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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월요일, 자신의 이름 적힌 '관' 끄는 사람들

[탈핵_잇다] 월성 핵발전소와 가장 가까운 마을에 사는 황분희씨 이야기②

등록|2023.02.27 18:16 수정|2023.02.28 09:26
"나는 커서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요?" '후쿠시마의 아이'였던 한 소녀가 던진 이 질문을 기억합니다. 12년이 지나 성인이 되었을 그 소녀는 엄마가 되어 있을까요? 문득, 궁금해집니다. 발전소가 있는 마을에 사는 ‘그들’은 안녕할까요? ‘그들’의 삶, 일상, 활동과 목소리를 따라 ‘우리’로 얽힌 사람들, 그 인연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연결될까요? <BR> <BR>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의 답을 찾아 원불교환경연대 탈핵기록단이 한 달에 한 번, ‘그들’과 ‘이웃’을 만나러 갑니다. 누군가가 외치는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라는 말들을 곱씹다 보면 어느 지역의 문제, 그들만의 문제라고 덮어두지는 못할 겁니다. 이들의 이야기에 귀와 마음을 잠깐만 내주세요.[기자말]
[이전기사] 37년 경주 주민의 넋두리... "바보처럼 모르고 살았어" https://omn.kr/22tyq 에서 이어집니다.

후쿠시마 사고와 산산이 부서진 '안전 신화'

황분희씨는 "한수원은 깨끗하고, 안전하다 늘 말해왔거든. 우리는 그걸 믿고 살아왔지. 근데 티비에서 검은 연기가 나고 해일이 치는 걸 보는데, 뭘 처음 느꼈냐면. 아무리 안전하다 해도 한순간에 핵발전소가 위험할 수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여기 사는 우리가 사실 한수원을 비판할 이유가 없었잖아. 왜냐하면, 한수원에서는 항상 원전은 깨끗하고 좋은 에너지라고 말하고. 환경단체들이 여기서 할 수 있는 게 없었어. 삼중수소가 냄새도 안 나고, 색도 없고. 보통 환경오염이랑은 다르잖아. 깨끗하고 안전하다길래 평생을 믿고 산 거야."

그러나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사고는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텔레비전에선 연신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영상을 틀어주었고, 당시에 기자들도 마을에 방문해서 주민들을 인터뷰하는 등 국내 원전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기사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인터뷰를 끝내고 한 기자가 황분희씨에게 지금까지 한수원이 들려주지 않았던, 혹은 들어왔던 것과 다른 이야기를 했다.
 
"한수원은 지금까지 중수로가 경수로랑 다른 점이 없다고 했거든? 방사성 물질도 전혀 안 나오고. 근데, 그게 다 거짓말이었던 거야. 한 기자가 인터뷰마치고 나한테, '중수로는 경수로와는 다르게 더 무거운 물인 중수(重水)를 냉각재로 써서 여기 월성원전은 다르다'고 말한 거야. 게다가, '후쿠시마처럼 끔찍한 사고가 나지 않더라도 액체나 기체로 방사성 물질이 공장에서 나오는 연기처럼 계속 나온다'고 말해주더라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왜 이렇게 모르고 살았나, 속고 살았나 싶더라고."

이처럼 후쿠시마 사고는, 사고 그 자체로도 한수원이 만들어 놓았던 '안전 신화'를 의심하게 했지만, 우연한 기회로 만난 기자들과 전문가들을 통해 '안전 신화'가 실은 거짓말로 유지되었다는 것을 황분희씨는 처음 알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후쿠시마 사고 이후인 2012년과 2013년에 핵발전소의 안전한 운영과 관리를 담보해야 하는 한수원 내부에서 '원전 부품 비리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분희씨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 알게 된 전문가들, 그중에서도 김익중 교수에게 삼중수소 문제나 여기에서 사는 게 안전한지 등을 물어보기도 했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고 그저 안전하다고만 했던 것들에 대해서.
 
"내가 김익중 교수님을 찾아가서, 아니 이게 안전한 거냐, 문제는 없는 거냐고, 우리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냐고 물으니. 삼중수소라는 방사성 물질이 월성 핵발전소에서 나오는데. 문제는 그게 액체나 기체 상태로 계속 배출되니, 우리가 마시는 지하수나 먹는 농수산물에도 있다는 거야. 그래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냐고 물으니, 없대. 물을 끓여도 삼중수소가 안 없어지고, 정수기를 설치해도 안 된대. 그냥 생수를 사 먹는 수밖에 없다는 거야. 그래서 우리 가족이 전체 여섯 명인데, 한 두 달간은 정말 걱정이 되어서 생수를 슈퍼에서 사 먹었거든? 근데, 이게 감당이 안 되는 거야. 뭘 어쩌겠어, 다시 먹던 물을 마셨지. 여기서 나는 농수산물을 안 먹으면, 또 어떻게 살겠어. 그냥 먹었지, 그냥 그렇게 했지. 걱정이 되도 우리는 여기서 살아야 하니까."

혼자서 고민하던 황분희씨는 2014년 8월 24일, 후쿠시마 사고와 연이어 터진 부품 비리 사건들 이후 마을에서 더는 한수원을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과 함께 이주대책위(월성원전인접지역 주민이주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공고하게 보였던 핵발전소의 '안전 신화'에 주민들 스스로가 문제를 제기하고 조금씩 균열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상여를 끌고 있는 이주대책위핵발전소 모양의 상여를 끌고 있는 이주대책위 ⓒ 김우창


그때 만들어진 이주대책위는 현재까지 9년을 쉬지 않고 한수원과 정부에 이주를 요구하고 있는데, 매주 월요일 오전 8시 20분 월성 핵발전소 남문으로 이어진 도로에서 상여와 관을 끌며 집회를 이어오고 있다. 나아리 주민들과 경주시민, 울산 시민 등 열 명 내외가 모여 끄는 상여와 관 위에는, 주민들의 직함도 적혀 있다.

황분희씨는 "핵발전소 아주 가까이에 사는 우리는 죽은 것이나 다르지 않아 관에 우리들의 직함을 적었다. 매주 월요일, 우리의 직함이 적힌 관과 상여를 끄는 것은, 억울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보여주기 위해서다"라고 비장하게 말했다. 예전에는 상복을 입고, 상여곡을 틀기도 했었다. 핵발전소 근처에서 사는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기에, 자신들의 장례식을 치르는 것과 동시에, 위험한 핵발전소를 이제는 멈추라며 발전소에 대한 장례식, 즉 자신과 핵발전소의 장례식을 매주 치르고 있었다.

실제 관 위에는 '處士 局長 之 柩(처사 국장 지 구: 사무국장의 관)'이라고 적혀 있다. 인과관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황분희씨는 2012년에 갑상샘암 수술을 받았고 그의 남편도 갑상샘항진증을 앓고 있다. 과학적으로 암을 비롯한 여러 질병과 방사성 물질 사이의 인과관계를 드러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는 자기 몸에 새겨진 암이 자신이 싸워야 할 충분한 근거이자 원동력이라고 강조했다.
 
"아니, 과학적으로 전문가들은 항상 기준치 이하라서 괜찮다고 말하거나, 바나나 몇 개, 멸치 몇 그램 먹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거든. 안전하다는 거야. 그러면 내가 오히려 물어보고 싶어. 이 마을에 암으로 돌아가신 어르신들이 수십 명이고, 예전에는 특히 국민학생, 중학생 또래 애들 세 명이 백혈병으로 죽었거든. 물론, 그들 부모가 쉬쉬하거나 이 마을을 떠나서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상하잖아. 이상한 일들 투성인데, 그냥 계속해서 괜찮다고만 하니까, 이제는 못 믿는 거지. 전문가란 사람들도 한수원이랑 한 패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리고 내가 가장 걱정되는 건 내 자식들, 손주들이지. 그래서 매주 힘들더라도 싸우는 거야."

이주대책위가 처음 만들어진 2014년에는 월성 핵발전소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나아리와 나산리 주민 72가구, 150여 명이 참여했다. 그러나 한수원에 이주를 요구하는 것, 매주 상여시위에 참여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마을주민 대다수가 한수원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일을 하기 때문이다.

월성 핵발전소나 하청·재하청에서 근무하는 사람도 있고, 그들의 자녀가 일하거나, 월성 핵발전소 정문 근처에서 식당이나 가게를 운영하기도 했다. 누구하나 한수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지만, 주민 중 일부는 '안전한 곳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라는,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평범한 일상을 수년째 요구해 왔다.

시간이 갈수록 상여시위에 참여하는 주민들은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는데, 한수원이 노골적으로 압박하지 않더라도, 그들 스스로가 생계 때문에 싸움을 포기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최근에도 열심히 상여시위에 참여했던 한 주민은 자신의 딸이 운영하는 가게에 영향을 준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이주대책위에게 함께 싸우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최근에 상여시위에 나와서, 우리한테 미안하다고 했어. 그 이후론 못 나오겠지, 딸내미 때문에. 피자집인가 통닭집인가를 하거든. 딸내미가 먹고살려고 다시 고향에 들어와 가게를 차렸거든. 근데, 엄마가 계속 우리 집회장에 나오니까, (한수원이) 못 나오게 하는 거야, 장사를. 직원들을 거기에 못 가게하고, 그래서 할머니가 하는 말이  '자식이 먹고살려고 왔는데, 자기가 여기 집회에 나오니까, 한수원이 배달을 딱 끊어버렸다는 거야'."
 

상여시위에 참여 중인 주민직함이 적힌 관을 끌고 있다. ⓒ 김우창


이런 일들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반대 집회에 나간 가게의 주인이 한수원 인트라넷 '나쁜 가게' 리스트에 올라 매출이 떨어지거나, 점심에 도시락을 주문받아 다 준비했는데 갑자기 취소시키는 등 한수원은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가게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지, 나는 사실 (도시락 시켰다가 취소했다는) 식당이 좀 과장되게 말한 거 아닌가 싶었는데. 이 할머니가 직접 겪고 여기 와서 말을 하니까 이게 정말 심각하다는 것을 다시 느낀 거지. 할머니가 우리한테 '못 나가서 미안하다'라고 하는데, 내가, '괜찮다, 못 나와도 괜찮다. 아니, 자식이 먹고살려고 다시 고향에 왔는데, 살아야죠. 그러니까 안나와도 괜찮습니다'라고 했지."

이렇게 150여 명으로 시작한 이주대책위는 다양한 이유로 시위에 참여하는 인원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9년이 지난 지금은 적을 때는 열 명이 채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황분희씨는 그들을 비판하거나 비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물론 함께 싸워온 사람들이 그만둘 때마다 아쉽기도 하고, 계속 같이 싸웠으면 좋겠지만, 이해돼. 맥스터 때, 식당 주인들도 많이 참여한 적도 있거든. 근데 같이 싸우고 싶어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집회장에 한 번 나오면 도시락 주문 다 끊기고, 피해를 보니까. 이 마을은 딴 데 보고 장사를 하는 게 아니라, '한수원 하나' 보고 장사를 하잖아. 외부에서 관광객이 많이 오는 것도 아니거든. 치사하게 그런 걸 가지고 회유든 협박을 하는 거지. 자기네들이 잘해서, 동네, 지역주민과 더불어 살 생각은 안 하고, 이런 먹고사는 일 갖고 동네 사람을 갈라놓는 거지. 한수원이 입에 달고사는 진짜 '상생'을 해야 하는데, 저렇게 나쁜가게 리스트를 만들지 않나. 주민들이 이젠 아는 거지. 내가 저기(이주대책위)에 나가면, 먹고 살기 힘들다는 걸."

나아가 황분희씨는 한수원이 강조하는 '마을 발전'이나 '지역 상생'이 '안전 신화'처럼 거짓말과 기만으로 가득 차 있다고 지적했다.
 
"살기 좋고 인심 좋은 동네였는데, 한수원이 들어와서 그냥 버려놓은 거지. 하나라도 같이 나눠 먹고 했던 사람들을, 이제는 적군 아니면 아군. 아니면 모든 걸 '이해관계'로만 나한테 득이 되고 이익이 되는지에 따라서 사람들이 행동하게 만든 거지.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한수원에 아부하고, 잘 보이려 하고, 정작 한수원은 안전이나 이주, 건강 문제에는 관심이 없어."

(* 황분희씨가 매일 되뇌는 주문과 월성에 방문한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다음, 마지막 기사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 매거진(https://brunch.co.kr/magazine/no-nuke)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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