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2개월 만에 민족혁명당 탈당 후 한국독립당 재건

[무강 문일민 평전] (14) 민족혁명당·재건 한국독립당 활동

등록|2023.02.17 15:39 수정|2023.02.17 15:57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연구와 선양이 활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역사의 그림자로 남은 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힌 인물들이 많습니다. <BR> <BR>무강(武剛) 문일민(文一民:1894~1968)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평남도청 투탄 의거·이승만 탄핵 주도·프랑스 영사 암살 시도·중앙청 할복 의거 등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문일민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문일민이라는 또 한 명의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기 위해 <무강 문일민 평전>을 연재합니다.[기자말]
1934년 3월경 문일민은 박창세·차리석 등 한국독립당(아래 한독당) 간부들과 함께 항저우로 거처를 옮겨 한독당 사무소에서 기거하기 시작했다.

민족혁명당 창당 참여

1935년 2월 15~17일 항저우 당 사무소에서 개최된 제7차 한독당 대회에 문일민은 유진동과 함께 제4구 대표로 출석했다.

7차 대회의 핵심 안건은 한국 독립운동 전선을 통일하기 위한 신당(新黨) 조직 문제였다.

앞서 1932년 11월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일을 위해 한독당·조선혁명당·한국혁명당·의열단·한국광복동지회 5개 단체의 연합으로 일종의 협의체적 성격의 기구인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탄생한 바 있다.
 

▲ 상하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결성 회의 개최지 ⓒ 독립기념관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은 협의체적 성격을 넘어 단일당 조직을 추진했으나 '임시정부 폐지'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각 단체마다 의견이 달라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한독당 내에서는 신당 참여 여부를 두고 크게 대립했다. 송병조·조완구·차리석 등은 "의열단 계열과는 이념적으로 서로 용납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단일당 조직에 거세게 반대했다. 반면 김두봉·강창제·박창세 등은 "김구 세력의 전횡을 막기 위해서는 작은 차이를 버리고 대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단일당 조직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7차 대회에서는 이러한 주장들이 팽팽히 맞섰다. 문일민은 일단 대표자를 선출한 뒤 동맹에서 소집하는 혁명단체대표대회에 출석시켜 그 대회의 정황에 따라 태도를 결정하자는 '중립파'에 속했다.

그러나 한독당을 제외한 다른 정당·단체들이 신당 조직에 참여하기로 하면서 한독당 역시 대세를 거스를 수 없었다. 신당 참여 찬성파는 반대파를 배제하고 참여하기로 결정, 마침내 1935년 7월 5일 난징에서 '민족혁명당'(아래 민혁당) 창당에 함께 했다. 이날 한독당은 민혁당 항저우 지부로 개편되면서 자연스레 해체됐다.

문일민의 민혁당 합류는 그가 따랐던 안창호의 좌우합작노선에 충실한 결과로 생각된다. 안창호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였으나 일제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목표를 공유하고 있는 한 사회주의자들과도 연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안창호는 독립운동가들이 지역주의 및 계급주의 등에 함몰되어 상호 대립하는 모습을 보면서 공산주의 국제주의자와 계급혁명론자들에게는 민족의 가치를 호소했고, 반대로 일부 퇴행적 민족주의자들에게는 포용성과 투쟁성의 강화를 역설하며 대공주의(大公主義)라는 이름으로 이념과 노선을 초월한 대동단결을 부르짖었다.

실제로 1920년대 중반 이래 안창호는 민주주의·공산주의·무정부주의·복벽주의 등 각종 주의와 계파를 초월한 민족유일당을 조직해 당의 통일적 지도 아래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한 뒤 국민의 개업(皆業)·개병(皆兵)·개납(皆納)을 달성코자 하는 목표를 세우고 민족유일당운동에 나선 바 있다.

즉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나 관련 단체 및 인물들과도 전혀 연고가 없던 문일민이 김원봉 등 좌파 계열과 함께 민혁당 창당에 참여한 것은 안창호의 이러한 대공주의와 민족유일당운동에 영향을 받은 결과가 아니었나 짐작된다.
 

▲ 민족혁명당 본부가 있던 난징 호가화원 ⓒ 독립기념관


민혁당 탈당 후 한독당 재건 선언

그러나 민혁당 내에서 김원봉을 위시한 의열단 계열의 전횡이 심해지자 불과 2개월 만인 9월 25일 조소앙·박창세·김사집·이창기·박경순 등이 탈당하며 한독당 재건을 선언했다. 이때 문일민 역시 탈당 대열에 합류하며 한독당 재건에 참여했다.

"민족주의의 독립운동은 원칙상 사회주의자의 국가관과는 확연히 다른 감정과 이론을 가지는 것이다. 민족의 경제문제만을 중심으로 국가의 말살과 주권의 포기와 자기 민족의 과정을 무시하는 공산주의자와는 얼음과 숯처럼 서로 어울릴 수 없는 혈분적(血分的) 상반성을 가진다. (…중략) 지금 본당이 단연한 태도로 3개월 이상 중단되어 있는 본당의 생명을 다시 건설하고 부활하는 본뜻은 새로운 민주주의의 본령을 명백히 발휘하기 위함이다. 새로운 민주주의란 우리가 창조한 당의(黨義)·당강(黨綱)에 게재한 것이다. 국내에 있어서 특권계급을 부인하는 삼균주의(三均主義)가 그것이다." - <당원동지에게 고함>(1935.10.5)

즉 한독당 재건파는 좌파적 성향을 가진 김원봉이 이끄는 민혁당과 자신들을 '얼음과 숯'의 관계에 비유하며 이념적으로 공존할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삼균주의를 기반으로 한 순(純)민족주의 정당으로서의 한독당 재건을 선포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의단체'로서 민혁당과의 연대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그러나 민혁당은 이를 '항저우 반당(反黨)사건'이라 부를 정도로 매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민혁당은 문일민 등 재건파를 '항주반당분자(杭州反黨分子)'라 낙인찍고 당적에서 제명해버렸다. 또 '당역(黨逆) 조소앙의 정체를 폭로한다'라는 글을 통해 탈당한 이들에 대해 거센 비난을 퍼부었다.

"기회주의가 천품(天稟:타고난 기품)인 배신자 조소앙이야말로 종전부터 기회주의 영역의 제후로서 궁전에 출입하며 향락을 누리는 추장같은 지위를 보유하고 있다. 그래서 추장의 거동 하나에 5명이 따랐다. (…중략…) 소앙의 반복무상(反覆無常)한 실천적 행동은 기회주의자의 낙인을 찍지 않으면 안 된다. 조소앙이 당내에 있을 때 울적하게 지낸 것과, 이번에 반당(反黨)으로까지 진출했던 것은 모두 그의 가슴에 독재가 있고, 그의 안중에 데모크라시가 없는 관계이다. 우리 당 간부의 당당한 실천적 혁명역사를 가진 고상한 동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고, 조소앙은 스스로 여기서 낙오하여 항저우 왕국의 건설을 안출했던 것이다." - <民族革命黨 黨報> 제2호 (1935.10.18)

한독당 부흥을 위해 노력하다

재건 한독당은 조소앙을 위원장으로 하는 임시당무위원회를 조직하고 한독당 부흥을 위해 노력했다. 이때 문일민도 임시당무위원으로 참여했다. 이들은 광둥으로 내려가 광둥성 정부로부터 원조를 구하고 한독당 지부를 설치하는 등 고군분투했다.

한편 재건 한독당은 임시정부로 복귀하려는 김구 세력을 견제하고 임시정부 내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송병조 세력과 제휴를 추진했다. 그러나 송병조는 임시정부의 궁핍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김구 세력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고 재건파는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결국 송병조는 재건파를 차후 설득하는 것으로 하고 일방적으로 김구를 불러들였다.

그 결과 1935년 10월 19일 개원한 제28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통해 이동녕(주석)·이시영(법무장)·김구(외무장)·조완구(내무장)·조성환(군무장)·송병조(재무장)·차리석(비서장) 7인을 국무위원으로 하는 국무위원회가 새로이 출범했다. 이때 조소앙은 임시의정원 상임위원으로 당선됐으나 국무위원회에서는 배제됐다.

조소앙은 문일민과 박창세 등 재건 한독당 세력을 임시정부 내각에 진출시킴으로써 임시정부 내에서 재건 한독당의 지분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송병조 및 김구 세력의 배척으로 이 역시 좌절됐다. 결국 임시정부에서 사실상 배제된 재건파는 이후 열리는 임시의정원 회의에도 불참하기에 이르렀다.

- 15부에서 계속 -

[주요 참고문헌]
김정명 편, <朝鮮獨立運動>2, 原書房, 1967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33·37, 국사편찬위원회, 2005·2009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46, 국사편찬위원회, 2001
구익균, <새 역사의 여명에 서서>, 일월서각, 1994
노경채, <한국독립당연구>, 신서원, 1996
이명화, <島山安昌浩의 獨立運動과 統一路線>, 경인문화사, 2002
흥사단100년사위원회, <흥사단100년사>, 2013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