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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구를 찾는 여자들에게

[서평] 홍현진의 <나를 키운 여자들>

등록|2023.03.04 19:41 수정|2023.03.04 19:53
살면서 벽에 가로막혔다 싶은 답답함이 차오를 때면 관련된 책들을 마구잡이로 읽었다. 학창 시절 공부 압박감에 시달렸을 때부터 결혼하고 남편과 삐걱거렸을 때, 한참 돈이 필요했을 때, 아이를 어떻게 키우는지, 바람직한 부모란 무엇인지 혼란스러웠을 때, 인간관계에 갑자기 발목 잡혔을 때 누구든 붙잡고 도대체 내가 뭐가 문제냐고, 왜 이런 거냐고, 해결책은 있느냐고 따지고 싶은 충동을 풀어놓은 곳이 책이었다.

무턱대고 읽었지만, 위로되는 문장들에 밑줄을 긋고, 도움 되는 아이디어들을 조각조각 얻으며 답답함을 그나마 진정시키곤 했다. 읽은 책들 덕분에 삶의 방향을 점검하고, 허술할지언정 다시 중심 잡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삶의 고비를 넘기는 데 가장 큰 일조는 당연하게도 읽은 책들이라 할 만했고, 그 책들을 잊고 싶지 않아 <오늘의 나를 만든 책들>이란 글을 써서 죽 나열해 보기도 했더랬다.

얼마 전 홍현진 작가의 <나를 키운 여자들>이란 책을 접했다. 책 제목을 읽으며 나와 비슷한 생각인 듯 반가웠다. 누군가의 영향을 받은 자신을 그리 표현한 문구구나 싶어 말이다.

도대체 어떤 여자들이 저자를 키웠다는 건지 호기심이 부쩍 일었다. 책을 읽어보니 저자가 한참 어려울 때 잠시 마음을 기댈 수 있었고 해방감을 느끼게 해 준 영화 속 여자 캐릭터들을 지칭한 것이었다. 거대한 삶의 장벽 앞에 갑갑하고 속절없는 심정을 영화로 풀며 숨 쉴 구멍을 찾아낸 저자가 또 다른 나인 것처럼 친근했다.

억울할 때 나타난 여자들 

▲ <나를 키운 여자들>(느린서재) ⓒ 느린서재


저자의 난관은 공교롭게도 최선을 다해 살았기 때문이었다. 학창 시절엔 모범생, 사회에서는 모범 직장인의 전형이었다고나 할까. 기자였던 첫 직장에서 9년을 일했고, 재취업에서 창업으로 이어지는 내내 자신을 갈아가며 에너지를 쏟아붓던 저자는 엄마가 되며 급격히 소진되었다. 출산 이후에 계속되는 일과 육아,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 속 줄타기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감수하고 감당해야 하는 많은 일들이 억울했기 때문이다.

버티고 버티다 번아웃의 연속으로 이어졌고, 세상의 기준에 맞게 성실하게 살아온 정체성을 뒤집어엎고 싶은 격한 감정에 시달렸다고 한다. 막막함 속에서 한줄기 빛처럼 다가온 것이 어딘가 욕망으로 뒤틀린 여자들의 서사였다. 세상과 불화할지언정 거리낌 없이 욕망을 표출하는 영화 속 여자들을 이해해 보려 고심하면서 저자 또한 삶의 본질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고 고백한다.
 
"세상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한 여자들, 눈을 똑바로 뜨고 싸우는 여자들, 마음껏 욕망하는 여자들, 경계를 넘어 끝까지 가보는 여자들, 이전과는 다른 내가 된 여자들의 서사를 통과하며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견고한 벽이 조금씩 무너졌다. 영화 속 여자들이 던진 질문은 삶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고민하며 나는 쓰고 또 썼다..."(11쪽)

저자는 총 27편의 영화와 5편의 드라마 속 범상치 않은 여자들을 연구하며 그간 자신이 타인의 시선과 사회가 주입한 여성상과 모성기준에 휘둘려 왔음을 자각한다. 그리고 영화 속 여자들처럼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기 위한 고민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저자는 민낯을 어설피 숨기거나 에두르지 않는다. 바로 저자의 이런 솔직함이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으로 보인다.

솔직함이 드러나는 인상적인 일화로 영화 <브론즈>의 주인공을 보며 쓴 글이 눈에 띈다.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후 12년이 지나도록 왕년의 영광에만 도취되어 사는 주인공 호프를 통해 저자는 예전의 자신을 떠올린다. 이직한 후에도 여전히 전직 기자 타이틀을 들먹이지 않고서는 자기를 소개하기 어려웠던 자신. 과거를 방패막이 삼아 남들에게 그럴듯한 사람으로 보이고픈 욕망에서 비롯되었던 것임을 자각한다.

숨기고 싶은 욕망을 인정하고 나자, 저자는 자연스레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자신을 믿는 것뿐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과거에 묶여서는 현재를 충실히 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을 감수하며 스스로를 드러내는 용기 덕분에 저자가 고심하여 다다른 깨달음이 더 깊이 와닿는 것 같다.
 

▲ 드라마 <렛다운> ⓒ 넷플릭스


드라마 <렛다운>을 통해 페미니즘을 공부한 저자 자신이 모성신화의 가해자였음을 고백한 부분도 인상적이다. 드라마 속 친정엄마 베러티에게 아이를 돌봐달라며 싸우는 딸 오드리에게 저자는 자신을 투영한다. 결혼하고 출산 후 육아 도움을 받지 못하고, 손주와 잘 놀아주지 못하는 친정엄마가 엄마로서 영 부족하다 여기며, 상처 주는 말로 친정엄마를 톡 쏘아붙이던 자신을 떠올린 것이다.

친정엄마 베러티는 딸 오드리의 불만에도 딸의 육아를 돕기보다 자기 일상에 충실하다. 당당하고 독립적인 엄마 베러티를 곱씹으며 저자는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모성의 방식이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해 수긍해 간다. 그리고 자신의 엄마를 다시 생각한다. 사회의 모성신화가 그리는 이상적인 엄마로서가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과 관심을 표현해 왔던 엄마를 말이다.

그제야 엄마도 자신을 키우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면서도 엄마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왔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간 자신이 모성신화를 기준으로 얼마나 엄마를 엄격하게 평가해 왔는지 알아차리며 엄마에 대한 서운함과 원망을 내려놓는 장면이 뭉클하다. 저자의 솔직함에 이입되어 나 자신도 되돌아보게 되는 장면이었다.

솔직해서 위로 된다

저자의 고민이 엄마와 남편, 동료 등 개인적 관계에만 머무른 것만은 아니다. 드라마 <저, 정시에 퇴근합니다>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통해 일의 의미와 일의 윤리 등을 짚어보고,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과 <종이달>, <미스 슬로운> 등을 통해 여성혐오나 감정노동 등 사회문제들 속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에까지 고민을 확장시키고 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내면의 소용돌이를 직면하고 그것이 잠잠해질 때까지 객관적으로 해석하고 정리해 내야 한다. 이 시간을 마주하는 것이 보통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기에 대개는 그저 못 본 체하고 살아가곤 한다. 헌데, 저자 홍현진은 영화 속 범상치 않은 여자들을 보며, 회피했던 또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자신의 다양한 욕망들을 인지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여 명료하게 정리해 내는 데 성공했다.

글을 쓰며 담대하게 고통스러운 내면의 소용돌이를 관통해 낸 저자가 부러운 한편, 소진된 자아를 추스르기 위해 자체적으로 가졌다는 안식년을 끝내고 나온 책이니 이보다 더 큰 수확이 또 있을까 싶다.

오늘도 어디선가 여자라는 이유로 갑갑하고 억울해서 책으로 파고드는 나 같은 여성들이 있다면, 홍현진 작가의 <나를 키운 여자들>을 권한다. 분명 그들의 고민은 저자의 고민과 닿아 있을 것이고, 그들의 고민에 필요한 뭔가를 발견해 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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