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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망언' 대통령 연설비서관께 소설을 추천합니다

일본군 위안부 길원옥 할머니 증언 소설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

등록|2023.03.02 16:28 수정|2023.03.02 16:28

▲ 일본군 위안부 길원옥의 회고를 바탕으로 한 증언 소설 ⓒ 정진영

 
내가 태어난 곳은 평안북도 희천.
열세 살에 떠나와 산도, 들도, 강도 기억이 안 나.
만두는 꿩고기 가져 넣고, 두부 으깨 넣고, 부추 썰어 넣고...... 숙주가 빠지면 안 되지. 꿩고기가 돼지 고기하고 비교가 안 되게 맛있지.

만두를 빚다 보면 친구가 올까.
만두를 빚어, 만두를 쪄.
나는 세 개, 친구는 네 개.

그게 내 셈법이야. 일곱 개가 있으면 나는 세 개를 갖고, 친구는 네 개를 주는 게. (16쪽)

대통령의 3.1절 기념사를 작성한 연설비서관께 보내고 싶은 소설이 있습니다.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는 김 숨 작가가 2018년에 펴낸 소설입니다. 이야기의 완결성만 보면 같은 작가의 <한 명>이라는 소설도 있습니다만, 바쁜 일상을 고려해 길이가 짧은 이 책을 권해 드립니다.

이 소설은 매우 짧습니다. 책 크기도 작고요. 제 손바닥 만한 판형에 144쪽 밖에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말줄임표와 띄어쓰기가 많아서 긴 호흡으로 연결되지도 않아서 이야기라기 보다는 어느 할머니의 혼잣말처럼 들립니다.

예를 들면, 열네 살인지 열다섯 살인지, 군인이 뱀처럼 긴 칼로 머리를 내려쳤을 때 정수리에 금이 가 피가 솟구쳤는데 그 피를 닦는데 60년이 넘게 걸렸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평양에 있던 집과 가족에 대해 말합니다. 뚝뚝 끊어지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작가는 애써 연결하지 않고 조각난 채로 독자들에게 전합니다.

열세 살 어린 소녀들이 겪은 참혹한 일은 '증언' 소설이라는 부제가 있어도 믿기 어려울 수 있고, 증언에 바탕을 둔 소설이라고는 해도 어차피 소설은 허구일 뿐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한 단락에 하나의 이야기를 온전히 펴내지 못하고 되는 대로 주섬주섬 꺼내 놓는 증언들은 소설 <한 명>을 읽을 때보다 슬픔과 안타까움을 더 깊게 합니다.
 
요시모토 하나코
그 이름은 안 잊어버렸어
누가 지어주었는지 기억 안 나......
군인들이 나를 그렇게 불렀어.
뜻은 없을 거야, 아무 뜻도 없을 거야.
뜻도 없는 이름이 안 잊히네.  (19-20쪽)
 
하늘나라에도 군인이 있을까.
군인이 있는 데면 나 안 갈래.
처음 만주에 갈 때 남자하고 자는 게 뭔지도 몰랐어......

날 때렸어. 군인이 날 때렸어.
옷을 안 벗는다고, 손바닥이 아니라 모과 같은 주먹으로.
내 나이 열세 살 ......

살아 나올 수 없는 데서 살아 나왔어.

여자들이 자살하는 건 봤어.
칼로 자기 몸을 찔러서......
독한 여자들은 다시 살아나지 않았어. 섣부른 여자들만 살아났어. (27쪽) 

"혼자 겪은 일이지만 함께 기억하는 것." 작품해설에 적힌 이 말은 정부에서 3.1절을 기념하는 이유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3.1절은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을 위해 하나 뿐인 생명을 희생한 분들께 감사하며,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고 미래를 고민하는 날입니다.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던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봐야 한다"거나, "변화하는 세계사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다면 과거의 불행이 반복될 것"이라는 망언으로 고통을 더하는 날이 아닙니다.

내년에도 대통령 연설비서관은 3.1절 기념사를 준비하시겠지요. 그렇다면 아직 1년이나 시간이 있으니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를 먼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대통령의 연설이 나라 안에서는 끔찍한 인생을 견뎌온 분들에게 상처를 주고 나라 밖에서는 외교적 협상력을 낮추는 일이 없도록 문제 없이 잘 써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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