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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공간 구성의 부평, 태생부터 달랐다

일본 육군 조병창 배후 도시가 지금은 인천 동부 생활권 중심지

등록|2023.02.27 11:40 수정|2023.02.27 11:40
오랜 시간 삶의 ‘흔적’이 쌓인 작은 공간조직이 인접한 그것과 섞이면서 골목과 마을이 되고, 이들이 모이고 쌓여 도시 공동체가 된다. 수려하고 과시적인 곳보다는, 삶이 꿈틀거리는 골목이 더 아름답다 믿는다. 이런 흔적이 많은 도시를 더 좋아한다. 우리 도시 곳곳에 남겨진 삶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다. 그곳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기쁘게 만나보려 한다. [기자말]
얼마나 풍요로운 고장이면 부평(富平)일까. 아니면 그렇길 바라는 마음으로 역설적인 이름을 붙였을까. 부평은 편편하고 너른 평야다. 그러나 이 벌판은 고통스러웠다.

해발고도가 한강 수위보다 낮아 큰물이 지면 범람하기 일쑤였다. 연례 행사처럼 찾아오는 홍수에 인명은 물론 재산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따라서 소출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홍수는 1990년대 말까지 도시화하지 못한 이곳 평야를 괴롭혔다. 2002년 6월에서야 길이 14.2km, 폭 20m 굴포천 방수로가 생기면서 고질적인 홍수에서 벗어난다.
 

부평역역 광장에서 바라본 부평역. 오래 전 복합개발로 상업시설이 입지해 있음. ⓒ 이영천


1899년 경인선 개통과 함께 평야 남측에 철도역이 생겨난다. 부평역이다. 역의 존재는 이 드넓은 벌판의 운명을 예정하고 있었다.

부평의 공간구조는 여느 도시와 다르다. 평면구성은 로터리로 이뤄진 교통광장을 각 꼭짓점으로, 부평역~부평시장역오거리~부흥오거리~굴다리오거리로 이어진 도로가 구획한 빗각 사각형이다. 네 꼭짓점을 다시 대각선 도로로 연결하고 한가운데 6개 도로 교차점에 '시장 로터리'를 두었다. 이 로터리에 서면 사방을 관찰하기가 수월하다.

부평 항공지도특이한 모양의 빗각 사각형으로 평면구성을 이룬 부평의 모습. ⓒ 인천광역시 지도포털


이런 평면구성을 갖게 된 까닭은 군수산업 배후지인 군사도시로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일제가 조성한 시가지엔 으레 로터리를 두었지만, 부평에서 그 특징이 유독 극명하게 드러난다.
 

부평역 광장대규모 군대의 숙영과 군수품 야적 기능으로 탄생한 부평역 광장. 긴 아치형으로 만들어졌으나 북쪽은 도로로 단절됨. ⓒ 이영천


역광장 쓸모도 군수산업과 관련이 높다. 광장은 유사시 군대 집결지로 혹은 수송이 필요한 군수품을 야적하던 용도였다. 이렇듯 부평은 태생부터 달랐다.

운하가 지날 뻔한 땅

몽골이 침략하자 왕성을 강화도로 천도한 인물이 최충헌 아들 최우다. 그가 세곡을 개성 가까운 경창(京倉)까지 안전하게 실어나르기 위해 김포∼부평∼서해를 잇는 뱃길(운하)을 구상한다.

경창은 개성 앞바다 벽란도에 있었고, 몽골 항쟁 때 임시수도는 강화도다. 강화 바깥 바다는 물살도 느리고 폭풍우 피해도 심해 조운선 항해엔 매우 부적합했다. 따라서 강화와 김포 사이 해협을 통행해야 했다.
 

부평평야(1930)산미증식계획에 따라 일본인 대지주들이 설립한 부평수리조합이 1920년대 중반 관개사업을 시행함. 이때 개설된 3개 수로와 중앙도로 모습이 선명함. ⓒ 서울역사박물관


하지만 이 해협은 지금의 초지대교 부근 손돌목이 걸림돌이다. 세곡선이 이곳 험한 물살에 수시로 전복한다. 최우는 손돌목을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우회하는 방안에 골몰한다. 운하를 구상하고 강화천도에 즈음하여 실행에 옮긴다.

운하는 만월산에서 발원해 한강으로 흘러드는 굴포천 상류에서 만월산 '원통이 고개(현 부평삼거리역~간석오거리역 사이 고개)'를 뚫어 주안 갯골을 따라 인천 북항에 이르는 구간이다. 한강과 서해에서 공사는 비교적 순조롭다. 퇴적토와 점토층이 주를 이룬 토질이다. 하지만 원통이 고개에서 강도 높은 화강암 지대를 만나 난관에 봉착한다. 운하는 이 고개를 뚫지 못해 좌절하고 만다.

조선 중종 때, 우의정 김안로에 의해 다시 시도된다. 한강에서 부평 방향으로 약 40리를 굴착해 들어간다. 주안 갯골과 한강 굴포천 물길이 각 시점이다. 양쪽에서 물길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고려 때 최우와 같이 원통이 고개에서 역시 좌초하고 만다. 고개는 물길이 이곳을 넘지 못해 '원통하다'는 데서 붙은 이름이다.
 

신곡리 배수갑문일본인들이 한강 가에 설치한 김포 신곡리 배수갑문. 이곳에는 지금도 갑문이 있어 이 벌판 농업용수 조절 기능을 함. ⓒ 서울역사박물관


매년 홍수에 시달리는 이 벌판에 일제도 운하를 구상하나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대신 쌀 수탈 목적으로 산미증식계획을 내세운다. 부평에 농지를 소유한 일본인 대지주 하여금 부평수리조합을 설립, 한강 물을 끌어들일 배수갑문을 김포 신곡리에 설치하고 3개 간선수로와 배수로를 뚫는다. 굴포천을 개수하고 곳곳에 제방을 쌓았으며, 부평평야를 관통하는 중앙도로를 개설한다.

1960년대에도 경인 지역 물류 수송을 위해 이곳에 운하를 검토하나 착공까지 이르진 못한다. 정작 사달은 2012년에 벌어진다. 2002년 만들어진 굴포천 방수로만으로도 홍수 예방이 충분한 곳에, 어리석은 권력자가 운하 만든답시고 수조 원을 들여 겨우 수상 스키장을 만들어 놓았으니.

군사 도시로

부평은 1930년대 후반까지 평범한 농촌이었다. 경인선 중 부평역만 전기가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한미했다. 도시가 된 계기는 중일전쟁(1937)이다. 일제는 전쟁으로 중화학공업이 절실해지고, 그 거점으로 부평이 선택된다.

부평은 계양산~천마산~철마산~만월산으로 이어진 산자락이 서해를 향해 활처럼 휘어진 안쪽 분지다. 이런 지형적 특성은 북서쪽 공격으로부터 천혜의 방어막이었다. 1937~1942년까지 산곡동을 중심으로 일본의 자동차와 철강, 기계, 요업과 화학공장이 우후죽순 생겨난다. 산업단지 기반이 이때 만들어진다. 전범 기업 미쓰비시 공장 터였다가 나중 군부대로, 다시 부평공원이 된 땅이 대표적 사례다.
 

부평공원전범기업인 미쓰비시 공장 터에서 군부대였다가 반환되어 공원으로 조성된 부평공원. ⓒ 인천시청


한반도 최대규모의 일본군 조병창(1939)이 산곡동에 들어선다. 지금의 캠프 마켓 자리로 친일파 송병준 땅이었다. 전쟁에 필요한 군수품 생산기지로 부평에 들어선 산업시설의 최대 수요처 역할을 한다. 조병창에서 소총, 탄약, 소구경 화포탄약, 총검, 수류탄, 군용경차 등을 생산했다. 수많은 조선인이 징용당한다. 부수적으로 이들 산업을 보호할 군부대가 계양산에서 만월산에 이르는 요소마다 자리 잡는다.

이제 배후 시가지가 필요해진다. 조선시가지계획령(1934) 후속 조치인 경인시가지계획령에 따라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시행한다. 1938년 시작해 1941년 부평역 앞에 네모난 도시가 형성된다. 이때 형성된 공간이 부평역~부평시장역오거리~부흥오거리∼굴다리오거리로 이어지는 구획이다. 각 꼭짓점과 한가운데 X자 교차로에 원형 로터리를 둔다.

일제는 군사보안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부천 소사에 있던 '무선항공표지소' 전파가 방해받지 않게 할 조치가 필요했다. 부평 조병창 일대 공업지역과 주거지역, 군부대를 제외한 삼산동과 부천 상동 일대를 녹지와 농업용으로만 이용케 하는 강력한 토지이용 규제를 시행한다. 이런 영향이었는지 실제로 이 지역은 1990년대 초까지 농토였다가 중동, 상동 신도시 개발을 전후하여 도시화한다.
 

조병창 터 미군 부대100만 평 규모의 일본 육군 조병창이 미군에게 접수되어 현재도 주둔 중인 캠프 마켓. 2023년 완전 반환 예정임. ⓒ 대한민국역사박물관_근현대사아카이브


해방과 동시에 미군이 가장 먼저 접수한 군사시설이 조병창이다. 부근에 7개 부대를 주둔시켜 '애스컴(ASCOM) 시티'라 부를 정도의 군사도시로 변모한다. 에스컴 시티가 1973년 공식 해체, 1980년대부터 아파트단지와 공원으로 바뀐다. 부평역 인근 동아아파트와 부평공원이 대표적이다. 산곡동 옛 일본 조병창이었던 캠프 마켓만 미군 부대로 남아있다. 2019년 부분 반환되어 부영공원이 되고 나머지도 2023년 반환 예정이다. 이 터에도 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인천과 다른 생활권

부평은 내부 에너지 축적에 따라 성장한 도시가 아니다. 대륙침략 발판을 마련하려는 군수산업의 강제 이식과 병참 기지화에 따른 배후도시로 태어났다. 그러함에도 여전히 인천 동부 생활권 중심지다.
 

부평시장역오거리빗각 사각형 평면의 북서쪽 꼭짓점 로터리인 부평시장역오거리. ⓒ 이영천


또한 조병창 일대 공업지대 역시 해방 후 '경인공업지대'라 불리며 국가 기간산업 역할에 충실했다. 인천 해안가 매립을 통해 조성되던 산업시설이 포화 상태에 이르자 부평지역이 충실한 대안이 되어 주었다. 이렇듯 공업도시 인천의 변화와 성장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부평이다.
 

부흥오거리빗각 사각형 평면구성의 동북쪽 꼭짓점을 이루는 부흥오거리. ⓒ 이영천


행정구역은 인천이지만, 생활권은 부천과 영역을 공유한다. 지리적 입지가 부평평야라는 분지에서 같이 출발했기 때문이다. 또한 서울과 인천을 잇는 같은 연담도시(聯擔都市)로써 점이지대 역할도 분담한다. 이런 인문지리적 특성으로 부평과 부천은 공동운명체다.
 

굴다리오거리빗각 사각형 평면구성의 남동쪽 꼭짓점을 이루는 굴다리오거리. ⓒ 이영천


유기체적 관점에서 쇠퇴기를 지난 부평은 새로운 공간으로 전환하는 변곡점에 놓여 있다. 병참기지에서 공업도시로 변모했던 오래된 기능이 점차 내부 에너지를 모아가는 과정이다. 좀 더 고도화한 도시로 이행하는 단계에 놓여 있다. 물론 오류도 있었다. 비워지기 시작한 군부대를 무미건조한 아파트 일색으로 채워 넣어 버렸기 때문이다.

도시 중심부는 가급 비워두는 게 좋다. 후세대가 전혀 다른 기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예비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비워진 군부대가 대규모 도시공원으로 바뀌어 가는 현상은 매우 고무적이다.
 

부평 시장 로터리빗각 사각형 평면구성의 한가운데인 시장 로터리. X자로 교차하는 6개 도로가 이곳으로 모이고 흩어짐. ⓒ 대한민국역사박물관_근현대사아카이브


한 발 더 나아가 특색있는 중심 기능을 찾아야 한다. 부천과 더불어 공업이라는 생산기능이 배후를 든든히 떠받치고 있다. 이를 활용한 대안 발굴이 필요해 보인다. 서울과 인천을 매개하는 역할로써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4차, 5차 산업이 대안일 수 있다.

기억해야 할 과거 오욕의 시간을 벗어나 공간은 변화 중이다. 서울과 인천의 점이 지대인 부평이 어떤 얼굴로 다시 태어날지 지켜봐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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