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끌어들여 대통령 만드는 데 성공한 친일파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함상훈
▲ 이승만 대한민국정부 초대 대통령 취임식 ⓒ 대통령 기록관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두 번 쫓겨났다. 1960년 4·19혁명으로 하와이 망명을 가기 35년 전인 1925년에도 불성실·무책임 등의 사유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했다.
1925년 2월 개회된 제13회 임시의정원은 3월에 들어 이승만 탄핵을 신속히 진행했다. 박은식 대통령 대리의 주도하에 3월 10일에는 이승만의 기반인 구미위원부를 임시정부 직제에서 폐지하고, 14일에는 임시의정원 의원들이 탄핵안을 제출했다. 18일에 탄핵안을 통과시킨 의정원은 이승만 심판위원회를 구성했고, 이 위원회의 결정을 받아들여 23일에 이승만을 면직하고 탄핵을 종결했다.
1948년에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 12년 뒤에 또다시 쫓겨난 것은 독재정치나 부정선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국전쟁 때 민간인을 대거 학살한 일이나 그 전에 친일 청산을 방해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저지한 일들로 인해서도 민심을 크게 잃었다. 그가 이렇게 된 원인은 당연히 그 자신에게 가장 많이 있지만, 그를 잘못된 길로 끊임없이 유혹한 친일 정당에도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민주당(한민당)에서 지도자 김성수의 지시하에 이승만에게 지속적으로 러브콜을 발신한 '이 분야 기술자'가 있었다. 1945년 11월 27일 자 <조선일보>에 한민당 선전부장직 임명이 보도된 함상훈이다.
그가 이 분야 기술자였다는 점은 한민당과 대한국민당의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국민당(민국당) 때도 선전부장을 역임한 사실로도 증명된다. 그의 민국당 선전부장 사임을 보도하면서 "동(同)씨는 한국민주당 초창기부터 7년유여(有餘) 선전부장으로 활약"했다고 말한 1952년 10월 26일 자 <조선일보> 기사는 그의 실무 능력에 대한 당시의 평가를 반영한다.
친일청산 열망이 강렬했던 해방정국하에서 한민당이 택한 생존 전략은 독립운동가 지도자를 영입해 자신들에 대한 대중의 원성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함상훈이 이끄는 선전부는 이승만 등에게 추파를 던지는 활동을 수행했다.
일제 치하에서 숙달된 기술, 친일파 정당 생존 전략에 활용
1946년 11월 30일 자 <동아일보>에서는 "이승만 박사"의 "성공을 기대하는 바이다"라는 한민당 선전부의 담화를, 이듬해 9월 27일 자 <조선일보>에서는 "조선문제를 토의할 UN 총회에 조선민족대표로 참석할 것을 요구하는 동시, 대표로는 이승만 박사를 파견함이 정당하다"는 한민당 선전부의 입장 발표를 접할 수 있다.
한민당 선전부는 자기 당 소속도 아닌 이승만을 그처럼 열렬히 응원했다. 결국 이 당이 1948년 7월 20일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과 연대해 승리를 거두었으니, 선전 실무를 이끈 함상훈의 공로도 적지 않은 셈이다. 함상훈의 선전 기술은 이른바 대동아전쟁 과정에서 훈련된 것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숙달된 기술을 해방 뒤 친일파 정당의 생존 전략에 활용했던 것이다.
그가 태어난 때는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2년 전인 1903년 10월 25일이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19권은 본적지가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가회동이라 하고,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은 출생지가 황해도 송화군이라 말한다.
1928년에 와세다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이 시절에는 의식이 깨어 있는 청년이었다. 위 진상규명보고서는 그가 좌우합작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의 도쿄지회 회원이었다고 하고, <친일인명사전>은 신간회의 경성지회 회원이었다고 말한다.
25세 나이로 졸업한 해에 <동아일보> 기자가 된 그는 두 달 만에 퇴사했다가 이듬해 재입사했다. 그런 뒤, 1933년 <조선일보>로 이적해 정치부장이 되고, 다음 해에 편집국 차장을 겸했다.
4년 뒤 그는 언론 선배를 상대로 하극상을 벌인다. 아홉 살 많은 1894년생이자 <동아일보> 2년 선배인 <조선일보> 주필 서춘에게 "이완용보다 더한 자"라고 막말을 했다. 서춘이 이완용보다 더하지는 않았겠지만 비슷한 부류인 것은 확실했다. 서춘의 이름도 <친일인명사전> 제2권과 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8권에 실려 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에 서춘이 그런 욕을 먹은 것은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기사를 작성"하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항명하는 편집국 차장 함상훈을 억누르지 못한 서춘은 그 뒤 편집국장 김형원과도 대립하다가 11월에 동반사퇴했다. 김형원도 <친일인명사전> 제1권에 등재돼 있다.
윗선 둘의 동반사퇴로 1938년 1월부터 편집국장을 맡게 된 함상훈은 그 자신도 "이완용보다 더한 자"가 됐다. <친일인명사전>은 "1937년 7월 이래 주필 서춘과 사장 방응모의 주도로 전쟁에 적극 협력하는 방향으로 바뀐 <조선일보>의 논조를 (함상훈도) 바꾸지는 못했다"라고 말한다.
친일파 서춘은 들이받았지만 그 위의 방응모까지는 들이받지 못한 함상훈은 결국 서춘과 다를 바 없는 인물이 됐다. "이후부터 친일단체에서 활동을 하는 한편, 신문·잡지에 다수의 일제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글을 기고했다"고 위 사전은 알려준다.
이승만이 만든 세상, 친일파들이 원하는 세상
▲ 1977년 1월 4일 자 <동아일보 >에 실린 부고 ⓒ 동아일보
함상훈의 부역 행위는 그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1940년 8월 이후에는 아예 일본의 녹을 받으며 글을 쓴 기간이 있었다. 조선총독이 회장과 이사를 임명하고 총독부 재무국이 감독하는 조선금융조합연합회의 기관지인 <반도의 빛>에서 시국 해설 기사를 연재하기도 했다.
또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등에도 글을 기고했다. 거액은 아니지만 친일재산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됐던 것이다. 그의 친일은 이 외에도 배영동지회·임전대책협의회·조선임전보국단·조선언론보국회 등을 통해서도 전개됐다.
그는 전체적인 그림을 조망하며 친일 기사를 쓰는 위치에 있었다. <반도의 빛>에서 시국 해설 기사를 쓴 것도 그렇고, 세계정세를 분석하는 여타의 기사들을 쓴 데서도 이를 느낄 수 있다.
예컨대, 1942년 3월호 <신시대>에 기고한 '동아공영권과 민족정책'에서는 동경 90도에서 180도까지의 지역이 일본제국 영역이 되면 독립국과 자치국 등을 아우르는 공존공영권이 형성되리라고 썼다. 대략적으로 미얀마에서 뉴질랜드까지인 이 영역이 일본 땅이 되면 그런 세상이 도래하리라고 썼던 것이다. 이렇게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과정에서 한층 단련된 선전술이 해방 뒤 김구·이승만 등을 겨냥한 한민당 선전전에 쓰였던 것이다.
그는 한민당뿐 아니라 미군정에서도 비슷한 업무를 했다. 군정청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에서도 공보부장이었다. 8·15 뒤에도 경력 단절 없이 하던 일을 쭉 했던 것이다.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향한 한민당의 구애 작전은 결국 성공했다. 이승만을 끌어들여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성공함으로써 자신들의 이미지를 어느 정도 세탁했다.
대선 직후 권력투쟁 과정에서 이승만과 척을 지게 됐지만, 이승만이 만든 세상은 결국 친일파들이 원하는 세상이었다. 이승만 정권이 1949년 6월 6일 경찰력을 동원해 반민특위를 공격하고 친일청산을 와해시킨 사실은 한민당과의 제휴 과정에서 친일파의 사냥개로 변해버린 이승만의 모습을 반영한다. 이승만은 한민당과 등졌지만 친일파 세력과는 등지지 못했다. 한민당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한민당의 선전전은 그런 면에서 성공작이었다. 이를 이끈 실무 작업의 선두에 친일 언론인 함상훈이 있었다. 그가 주도한 선전전은 친일파들의 지위와 재산이 해방 뒤에도 타격을 입지 않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친일은 해방정국하에서 완성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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