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천 원짜리 연유 라테, 결국 못 마셨네요
살기 팍팍한 요즘 직장인... 소박한 미래를 꿈꾸었을 뿐인데
1인 가구 여성들이 혼자 살면서 알게 되는, 새롭게 깨닫고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들에 대해 씁니다.[편집자말]
서울 중심으로 조금씩 이사를 오는 재미도 있었고, 청소할 공간이 작은 오피스텔은 손 하나 까딱하기 싫어하는 나의 취향과도 잘 맞았다. 누구보다 담대한 깡에도 불구하고, 술에 취해 집을 착각한 윗집 남자가 우리 집 문을 열고자 번호키를 눌러대던 어느 새벽의 경악할 사건 이후 안전은 제1의 고려사항이 되었고, 그런 면에서 오피스텔은 나에게 최적의 주거형태였다.
▲ 하늘과 맞닿은 테라스에서 한 잔의 커피를 마시는 것은 나의 로망이다. ⓒ Pixabay
하지만 인간은 현실에 만족하지 않는 종족이라 하였나. 이 모든 장점을 사뿐히 지려밟을 만한 단어가 하나 생겼으니, 그 이름은 바로 '테라스'다. 내 꿈은 테라스가 있는 집에서 사는 것이다. 하늘과 맞닿은 테라스에서 차양막이 펼쳐진 테이블에 앉아 마시는 한 잔의 커피는 나의 꿈이자 로망이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디 높다. 내 월급 빼고는 다 오른 세상에 살고 있다. 폭탄이 되어 돌아온 관리비 고지서를 받고는 눈을 비비며 금액을 다시 확인해야 했고, 먹고 싶은 것을 신중히 골라 담은 장바구니 결제 예정 금액의 앞자리 수가 내 예상과 너무나도 달라 사야할 것과 사지 말아야 할 것을 다시금 냉정히 판단해야 했다.
결국 문제는 돈이다. 테라스 있는 집을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씀씀이를 줄이는 일뿐이다. 방에 훈풍이 돈다 싶으면 부리나케 달려가 재빠른 손놀림으로 보일러를 끈다. 꼬리가 길어서 방에 불을 안 끄고 다닌다는 엄마의 잔소리에도 40년간 고치지 못했던 나의 습관은 조만간 전기요금이 오른다는 한 줄 기사에 절로 고쳐졌다.
간당간당 생명줄을 힘겹게 이어가고 있는 나의 용돈도 살려내야 한다. 사야할 물건이 생기면 결국 찾아내고야 만다는 결연한 의지로 인터넷을 돌고 돌아 결국 최저가를 찾아내고, '오늘은 뭐 먹을까?' 고민하던 점심시간에는 '오늘은 뭐 나오나?'를 궁금해하며 구내식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무엇보다 점심시간의 꽃 같았던 식사 후 라테 커피 한 잔이 사치가 되었다. 거리낌 없이 들락거리던 별다방에 거리낌이 생기기 시작했고, 조금이라도 저렴한 커피를 찾아 헤매다 근방 1km 이내에서 가장 저렴하다고 결론 내려진 구내 커피숍을 이용하게 되었다.
'고작 3천 원짜리' 취급받던 커피가 '아직 3천 원이라' 다행이었다. 그래도 매일은 안 된다. 커피로 수혈이 절실한 날에만 3천 원짜리 라테가 허용되었다. 가끔씩 한 달 고생해서 '몇 천 원짜리 커피도 못 먹어야 돼?!'라며 급발진하는 날에는 전처럼 커피를 마셨지만, 확실히 예전과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오늘도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
▲ 점심시간에 마시는 한 잔의 커피가 사치가 되어 버렸다. ⓒ Pixabay
그날도 나는 달달한 연유라테가 매우 절실했다. 일이 토네이도처럼 휘몰아친 오전을 정신없이 보내고, 구내식당에서 꾸역꾸역 점심을 때운 후여서 나도 동료들도 달달하고 시원한 연유라테가 몹시도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럴 때 마시는 아이스 연유라테 한 모금은 모든 직장인을 잠시나마 천국행 급행열차에 태워주는 프리패스 아니겠는가! 자연스레 우리의 발걸음이 연유라테를 향하던 중 작년에 아파트 청약에 당첨된 직장 동료의 상황이 문득 궁금해졌다.
'입주는 언제부터 시작해?' 내년 10월에 아파트 입주가 시작된다는 동료의 얼굴에 먹구름 한 조각이 걸렸다. 잔금을 치르기 전까지 6번의 중도금을 내야하는데, 대출이자율이 올라서 중도금을 마지막에 몰아내면 대출이자만 3천만 원에 달한다는 거였다.
'엥, 뭐라고? 중도금 이자만 3천만 원?' 청약이니 중도금이니 워낙 부동산에 눈도 어둡고, 셈은 문외한인 나에겐 턱이 빠질 이야기였다. 가득이나 부담스러운 대출이었는데, 설상가상으로 대출금리가 오르면서 변동금리인 중도금의 이자가 생각지도 않게 늘어났다고 했다. 20평대의 전세에 살고 있는 나의 동료는 전세가 만료되는 몇 달 후 10평대의 집으로 옮겨 일단 중도금을 내야한다고 말을 이었다.
"아기가 있어서 10평대는 좁을 텐데."
"어쩔 수 없죠, 뭐."
휴, 작은 한숨이 이어진다. 이심전심이었는지 우리는 어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발걸음을 돌려 자연스럽게 사무실로 향했다.
"우리 그냥 커피믹스 먹자."
"그래요. 커피믹스도 맛있어."
우리는 그날 결국 연유라테를 먹지 못했다. '내 집 마련'이라는 원대한 꿈의 문고리를 잡고 있는 나의 동료도, 가시밭길을 건너야 동료의 꿈이 성취되는 것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나도 '그깟 연유라테' 한 잔이 쉽사리 넘어가지 않을 듯했다.
3천 원짜리 연유라테를 먹지 않는다고 아파트 중도금을 마련하고, 테라스 있는 집을 구하는데 도움이 될 리 만무하다. 계란으로 바위 치는 심정이 이런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오늘도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 오늘 연유라테를 참으며 아낀 3천 원이 10번이 되고, 100번이 되면 중도금이 되어, 테라스가 되어 우리에게 언젠가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품은 채 말이다.
이상은 멀고 현실은 버겁기만 하다. 가혹한 현실은 연유라테를 허락하지 않았지만, 나에겐 달달하고 맛있는 커피믹스가 있으니 걱정 없다. 나의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는 날이 언제 올는지는 미지수지만, 난 그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다. 커피믹스를 휘휘 저으며, 좀 전에 욕실에서 나오다 미처 끄지 못한 불을 끄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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