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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앞잡이... 칼을 뽑아 고종 위협한 군부대신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이병무

등록|2023.03.05 11:16 수정|2023.03.05 11:16

▲ 1907년 한국을 방문한 일본 황태자 후에와 기념 촬영한 각료들. 우로부터 이토 히로부미, 한 사람 건너 영친왕과 일본 황태자가 보이고 뒷줄에는 친일파인 조중응과 이완용과 송병준이 보인다. ⓒ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자료


1919년 3·1운동은 일본제국주의 못지않게 친일파들도 긴장시켰다. 이때 이완용과 동병상련을 많이 느꼈을 인물 중 하나가 이병무다.

대한제국 멸망을 도운 1905년 을사오적, 1907년 정미칠적, 1910년 경술국적(8명)에 한 번 이상 이름을 올린 친일파는 총 14명이다. 이 중에서 두 번 이상 이름을 올려 한국인들에게 확실하게 각인된 인물은 다섯이다.

친일 다관왕인 이 다섯 중에서 1919년 3월 1일 현재 생존한 사람은 단 셋이었다. 이완용(3관왕)과 조중응(을사오적·경술국적)에 더해 이병무가 그 셋을 이뤘다.

을사오적은 외교권을 넘기고, 경술국적은 나라를 통째로 넘겼다. 중간 단계인 정미칠적은 대한제국 행정이 이토 히로부미 한국통감의 간섭을 받도록 만들었다. 또 군대를 해산하고 경찰권을 위임하는 일을 거들었다.

이병무는 정미칠적에 더해 경술국적까지 됨으로써, 일본이 대한제국의 수족을 자르고 이를 통째로 넘겨받는 데 가담했다. 그런 그가 이완용·조중응과 함께 3·1 만세시위 때 살아 있었다. 당시 55세였던 그의 긴장감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1864년 충남 공주에서 출생한 이병무는 갑신정변 2년 뒤인 1886년 22세 나이로 무과에 급제했다. 그의 무관 생활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일본과의 인연이 강해질 때마다 대한제국 군대와의 거리가 멀어졌다는 점이다.

일본군이 동학혁명 진압과 자국민 보호를 빌미로 조선에 불법 상륙해 청일전쟁을 일으킨 1894년에 그는 고종의 제5왕자인 이강(훗날의 의친왕)을 수행해 일본을 방문했다. 이때, 일본이 그를 끌어당겼다.

그는 하사관 양성 기관인 일본 육군 교도대에 입학했고, 이 때문에 대한제국 군대의 현직에서 잠시 벗어나게 됐다. 1895년에 서른한 살 나이로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간 그는 1896년 3월까지 수학하다가 4월에 대한제국 육군 정위(대위)로 복귀했다.

그 뒤 대대장으로 복무하던 중인 1900년, 일본과의 인연이 다시 작동하여 그가 현직을 이탈하는 일이 생겼다. 이 해에 그는 일본 망명자와 연락한 혐의로 면직되고 감옥에 들어간 뒤 유배 생활까지 하게 됐다.

군대 해산을 주도

군에 복귀한 것은 4년 뒤였다. 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키고(1904년 2월 8일) 이를 빌미로 대한제국과 한일의정서를 체결해(2월 23일) 한일 안보협력을 이룬 직후인 1904년 6월 7일이다. 이때 참령(대령)으로 복귀한 그는 육군무관학교장과 육군유년학교장 등을 거쳐 1907년 5월 22일 이완용 내각의 군부대신으로 발탁됐다.

1900년에 대대장이었던 그가 7년 뒤 국방부장관이 된 데는 일본 정부의 지지가 큰 도움이 됐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넘어간 이듬해인 1906년 대한제국 훈장과 일본제국 훈장을 받은 사실은 그의 배후에 어느 나라가 있는지를 명징하게 드러냈다.

군부대신으로 기용된 뒤 그가 주도한 일은 군대 해체였다. 자신이 몸담아온 한국 군대를 해체하는 일이었다. 군대를 관리하는 임무가 아니라 해산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됐던 것이다. 일본과의 인연이 강해지면 대한제국 군대와 멀어지는 그의 인생 패턴이 이때도 나타났다.

그런데 군대 해산 과정에서 그는 웬만한 친일파들은 감히 생각하지도 못할 일을 과감히 시도했다. 이것이 그의 이미지를 한층 강렬하게 만들었다.

고종은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세계만방에 알리고자 1907년 6월 1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회되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준·이상설·이위종과 호머 헐버트를 특사로 파견했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로 고종의 계획 무산됐고, 그 대가로 고종은 일본과 친일파의 압력 속에 7월 18일 퇴위조서를 발표하고 다음날 황제 직에서 물러났다. 그런 뒤 7월 24일에 한일신협약(정미칠조약)이 체결돼 대한제국에 대한 한국통감부의 간섭이 강해지고 7월 31일 군대가 해산됐다.

이 과정에서 이병무는 선을 한참 넘어섰다. 신하의 위치를 망각하고 고종을 칼로 협박하기까지 했다. 그해 7월 24일자 <대한매일신보>에 따르면, 군부대신인 그는 고종의 퇴위를 강요할 때 칼을 들고 들어갔다. "군대 리병무 씨는 심지어 칼을 차고 시립하였다더라"라고 이 신문은 전했다.

조선왕조 말년의 역사를 기록한 정교(鄭喬)의 <대한계년사>에 따르면, 이병무는 고종에게 칼집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았다. "이병무는 칼을 뽑아 위협했다"라고 이 책은 말한다. '칼을 뽑아'의 원문은 발검(拔劍)이다. 대신이 발검까지 해가며 일본의 앞잡이 역할을 했던 것이다.

당시 이병무는 이토 히로부미의 명령에 따라 대궐에 일본 병력을 배치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이병무가 전화를 걸어 이에 관한 지시를 내리자 정위 조성근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며 명령을 거부했다.

이병무가 다시 전화를 걸어 "일본인이 명령한 것이니 어쩔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자, 조성근은 "그저 일본인만 알고 있으니 이런 군부를 어디에 쓰겠는가?"라며 주먹으로 전화기를 때려부쉈다. 한국인들의 눈에 이병무가 어떻게 비쳐졌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한국 훈장은 부당하다
 

▲ 이병무 ⓒ 위키미디어 공용


세상의 시선은 그랬지만, 그해 하반기에 그에게는 상복이 터졌다. 군대 해산을 주도한 뒤 이에 저항하는 의병운동을 진압한 그는 9월 28일 대한제국으로부터 태극장 훈장을 받고 10월 18일 일본 정부로부터 욱일장 훈장을 받았다. 10월 30일에는 대한제국으로부터 한 등급 높은 태극장을 또다시 받았다.

이를 두고 샌프란시스코 교포단체인 공립협회의 기관지가 쓴소리 한마디를 내보냈다. 1907년 12월 6일자 <공립신보>에 실린 '매국 대신들이 훈장 타'라는 기사는 친일 대신들이 훈장 받은 일을 비판하면서 "나라 파라먹은 공로로 말하면 일본 훈쟝은 가하되 한국 훈패난 부당하도다"라고 평했다.

대위 조성근은 전화기를 때려부수고 <공립신보>는 '일본 훈장은 가해도 한국 훈장은 부당하다'고 평했다. 그의 삶은 이런 평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았다.

발검까지 마다 않은 1907년의 대활약에 이어 1910년 국권 침탈에도 가세해 정미칠적에 이어 경술국적으로 2관왕에 올랐다. 그런 뒤 자작 작위를 받고 일본 육군 중장 대우를 받으며 여생을 편히 지냈다. 1919년 3·1운동 때는 가슴이 졸아들었겠지만, 그 뒤 7년을 더 편히 보내다가 1926년 12월 6일 사망했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이병무 편에 따르면, 그는 친일에 대한 대가로 금전적 보상을 두둑이 받았다. 1911년 1월에 은사공채로 5만 원을 받았고, 그해 2월부터 육군 중장 대우로 연봉 2500원을 받았다. 1910년에 평안도 중화군 군수로 부역한 친일파 김연상(1878~1924)이 연봉 600원을 받은 점을 감안하면, 이병무가 축적한 친일재산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병무는 56세 때인 1920년에는 육군 중장으로 정식 임명됐다. 이때부터 1926년까지 받은 연봉은 3500원에서 5200원이었다.

도쿄에서 히로히토 일왕(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가 1915년 제과점에 근무할 당시 받은 월급을 연봉으로 환산하면, 숙식 제공에 연 100원 미만이고, 1920~1924년에 용산역 역부·전철수·연결수로 근무할 당시 받은 월급으로 연봉으로 환산하면 연 600원에 못 미쳤다. 이병무가 받은 연봉은 한국인 기술자의 연수입과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의 삶은 훌륭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평가의 진원지는 일본 정부다. <친일인명사전>은 그가 1926년 12월 8일 사망한 사실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사망 당일 정3위로 욱일동화대수장이 추서되었다"라며 "작위는 양자 이홍묵이 이어받았다"라고 말한다. 욱일장 중의 최상위가 욱일동화대수장이었다. 일본제국주의가 보기에 그의 인생은 훌륭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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