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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회사, 밤에는... 이러다 대상포진 걸렸습니다

고물가로 겸업에 나선 20대들, 내가 이중생활 하면서 알게된 것들

등록|2023.03.06 13:30 수정|2023.03.06 13:30
1인 가구 여성들이 혼자 살면서 알게 되는, 새롭게 깨닫고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들에 대해 씁니다.[편집자말]

▲ 영상 편집 프로그램과 카메라 ⓒ 정누리


대상포진에 걸렸다. 20대에 대상포진이라니. 오른쪽 귀 뒤쪽부터 이마까지 온통 수포가 피어올랐다. 불개미에 물린 것처럼 따끔한 것이, 뜨겁고 화끈거린다. 고름이 끈적하다. 종종 피곤하면 피부 발진이 올라오긴 했지만, 이처럼 얼굴까지 퍼진 적은 없었다.

의사 선생님이 오죽 피로하면 그렇냐며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다. 예상 못한 결과는 아니다. 오히려 대상포진이라 했을 때 '올 것이 왔구나'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세 달 간, 나는 너무 바쁘게 살았다. 바람에 스칠 때마다 쓰린 것은 귓바퀴가 아닌 마음이다.

올해 초였다. 나는 투잡, 쓰리잡을 뛰느라 바빴다. 월세도 공과금도 다 올랐다. 지금의 급여만으로는 부족하다. 왜 허들을 넘는 운동선수가 일정 높이까지 뛰었을 때, '아, 이건 못 넘겠는데'라고 본능적으로 느끼지 않나. 그것은 몸에서 느끼는 생존신호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턱 끝까지 차오른 물가는 위험 신호를 발동시켰다.

둘러보니 이미 친구들은 겸업을 하고 있었다. 출판사 직원이면서 심야 물류 배달원, 간호사면서 웹소설 작가, 스타트업을 다니면서 주말엔 카페 알바생. 우리들의 은밀한 이중 생활. 명함도 여러 개다. 자, 나는 어떤 새로운 가면을 써야 하나.

턱 끝까지 차오른 물가로 인한 선택

겸업을 하기 전 다행인 점은 세 가지였다. 첫째, 지금 다니는 회사가 투잡에 너그럽다는 것. 둘째, 본업의 강도가 그렇게 세지 않다는 것. 셋째, 내가 제법 멀티에 능하다는 것. 하나에 집중한 와중에도 그 다음 것을 잊지 않는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가마 할아범처럼 머릿 속의 팔이 여러 개랄까. 벽에 붙어있는 수백 개의 칸 중에서 필요한 팻말만 쏙쏙 찾아낸다. 뭐, 그런 할아버지도 치히로라는 뜻밖의 등장인물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지만. 내가 대상포진에게 KO패 당했듯.

난 '영상 제작자'라는 가면을 택했다. 그 외에 원고 청탁, 온라인스토어 창업 등 여러 개의 용돈 벌이가 있었지만 이 부분은 다음으로 미루자. 영상과 나의 인연은 깊다. 아마 13살 때의 일일 것이다. 영상을 만들어서 처음으로 돈을 번 순간말이다. 시에서 하는 UCC 대회에서 대상을 탔다. "푸르고 푸르고 푸르른…." 시청 앞 광장에서 낭송하는 할아버지를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했을 것이다.

아마 그 외에도 많은 곳을 찍었을 텐데 이상하게도 내 머릿 속에는 할아버지의 주름진 손과 아이보리색 중절모만 기억난다. 여튼 촬영한 것을 베가스(Vegas)라는 프로그램으로 불러들여서, 조각조각 내고, 그것을 다시 콜라주하고… 별 것 없는 내용이었는데 아마 참가자가 별로 없었던 것은 아닐까. 여튼 영상으로 1등을 한 것은 큰 영광이었다. 그 전까지는 글만 썼으니.

커서는 아버지가 선거에 나갈 때마다 홍보영상을 만들었다. 출판 기념회나 SNS 선전용이었다. 전문적이진 않았지만, 후보 옆에 24시간 붙어있는 PD니까 캐릭터 파악만큼은 확실했다. 만든 영상을 다같이 볼 때마다 거침없는 돌격대장이었던 국장님의 콧잔등이 새빨개졌다. 무엇보다 후보 본인인 아버지가 큰 힘을 받았다.

그 뒤로 유튜브의 급성장. 비주류였던 온라인이 주류가 되고, '부록' 수준이었던 영상 콘텐츠가 '메인'이 됐다. 때문에 다른 후보들의 영상도 종종 만들어드렸다. 학생 때 할 수 있는 꽤 쏠쏠한 용돈벌이였지만, 그 이상을 바라진 않았다. 난 전공자가 아니었으므로.

이와 별개인 완전히 제3자의 의뢰를 받은 것은 몇 년 뒤였다. 작년 겨울, 코로나에 걸렸을 때다. 일주일 동안 격리가 되니 간만에 한가하다. 휴대폰으로 유튜브나 뒤적거린다. 마침 내가 보던 채널이 편집자를 구하고 있었다. 좋은 타이밍이었다. 격리가 되지 않았다면 시간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이참에 포트폴리오나 만들어보자.

무지 열심히 했다. 코로나 때문에 눈물, 콧물 흘리며. 그러나 연락은 오지 않았다. 구독 취소를 누를까. 그러나 그건 너무 쪼잔해보이니 그만 두자. 몇 달 뒤 잊어버리고 본업에 집중하던 순간,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왔다. 그때 그 유튜버였다.

그때 너무 아쉬웠는데, 혹시 다른 유튜버를 소개시켜드려도 되겠냐고 물었다. 인연은 어디서 터질지 모른다. 회사 화장실 변기 커버 위에 앉아 농땡이 피우다 이런 전화를 받다니. 생활비가 급했던 나는 당연히 된다고 답했다.

겸업 생활을 하며 알게 된 것들
 

▲ 타임라인 ⓒ Unsplash


더욱 재밌는 것은 그들도 겸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튜버가 본업이 아니다. 회사원이면서 자영업이면서 방송을 찍는다. "글쎄요. 영상이 아무리 잘 되어도, 아직까지 회사를 관둘 생각은 없어요." 그 이유야 우리 모두가 알지 않겠는가.

안정적이고 답답한 삶과 불안정하지만 자유로운 삶 사이의 줄타기. 최근엔 대상포진이 올라온 이마를 보여줬더니, 깊이 이해한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도 야근 후 영상을 찍으러 가는 길이었다. 우리는 다른 듯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

겸업도 점점 익숙해지고, 대상포진도 일주일이 지나자 제법 가라앉고 딱지가 앉았다. 생활도 그럭저럭 잘 이어나가고 있다. 그런데 그 외에 희한한 일이 생겼다. 이상하게 회사가 좋아진다. 갑갑하던 일상이 조금 트인 느낌이 든다. 회사 네트워크 밖의 사람들을 접하다 보니, 마음이 '환기'가 된다.

바깥 생활이 치열하다는 것도, 답답한 회사가 안정적인 뒷배가 되어준다는 것도 다 까먹고 있었다. 바깥 공기와 내부 공기가 순환이 된다. 처음에 필요한 것은 생활비였는데, 이젠 돈이 아니라 나 자신을 찾기 위해 겸업을 한다. 회사를 그만 둘 맘은 없다던 유튜버에게 난 다시 물었다. 그럼 왜 돈 들여서 영상을 찍으시냐고. 그는 답했다. "그래도 재밌잖아요. 찍다보면 나다운 게 뭔지 고민도 하게 되고요."

집에 돌아와 편집 프로그램을 킨다. 작업을 하다만 클립들이 보인다. 처음엔 하나의 통 영상이었던 것이, 가위 툴로 조각조각 나있다. 지저분하고 엉망진창으로 쪼개진 타임라인을 보면 뿌듯한 맘이 든다. 내가 그만큼 공들여서 효과나 자막을 넣었다는 뜻이므로. 비단 영상 뿐이겠는가. 쪼개고 쪼개서 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삶이 너저분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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