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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이름 정우형 기억해달라" 삼성 해고자, 289일만에 장례

[현장] 삼성전자서비스 고 정우형 마지막길... 가족, 아사히글라스·파리바게뜨 노동자들 오열

등록|2023.02.24 15:56 수정|2023.02.24 16:01

▲ 24일 오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 앞에서 열린 삼성전자서비스 해고노동자 고 정우형 열사 영결식에 참석한 시민과 노동자들이 고인을 기억하며 헌화하고 있다. ⓒ 유성호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에서 에어컨 수리기사로 일하다 노조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해고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정우형씨의 장례가 289일 만인 24일 노동시민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정씨 유족과 비정규직 노동자, 시민단체는 이날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서 영결식을 거행했다. 정우형열사대책위원회 공동대표를 맡은 권영국 변호사를 비롯해 삼성전자서비스 해고자 복직투쟁위원회의 안양근·박병준씨, 비정규직이제그만 공동소집권자인 차헌호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지회장, 임종린 화섬식품노조 파리바게뜨지회장,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 고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씨, CJ E&M PD 고 이한빛씨 아버지 이용관씨 등이 참석했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와 나도원 노동당 공동대표도 자리했다.

노조 조합원이었던 정씨는 지난 2015년 사측이 해고를 쉽게 할 수 있도록 일방적으로 취업규칙을 바꾸려 들자 이에 저항하다 2016년 1월 해고됐다. 이후 7년째 복직 투쟁을 벌이던 중 지난해 5월 12일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원직 복직'이라는 조끼를 입은 채였다. 사망 10일 전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게 "나는 노조파괴 공작의 피해자다. 일감 줄이기로 직장을 떠나게 만들고, 위장 폐업으로 거리로 내몰았다. 그 범죄를 만천하에 제대로 사과할 것을 요구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부쳤다가 수취인 거부로 반송 받았다. 유족 측은 정씨의 명예회복과 안양근·박병준씨 등 다른 동료 해고자들의 복직을 요구하며 280여 일간 장례도 치르지 못했다.

그러다 지난 21일, 정씨 사망 286일만에 유족·정우형열사대책위원회와 삼성 측은 ▲고인 명예 손상 금지 ▲동료 해고자들의 근로자지위확인 소송 상고심에 따른 법적 책임 준수 등에 합의했다. 안양근·박병준씨는 현재 회사를 상대로 낸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에서 2심까지 승소한 상태다.

서울고등법원은 지난해 1월 삼성전자서비스가 이들을 불법 파견했고, 직접 고용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사측은 이들을 여전히 복직시키지 않고 있다. 대법원 판결까지 보겠다는 것이다. 고 정우형씨의 부인 이인숙(58)씨는 "제 옆을 묵묵히 지켜주고 함께 해준 안양근, 박병준 동지에게 정말 고맙다"며 눈물 흘렸다. 두 해고자는 영결식 내내 맨 앞줄에서 울었다.

권영국 변호사는 이날 영결식에서 "유족이 받아낸 합의는 고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배우자와 삼성전자서비스 해고노동자들의 끈질긴 투쟁으로 만들어낸 눈물겨운 성과"라고 했다.

"남편 정우형 이름 꼭 기억해달라"... 눈물 흘린 아사히·파바 노동자들
 

삼성 해고자 고 정우형, 비정규직 배웅 속 289일만에 장례 ⓒ 유성호


 

▲ 24일 오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 앞에서 열린 삼성전자서비스 해고노동자 고 정우형 열사 영결식에서 부인 이인숙씨가 남편의 영정 사진을 만지고 있다. ⓒ 유성호

 

▲ 24일 오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 앞에서 열린 삼성전자서비스 해고노동자 고 정우형 열사 영결식에서 부인 이인숙씨와 딸이 박병준 장례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으로부터 고인의 약력이 소개되자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유성호

 

▲ 24일 오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 앞에서 열린 삼성전자서비스 해고노동자 고 정우형 열사 영결식에서 유가족과 시민, 노동자들이 고인을 기억하며 묵념하고 있다. ⓒ 유성호


이인숙씨 옆에 앉은 20대 딸은 아버지의 영결식장에서 계속 눈물을 닦았다. 이씨는 "지난 10개월은 너무나도 괴로운 시간이었다"라며 "남편이 남긴 유지를 받들지 않으면 그 죽음은 헛되이 돼버리고, 삼성 자본에 짓밟혀 개만도 못한 인생으로 살다간 게 될 것이기에 견딜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씨는 "제 남편 정우형의 이름을 꼭 기억해달라"고 했다.

삼서전자서비스에서 노조활동을 하다 탄압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자는 정씨 외에도 2013년 10월 고 최종범(당시 33세), 2014년 5월 염호석(당시 34세)씨가 있었다. 이인숙씨는 "고인께서 그토록 아파했던 두 명의 동생들부터 만나길 바란다"는 차헌호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지회장의 조사를 듣다 땅을 치고 오열했다. 임종린 지회장 등 파리바게뜨 노동자들도 눈물을 보였다.

"289일이다. 비정규직은 죽어도 죽을 수 없고, 살아도 살 수가 없다. 유가족들에게 그 시간이 어떤 시간이었는지 우리가 어떻게 헤아리겠나. 정우형 동지, 이제 나비처럼 훨훨 날아 이곳을 떠나면 동지가 그토록 아파했던 두 명의 동생들부터 만나길 바랍니다. 최종범 열사, 염호석 열사를 만나면 두 팔 벌려 따뜻하게 안아주길 바랍니다. 모두 함께 이제 노동탄압 없는 세상에서, 비정규직 없는 세상에서, 아픔 없는 세상에서 동지들과 함께 웃으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켜봐 주세요." (차헌호 지회장)

앞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구속 이후 삼성의 오랜 노조파괴 공작이 사실로 드러나 파문이 일자 삼성은 지난 2019년 1월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 소속 비정규직 설치·수리 노동자 8000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정씨 등 해고자들에겐 이마저도 적용되지 않았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289일이 지나서야 열린 오늘 이 장례식에서 열사의 유족들과 함께 싸우신 동지들의 아픔을 받아 안고, 노동의 정의가 살아나는 일터를 만들기 위해 싸우겠다"고 말했다.

허영구 정우형열사대책위원회 공동대표는 "289일 동안 당신도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차가운 냉동고 속에서 명예회복을 기다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쓰려온다"라며 "이제 열사들이 잠든 모란언덕에서 당신을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

고인은 마석모란공원에 안치된다.
 

▲ 24일 오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 앞에서 열린 삼성전자서비스 해고노동자 고 정우형 열사 영결식에서 서정숙씨가 고인을 위로하며 진혼무를 드리고 있다. ⓒ 유성호

 

▲ 24일 오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 앞에서 삼성전자서비스 해고노동자 고 정우형 열사 영결식을 마친 뒤 박병준 장례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이 고인의 영정사진을 모시고 이동하고 있다. ⓒ 유성호

 

▲ 이정미 정의당 대표와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하청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사망한 고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씨가 24일 오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 앞에서 열린 삼성전자서비스 해고노동자 고 정우형 열사 영결식에 참석해 부인 이인숙씨와 딸을 안아주며 위로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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