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적인 S자형 고갯길을 지나.... 변강쇠를 다시 보게 되는 곳
[지리산 고갯길 역사 문화 기행] 판소리 변강쇠가의 배경지, 함양 오도재
경남 함양군 함양읍 구룡리에서 마천면 구양리까지, 12.1km의 구절양장 지리산 가는 길에 지안재(蹄閑峙, 370m)와 오도재(悟道嶺, 773m)를 넘는다. 제한역(蹄閑驛)이 있었던 함양읍 구룡리 조동마을 삼거리에서 지안재, 오도재(지리산제일문)와 지리산조망공원을 지나 마천면에 이르는 도로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구룡리 삼거리에서 지리산 방향으로 1.5km 나아가면 도로가 여섯 번 방향을 바꾸면서 비탈길 마루에 오르는데, 이때 S자를 3번 이어놓은 구불구불한 형태의 지안재가 나온다. 이 고갯마루 전망대에서 사진을 찍으면 구절양장 도로는 곡선미 수려한 풍경으로 담긴다. 야간에는 도로를 따라 내려가는 차량의 불빛 곡선 궤적이 생생한 설치미술 작품이 된다.
이 고갯마루로 이어지는 굽이진 S자 구간은 가로 폭이 70m 정도이고, 3회 반복하며 올라오는 전체 세로 길이는 300m 정도다. 그러나 이 고갯마루 공원에서 찍은 사진에는 경사가 상당한 오르막 도로의 착시현상으로 인해 세로 길이가 압축되면서 S자 구간의 가로 폭과 긴 오르막 세로 길이가 비슷하게 보인다.
지안재와 오도재는 남해안의 소금과 해산물이 전라도 광양이나 경상도 하동에 모여서 지리산 주능선을 넘어 지리산 북쪽 지역과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가 이웃하는 내륙으로 운송되는 중요한 통로였다. 내륙 깊은 곳의 콩과 여러 가지 곡식이 이들 고개와 지리산을 넘어 교역되면서 지리산의 염두고도(鹽豆古道)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주요 도로에 설치한 역참들은 12km 간격이 기본이었다. 그런데 함양의 사근내역에서 4km 거리의 지점에 제한역이 있었다. 이곳이 지리산을 넘어서 물산의 왕래가 많아 추가로 제한역을 두어 통행하는 사람, 말과 교역 물품을 살핀 듯하다.
제한역과 가까운 지안재의 원래 이름은 제한재인 것으로 보인다. '제한'이란 발음이 '제안'과 '지안'으로 변했을 것이다. 지역 방언에서 모음 사이 'ㅎ탈락'과 'ㅔ의 ㅣ로 변화'는 드물지 않은 현상이다. 험하고 먼 산길을 다니면서 발음하기 힘든 고개 이름이 부르기 쉽고 편하게 바뀐 것으로 보인다.
오도재에 얽힌 두 가지 이야기
지안재에서 지리산 방향으로 3.8km 나아가면 오도재 고갯마루에 지리산제일문(智異山第一門)의 성루(城樓)가 관문처럼 서 있다. 성루는 1층은 성곽의 길이 38.7m, 높이 8m, 너비 7.7m이고 2층에 단정한 누각이 있는 제법 큰 규모로, 왕복 2차선 도로가 두 개의 성문을 통과한다. 오도재는 연비지맥의 산줄기인 삼봉산(1187m)에서 법화산(991m)으로 이어지는 안부로 삼봉산으로 향하는 등산객이 이 고갯마루에서 출발한다.
오도재에는 스님들이 이 고개를 넘으며 도를 깨우쳤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오도재 전설의 주인공을 청매 인오(靑梅 印悟, 1548-1623) 선사라고 한다. 그러나 오도재라는 지명이 더 오래되었기에, 고려 시대의 보조 지눌(普照 知訥, 1158-1210) 국사의 '오도견성(悟道見性)'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오도재는 판소리 변강쇠가(가루지기타령)의 배경지로 의미 있다. 조선 시대 후기에 유랑민이었던 변강쇠와 옹녀가 지리산의 품인 오도재 인근에 정착하였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변강쇠가에 나오는 지명인 등구마천 가는 길은 오도재 길과 일치한다. 변강쇠는 옹녀가 나무를 해오라고 하자 산에서 등구마천의 나무꾼들과 어울려 놀다가 저물녘에 나무 장승을 뽑아간다.
이 때에 둥구마천 백모촌에
여러 초군 아이들이 나무하러 몰려 와서 지게 목발 뚜드리며
방아타령, 산타령에 농부가(農夫歌), 목동가(牧童歌)로 장난을 하는구나.
(중략)
사면을 둘러보니 둥구마천 가는 길에
어떠한 장승 하나 산중에 서 있거늘 강쇠가 반겨하여,
벌목정정(伐木丁丁) 애 안 쓰고 좋은 나무 저기 있다.
일모도궁(日暮途窮) 이내 신세 불로이득(不勞而得) 좋을씨고.
동리 신재효(申在孝, 1812-1884)는 춘향가, 심청가, 홍보가, 수궁가, 적벽가와 변강쇠가(변강쇠타령)의 판소리 6마당을 정리하였다. 변강쇠타령은 가루지기타령, 횡부가(橫負歌), 송장가, 변강쇠전이라고도 한다.
변강쇠가는 온달설화와 같은 상여부착설화(喪輿附着說話), 아홉 번 결혼한 여자의 이야기인 구부총설화(九夫塚說話), 장승 동티의 민속적 금기(禁忌)와 시체를 가로지는 관습적 사실 등이 결합하여 형성된 것이다. 가루지기는 옛날에 평민이나 천민이 상여 없이 시신을 거적에 말아 지게에 지고 산으로 가서 묻었던 치상(治喪) 방식이었다.
잡놈이라 배척받는 부평초 같은 변강쇠는 남쪽 지방의 유랑민이고 과부 운명을 팔자로 타고나서 마을에서 쫓겨난 옹녀는 북쪽 지방의 유랑민으로 볼 수 있다.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어도 유랑할 수밖에 없다. 옹녀는 살아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는데, 변강쇠는 옹녀가 모아놓은 작은 재물까지 다 탕진한다.
결국 이 부부는 유랑 생활을 그만두고 지리산에 머물게 된다. 변강쇠가 나무하러 가서 장승을 빼어 오고 장승을 패서 장작을 만들어 아궁이에 군불로 땐다. 변강쇠는 자다가 장승 동티로 장승처럼 선 채로 죽는다. 여기까지가 작품의 전반부 1/3 분량의 내용이다.
작품의 후반부 2/3의 분량은 옹녀가 변강쇠의 초상을 치르는 과정이다. 옹녀는 초상을 치러 주는 남자와 같이 살겠다며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초상을 치르러 온 유랑민 남자들도 차례로 변강쇠의 시체에 붙어서 죽는다. 이윽고 굿판이 벌어지고 시체들이 분리되며 초상을 치르게 된다. 시체들의 초상을 치른 한양의 재상댁(宰相宅) 마종(馬從)인 뎁득은 옹녀 곁을 떠난다.
옹녀는 유랑민의 처지로 어떻게든 정착하여 살아보려는 백성이었다. 지리산은 사회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백성들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생명의 땅이었다. 변강쇠전의 중심 테마는 외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에서 일부 나타난 음담패설은 변강쇠와 옹녀의 원초적 본능을 해학과 골계로 표현한 문학적 장치라고 볼 수 있다.
변강쇠가는 조선 시대 후기 유랑민들의 비극적 생활상을 희극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변강쇠가 장작으로 패서 불 땐 장승은 봉건 시대의 윤리와 사회 질서를 상징할 수 있다. 장승처럼 서서 죽은 변강쇠의 시체는 어쩌면 우뚝 서서 사람 사는 세상을 염원하는 새로운 장승이 아닐까?
변강쇠에 대한 재해석을 바라며
오도재에서 1km쯤 내리막 도로를 서행하면 지리산조망공원이다. 지리산의 주봉인 천왕봉과 그 동쪽으로 하봉과 중봉, 서쪽으로 장터목 고갯길, 세석평원, 벽소령 고갯길과 반야봉까지 45km의 장엄한 지리산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와 감동이 물결처럼 다가온다. 천왕봉까지 직선거리 10km이고 반야봉까지는 15km인 이 장소에서 지리산의 주능선을 여유롭게 조망할 수 있으니 이 공원은 지리산 조망의 명소로 충분하다.
지리산 가는 길의 오도재 조망공원에서 지리산의 주능선을 오래오래 바라본다. 지리산의 남쪽과 북쪽에 삶의 터전을 두고 팍팍한 다리와 무거운 등짐으로 가파른 고개를 넘으며 지리산의 품에서 짐승처럼 웅크리고 잠을 잤을 백성들의 녹록지 않았던 삶의 현장이 지리산 주능선의 하늘에 맞닿아 있다.
고개를 넘으며 진리를 깨달았다는 오도(悟道)의 전설보다는 유랑민으로 능력이 없어 시대를 극복하지 못하고 실패한 백성인 변강쇠의 판소리 이야기가 더 진솔하게 마음에 닿는다.
남원시는 변강쇠가 남원 산내면에 살다가 함양 마천면으로 갔다며 남원 산내면이 변강쇠가의 무대라며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에 변강쇠 백장공원을 마련했다. 함양군은 오도재 인근이 변강쇠의 활동 무대라며 함양군 오도재 고개에 변강쇠 집터, 무덤 자리와 장승 공원을 조성했다.
그러나 변강쇠와 옹녀를 소재로 한 공원에는 음란한 이미지의 조각상과 혐오스러운 장승이 대부분이다. 변강쇠가보다 음란한 대사가 많은 민속극이 현재 전승되고 있다. 변강쇠가에 씌워진 부정적이고 혐오스러운 평가는 걷혀지기를 희망한다. 변강쇠와 옹녀는 어려운 시대에 수탈당하고 핍박받으면서 살아간 백성들로 우리의 조상이었다. 변강쇠와 옹녀를 건강한 에너지와 밝은 캐릭터로 새롭게 이해하면 좋겠다.
지리산 주능선의 북쪽 산록에는 심원계곡, 뱀사골계곡, 한신계곡과 백무동계곡 등에서 수많은 작은 물길이 흘러내려 운봉고원에서 흘러온 람천에 합류한다. 지리산 45km 주능선의 계곡마다 흘러서 여울이 되고 강을 이루는 물소리를 마음으로 들어본다.
오도재 고갯길을 내려오면 함양 마천이고 람천을 4km 거슬러 올라가면 실상사에 도착한다. 람천을 건너가는 해탈교에서 지리산 천왕봉이 선명하게 보인다. 람천의 여울 물소리가 햇빛에 반짝인다. 해탈교를 지키는 석장승에서 오도재의 전설과 변강쇠의 모습을 함께 찾아본다.
지리산 산기슭의 소나무 아래에서 춘란이 낙엽을 덮고 겨울을 이겨낸 생명력으로 푸르다. 지리산 가는 길에서 지안재와 오도재를 둘러본 2월 중순의 여정을 정리하며, 생명력 넘치는 지리산의 문화 자산은 이해와 포용이며 공존이라고 생각한다.
구룡리 삼거리에서 지리산 방향으로 1.5km 나아가면 도로가 여섯 번 방향을 바꾸면서 비탈길 마루에 오르는데, 이때 S자를 3번 이어놓은 구불구불한 형태의 지안재가 나온다. 이 고갯마루 전망대에서 사진을 찍으면 구절양장 도로는 곡선미 수려한 풍경으로 담긴다. 야간에는 도로를 따라 내려가는 차량의 불빛 곡선 궤적이 생생한 설치미술 작품이 된다.
▲ 지안재 S자형 고갯길. 야간에는 도로를 따라 내려가는 차량의 불빛 곡선 궤적이 생생한 설치미술 작품이 된다. ⓒ 이완우
이 고갯마루로 이어지는 굽이진 S자 구간은 가로 폭이 70m 정도이고, 3회 반복하며 올라오는 전체 세로 길이는 300m 정도다. 그러나 이 고갯마루 공원에서 찍은 사진에는 경사가 상당한 오르막 도로의 착시현상으로 인해 세로 길이가 압축되면서 S자 구간의 가로 폭과 긴 오르막 세로 길이가 비슷하게 보인다.
조선 시대에 주요 도로에 설치한 역참들은 12km 간격이 기본이었다. 그런데 함양의 사근내역에서 4km 거리의 지점에 제한역이 있었다. 이곳이 지리산을 넘어서 물산의 왕래가 많아 추가로 제한역을 두어 통행하는 사람, 말과 교역 물품을 살핀 듯하다.
제한역과 가까운 지안재의 원래 이름은 제한재인 것으로 보인다. '제한'이란 발음이 '제안'과 '지안'으로 변했을 것이다. 지역 방언에서 모음 사이 'ㅎ탈락'과 'ㅔ의 ㅣ로 변화'는 드물지 않은 현상이다. 험하고 먼 산길을 다니면서 발음하기 힘든 고개 이름이 부르기 쉽고 편하게 바뀐 것으로 보인다.
오도재에 얽힌 두 가지 이야기
▲ 오도재 고갯마루. 오도재 고갯마루에 지리산제일문(智異山第一門)의 성루(城樓)가 관문처럼 지키고 있다. ⓒ 이완우
지안재에서 지리산 방향으로 3.8km 나아가면 오도재 고갯마루에 지리산제일문(智異山第一門)의 성루(城樓)가 관문처럼 서 있다. 성루는 1층은 성곽의 길이 38.7m, 높이 8m, 너비 7.7m이고 2층에 단정한 누각이 있는 제법 큰 규모로, 왕복 2차선 도로가 두 개의 성문을 통과한다. 오도재는 연비지맥의 산줄기인 삼봉산(1187m)에서 법화산(991m)으로 이어지는 안부로 삼봉산으로 향하는 등산객이 이 고갯마루에서 출발한다.
오도재에는 스님들이 이 고개를 넘으며 도를 깨우쳤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오도재 전설의 주인공을 청매 인오(靑梅 印悟, 1548-1623) 선사라고 한다. 그러나 오도재라는 지명이 더 오래되었기에, 고려 시대의 보조 지눌(普照 知訥, 1158-1210) 국사의 '오도견성(悟道見性)'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오도재는 판소리 변강쇠가(가루지기타령)의 배경지로 의미 있다. 조선 시대 후기에 유랑민이었던 변강쇠와 옹녀가 지리산의 품인 오도재 인근에 정착하였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변강쇠가에 나오는 지명인 등구마천 가는 길은 오도재 길과 일치한다. 변강쇠는 옹녀가 나무를 해오라고 하자 산에서 등구마천의 나무꾼들과 어울려 놀다가 저물녘에 나무 장승을 뽑아간다.
이 때에 둥구마천 백모촌에
여러 초군 아이들이 나무하러 몰려 와서 지게 목발 뚜드리며
방아타령, 산타령에 농부가(農夫歌), 목동가(牧童歌)로 장난을 하는구나.
(중략)
사면을 둘러보니 둥구마천 가는 길에
어떠한 장승 하나 산중에 서 있거늘 강쇠가 반겨하여,
벌목정정(伐木丁丁) 애 안 쓰고 좋은 나무 저기 있다.
일모도궁(日暮途窮) 이내 신세 불로이득(不勞而得) 좋을씨고.
동리 신재효(申在孝, 1812-1884)는 춘향가, 심청가, 홍보가, 수궁가, 적벽가와 변강쇠가(변강쇠타령)의 판소리 6마당을 정리하였다. 변강쇠타령은 가루지기타령, 횡부가(橫負歌), 송장가, 변강쇠전이라고도 한다.
변강쇠가는 온달설화와 같은 상여부착설화(喪輿附着說話), 아홉 번 결혼한 여자의 이야기인 구부총설화(九夫塚說話), 장승 동티의 민속적 금기(禁忌)와 시체를 가로지는 관습적 사실 등이 결합하여 형성된 것이다. 가루지기는 옛날에 평민이나 천민이 상여 없이 시신을 거적에 말아 지게에 지고 산으로 가서 묻었던 치상(治喪) 방식이었다.
잡놈이라 배척받는 부평초 같은 변강쇠는 남쪽 지방의 유랑민이고 과부 운명을 팔자로 타고나서 마을에서 쫓겨난 옹녀는 북쪽 지방의 유랑민으로 볼 수 있다.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어도 유랑할 수밖에 없다. 옹녀는 살아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는데, 변강쇠는 옹녀가 모아놓은 작은 재물까지 다 탕진한다.
결국 이 부부는 유랑 생활을 그만두고 지리산에 머물게 된다. 변강쇠가 나무하러 가서 장승을 빼어 오고 장승을 패서 장작을 만들어 아궁이에 군불로 땐다. 변강쇠는 자다가 장승 동티로 장승처럼 선 채로 죽는다. 여기까지가 작품의 전반부 1/3 분량의 내용이다.
작품의 후반부 2/3의 분량은 옹녀가 변강쇠의 초상을 치르는 과정이다. 옹녀는 초상을 치러 주는 남자와 같이 살겠다며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초상을 치르러 온 유랑민 남자들도 차례로 변강쇠의 시체에 붙어서 죽는다. 이윽고 굿판이 벌어지고 시체들이 분리되며 초상을 치르게 된다. 시체들의 초상을 치른 한양의 재상댁(宰相宅) 마종(馬從)인 뎁득은 옹녀 곁을 떠난다.
옹녀는 유랑민의 처지로 어떻게든 정착하여 살아보려는 백성이었다. 지리산은 사회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백성들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생명의 땅이었다. 변강쇠전의 중심 테마는 외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에서 일부 나타난 음담패설은 변강쇠와 옹녀의 원초적 본능을 해학과 골계로 표현한 문학적 장치라고 볼 수 있다.
변강쇠가는 조선 시대 후기 유랑민들의 비극적 생활상을 희극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변강쇠가 장작으로 패서 불 땐 장승은 봉건 시대의 윤리와 사회 질서를 상징할 수 있다. 장승처럼 서서 죽은 변강쇠의 시체는 어쩌면 우뚝 서서 사람 사는 세상을 염원하는 새로운 장승이 아닐까?
변강쇠에 대한 재해석을 바라며
▲ 지리산 주능선. 45km의 장엄한 지리산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와 감동이 물결처럼 다가온다. ⓒ 이완우
오도재에서 1km쯤 내리막 도로를 서행하면 지리산조망공원이다. 지리산의 주봉인 천왕봉과 그 동쪽으로 하봉과 중봉, 서쪽으로 장터목 고갯길, 세석평원, 벽소령 고갯길과 반야봉까지 45km의 장엄한 지리산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와 감동이 물결처럼 다가온다. 천왕봉까지 직선거리 10km이고 반야봉까지는 15km인 이 장소에서 지리산의 주능선을 여유롭게 조망할 수 있으니 이 공원은 지리산 조망의 명소로 충분하다.
지리산 가는 길의 오도재 조망공원에서 지리산의 주능선을 오래오래 바라본다. 지리산의 남쪽과 북쪽에 삶의 터전을 두고 팍팍한 다리와 무거운 등짐으로 가파른 고개를 넘으며 지리산의 품에서 짐승처럼 웅크리고 잠을 잤을 백성들의 녹록지 않았던 삶의 현장이 지리산 주능선의 하늘에 맞닿아 있다.
고개를 넘으며 진리를 깨달았다는 오도(悟道)의 전설보다는 유랑민으로 능력이 없어 시대를 극복하지 못하고 실패한 백성인 변강쇠의 판소리 이야기가 더 진솔하게 마음에 닿는다.
남원시는 변강쇠가 남원 산내면에 살다가 함양 마천면으로 갔다며 남원 산내면이 변강쇠가의 무대라며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에 변강쇠 백장공원을 마련했다. 함양군은 오도재 인근이 변강쇠의 활동 무대라며 함양군 오도재 고개에 변강쇠 집터, 무덤 자리와 장승 공원을 조성했다.
▲ 실상사 석장승. 해탈교를 지키는 석장승에서 오도재의 전설과 변강쇠의 모습을 함께 찾아본다. ⓒ 이완우
그러나 변강쇠와 옹녀를 소재로 한 공원에는 음란한 이미지의 조각상과 혐오스러운 장승이 대부분이다. 변강쇠가보다 음란한 대사가 많은 민속극이 현재 전승되고 있다. 변강쇠가에 씌워진 부정적이고 혐오스러운 평가는 걷혀지기를 희망한다. 변강쇠와 옹녀는 어려운 시대에 수탈당하고 핍박받으면서 살아간 백성들로 우리의 조상이었다. 변강쇠와 옹녀를 건강한 에너지와 밝은 캐릭터로 새롭게 이해하면 좋겠다.
지리산 주능선의 북쪽 산록에는 심원계곡, 뱀사골계곡, 한신계곡과 백무동계곡 등에서 수많은 작은 물길이 흘러내려 운봉고원에서 흘러온 람천에 합류한다. 지리산 45km 주능선의 계곡마다 흘러서 여울이 되고 강을 이루는 물소리를 마음으로 들어본다.
오도재 고갯길을 내려오면 함양 마천이고 람천을 4km 거슬러 올라가면 실상사에 도착한다. 람천을 건너가는 해탈교에서 지리산 천왕봉이 선명하게 보인다. 람천의 여울 물소리가 햇빛에 반짝인다. 해탈교를 지키는 석장승에서 오도재의 전설과 변강쇠의 모습을 함께 찾아본다.
▲ 지리산 춘란. 지리산 산기슭의 소나무 아래에서 춘란이 낙엽을 덮고 겨울을 이겨낸 생명력으로 푸르다. ⓒ 이완우
지리산 산기슭의 소나무 아래에서 춘란이 낙엽을 덮고 겨울을 이겨낸 생명력으로 푸르다. 지리산 가는 길에서 지안재와 오도재를 둘러본 2월 중순의 여정을 정리하며, 생명력 넘치는 지리산의 문화 자산은 이해와 포용이며 공존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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