준공(1974)되자 새우잡이 어선들이 정박할 포구를 잃고 소래로 찾아든다. 포구는 어선 안식처였다. 새우잡이 배들이 옮겨 오면서 새우 파시가 성시를 이룬다. 여기에 수인선 협궤열차가 어우러져 수도권을 대표하는 낭만적인 포구로 이름을 떨친다. 1980년대부터 주말이면 그야말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어시장에서 떠온 회로 장도 포대 터에서 추억에 잠긴다. 소래철교며 시끌벅적하던 포구 정취가 맑은 소주잔에 넘실거린다. 아려한 젊음이 추억으로 소환된다. 고단하고 팍팍한 삶이었을망정 깊은 속정이 있었노라 회상한다.
▲ 소래포구개 어귀에 일을 마친 어선이 정박 중이다. 포구는 거친 바다를 누비는 어선의 포근한 안식처다. ⓒ 이영천
개 어귀 깊은 갯골엔 바다를 누비는 어선들이 정박해 있다. 갯벌을 노니는 게도 여전하고 갈매기도 마냥 바삐 난다. 포구는 변함없건만, 아련한 정취와 낭만은 가버린 사랑처럼 온데간데없다. 낭만을 추억할 수 있다는 건 어쩌면 장소가 가진 커다란 행운인지 모른다. 그것이 살아있는 한, 포구는 마침내 가없는 바다를 품어낼 것이다. 질박한 포구의 삶 또한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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