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의 착각, 일본에선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명백한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마저 부정... 범죄 은폐하는 가해자가 파트너?
한국 정부가 3월 6일 끝내 일본 전범 기업 미쓰비시와 일본제철이 갚아야 할 배상금을 한국 기업이 대신 내는 것으로 결정하고 이를 '강제징용 해결책'이라고 발표했다. 일본 정부의 직접 사과와 전범 기업의 사죄 또한 없는 결정이었다. 물론 피해자들의 동의도 없었다.
2018년 우리 대법원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가 불법이며 일본 기업이 불법 행위를 했다"는 점을 분명히 한 역사적 판결을 내렸다. 이는 일본 정부가 강제징용(강제동원) 피해를 인정하고 제국주의 범죄를 사죄하게끔 이끄는 의미가 있었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이 중대한 판결을 무시하고 일본의 전쟁 범죄와 일본 기업의 조선인 노동자 착취에 면죄부를 주고 만 것이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이날 발표 후 가진 일문일답에서 "과거사에 대해서 일본으로부터 새로운 사죄를 받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통절한 반성과 또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한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의 정신을 계승해 나가기를 바란다"라고 했다(관련기사: 박진 "우리 주도의 대승적 결단... 마지막 기회라 생각" https://omn.kr/22yqd).
같은 날 오후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이 약식 기자회견에서 이에 찔끔 화답하는 발언을 했지만(관련기사: 일 외무상 "한국 정부 해결책, 한일관계 건전한 관계로 되돌려" https://omn.kr/22yuw), 과연 일본이 진정 사죄하고 있을까? 윤석열 정부의 이런 결정으로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가 열릴 수 있을까?
"사실인지 아닌지 역사가들에게 맡기겠다"
지난 2월 21일에 나온 도쿄도지사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의 발언은 이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 것이다. 정례 도의회에서 한 의원이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관해 질문하자 고이케 지사는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역사가들에게 맡기겠다"라고 답변했다.
올해는 관동대학살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 뜻깊은 해에 역사를 부정하는 대단히 위험한 발언을 한 것이다. 한·일 양국의 역사학계와 일본의 양심적 시민들에 의해 차고 넘칠 정도로 학살의 진실에 관한 자료와 연구 성과가 쌓여있다. 고이케 지사가 이를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한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
1923년 9월 2일 계엄령이 내려지자 군대의 행동은 재난 구호에서 치안 유지로 바뀌었다. 나라시노(習志野) 기병 15연대의 출동 목적은 "폭동을 일으킨 조선인을 진압하라"는 것이었다. 이 연대의 병사였던 에츄우야 리이치(越中谷利一)는 <관동대지진의 회상>을 남겼는데 그중의 한 대목이다.
군대가 직접 조선인을 적으로 간주하고 살육한 수많은 사례 중 하나다.
자경단에 의해 일어난 끔찍한 만행도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회사원이었던 타바타 기요시(田畑潔)는 이렇게 증언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혼조 오쿠라다리 부근에서 목격된 일이다. 재일사학자 강덕상이 쓴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2005, 역사비평사 간)에 기록된 장면이다.
문제는 이런 자경단의 만행을 일본 정부가 부추기고 뒷배를 봐주었다는 사실이다. 시부야의 자경단원이었던 하야시 히데오(林英夫)는 9월 2일 육군 소장이 "자네들은 이것을 손에 들고 경계하다가 조선인이면 닥치는 대로 베어버려!"라며 몇 자루의 단도와 일본도를 가리켰다고 증언했다. 재향군인회 회원이었던 가와사키 다카쓰(高津)는 "근위보병 제1연대가 사용하던 총 30자루와 실탄 600발을 대여받음"이라고 회고록을 남겼다.
그렇다면 왜 이런 끔찍한 만행이 저질러졌을까? 지진 직후 수십만의 이재민이 황궁 앞과 야스쿠니 신사 앞에까지 밀려들며 노숙하게 되자 일본 정부는 체제의 위기감을 느꼈다. 몇 해 전인 1918년 쌀 폭동에서 민중의 저항을 십분 경험한 터에 난민의 절망감이 어디로 튈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야마모토 곤베에 내각은 일본 민중이 자칫 천황제에 대한 항거로 나설까 두려워 계엄령을 해결책으로 택했다. 일본 헌법에서 계엄령은 외국과 교전이 벌어지거나 내란 상황이어야만 발령할 수 있지만 이를 무시했다.
명분은 '조선인 습격설'이었다. 계엄군대는 '조선인 척살과 검속'을 목적으로 출동했다. 더불어 관동지방에 급속히 퍼진 유언비어에 일본의 민중은 관의 부추김을 받아 자경단을 만들었다. 그 후 조선인 노동자와 유학생은 희생양이 되었고 무려 6661명이 학살당한 것이다(관련기사: 끔찍한 살인 숨기는 일본, 진정 우리의 파트너인가 https://omn.kr/22xwy).
일본 사법성은 지진 이후 조선인의 범죄를 조사했다. 단 한 건의 습격도, 방화도,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사례도 밝히지 못했다. 반면 군대, 경찰, 자경단의 학살 행위는 넘쳐났다. 그러나 '군대의 범죄는 군대 작전상 정당한 임무 집행이었다', '자경단의 범죄는 혼란의 와중에서 애국심을 발휘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며 대부분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다. 결국 학살에 대한 형사처벌은 아예 이루어지지 않았고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 은폐와 부인에 급급했다.
역사적 진실이 이러한데도 고이케 유리코 지사는 "명백한 사실인지 여부를 밝혀야 한다"고 망언을 한 것이다.
조선인 희생 추도하다가 태도 돌변
한편 고이케 유리코는 도지사로 취임한 이듬해부터 요코아미초 공원의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앞에서 해마다 9월 1일에 열리는 추도식에 추도사를 보내지 않았다.
명분은 자민당 의원이 제공했다. 2017년 3월 2일 도쿄도 의회에서 코가 토시아키(古賀俊昭)는 "관동대지진 당시 불법 행위를 저지르고 그들을 따르도록 선동한 한국 독립 운동가들 때문에 희생자가 나왔다"는 황당한 주장을 펼쳤다. 그러면서 고이케 지사에게 추도사를 보내지 말라고 요구했다. 고이케는 이에 화답하듯 2017년 9월 1일에 열린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추도식에 추도사를 보내지 않았고 지금까지 추도문 발송을 거부하고 있는 상태다.
도쿄도 스미다구 요코아미초 공원에 있는 추도비는 관동 일원에 산재해 있는 여러 추도비 중에서 의미가 각별하다. 우선 관동대지진과 태평양 전쟁 시기 희생된 일본인을 기리는 도쿄 위령당 옆을 택해 일본의 시민단체가 1973년에 만들었고 도쿄도 의회도 건립에 찬성했다는 점이다. 또 이 비문은 피해자가 '조선인'이고 '학살'이었음을 분명히 하면서 "일본과 조선 두 민족 간의 영원한 친선의 힘이 될 것을 기대합니다"라는 마지막 문장을 담고 있다.
이 추도비 건립 이후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행사 실행위원회'는 해마다 이 비 앞에서 조선인 영령을 기리는 추도식을 열었고 역대 도쿄도지사는 정파에 상관없이 40여 년 동안 정중한 추도문을 보냈다.
그런데 고이케는 이 뜻깊은 역사를 무시하고 추도문 발송을 거부한 것이다. 그 후 상황은 계속 악화되어 추도비를 철거하라는 공격까지 벌어지고 있다. 앞서 언급한 도쿄도 자민당 의원 코가 토시아키는 2017년에 요코아미초 공원 내 '추도비를 철거하라'고 도쿄도에 요구했다. 자민당 국회의원 아카이케 마사아키(赤池誠章)도 마찬가지 취지의 발언을 했다.
한편 고이케가 추도사를 보내지 않음과 동시에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앞에서 일본 극우들의 혐한 시위가 이어졌다. 2017년에는 일본 여성의 모임 '소요카제'가 요코아미초 공원에서 "조선인 학살은 누명이다"라고 주장했고, 2019년에는 극우들이 추도식을 방해해서 몸싸움까지 일어났다.
일본의 극우는 윤석열 정부의 백기 투항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손뼉치고 있을 것이다. 을사오적의 이완용, 정미칠적의 이병무를 바라보듯 그윽한 눈길을 박진 장관에게 보내지 않을까?
도쿄도지사 고이케 유리코는 한국 정부의 이번 결정을 보면서 혹여 관동대학살을 부정하는 발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추도식을 금지하고 추도비 철거 조치까지 취하지 않을까? 과연 윤석열 정부는 이 후과를 어떻게 감당할 셈인지 정녕 모를 일이다.
2018년 우리 대법원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가 불법이며 일본 기업이 불법 행위를 했다"는 점을 분명히 한 역사적 판결을 내렸다. 이는 일본 정부가 강제징용(강제동원) 피해를 인정하고 제국주의 범죄를 사죄하게끔 이끄는 의미가 있었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이날 발표 후 가진 일문일답에서 "과거사에 대해서 일본으로부터 새로운 사죄를 받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통절한 반성과 또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한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의 정신을 계승해 나가기를 바란다"라고 했다(관련기사: 박진 "우리 주도의 대승적 결단... 마지막 기회라 생각" https://omn.kr/22yqd).
같은 날 오후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이 약식 기자회견에서 이에 찔끔 화답하는 발언을 했지만(관련기사: 일 외무상 "한국 정부 해결책, 한일관계 건전한 관계로 되돌려" https://omn.kr/22yuw), 과연 일본이 진정 사죄하고 있을까? 윤석열 정부의 이런 결정으로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가 열릴 수 있을까?
"사실인지 아닌지 역사가들에게 맡기겠다"
▲ 일본 도쿄도지사 고이케 유리코 ⓒ 연합/EPA
지난 2월 21일에 나온 도쿄도지사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의 발언은 이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 것이다. 정례 도의회에서 한 의원이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관해 질문하자 고이케 지사는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역사가들에게 맡기겠다"라고 답변했다.
올해는 관동대학살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 뜻깊은 해에 역사를 부정하는 대단히 위험한 발언을 한 것이다. 한·일 양국의 역사학계와 일본의 양심적 시민들에 의해 차고 넘칠 정도로 학살의 진실에 관한 자료와 연구 성과가 쌓여있다. 고이케 지사가 이를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한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
1923년 9월 2일 계엄령이 내려지자 군대의 행동은 재난 구호에서 치안 유지로 바뀌었다. 나라시노(習志野) 기병 15연대의 출동 목적은 "폭동을 일으킨 조선인을 진압하라"는 것이었다. 이 연대의 병사였던 에츄우야 리이치(越中谷利一)는 <관동대지진의 회상>을 남겼는데 그중의 한 대목이다.
9월 2일 정오 조금 전 식량과 말먹이 실탄 60발을 지급받고 질풍처럼 지바 거리를 달려갔다. 가메이도(龜戶)에 도착해 행동 개시로 먼저 '열차 검색'을 해 조선인을 모두 끌어내렸다. 칼날과 총검 아래 그들은 차례차례 거꾸러졌다. 일본인 피난민 가운데서 환호의 소리 "원수! 조선인은 모두 죽여라"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 연대는 이것을 '피의 잔치의 시작'으로 하여 그날 저녁부터 밤중까지 본격적인 조선인 사냥을 했다.
군대가 직접 조선인을 적으로 간주하고 살육한 수많은 사례 중 하나다.
자경단에 의해 일어난 끔찍한 만행도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회사원이었던 타바타 기요시(田畑潔)는 이렇게 증언했다.
요코하마의 나카무라초 주변은 싸구려 여인숙이 많아 조선인 노무자가 수백 명 정도 있었는데 자경단은 조선인을 빙 둘러 에워싸고는 손에 들고 있던 죽창이나 칼로 조선인의 몸을 푹 찔렀다. 머리를 푹 찌르는 자, 눈에 죽창을 찔러 넣는 자, 귀를 베어내는 자, 등을 패는 자, 발등을 갈라내는 자 이 세상의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은 처참한 장면이 전개되었다. 피투성이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아직 숨이 붙어있는 사람에게는 매단 채로 린치를 가했다. 인간의 행동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지옥의 영장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혼조 오쿠라다리 부근에서 목격된 일이다. 재일사학자 강덕상이 쓴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2005, 역사비평사 간)에 기록된 장면이다.
장작불 위로 4, 5명의 남자들이 조선인의 손과 발을 큰 대(大)자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잡고서 태웠습니다. 불에 구워버린 것이지요. 불에 타자 피부가 다갈색이 되었습니다. 태워지고 있던 조선인은 비명을 질러댔지만 이미 힘없는 비명이었습니다. 그렇게 살해된 조선인이 차례차례 개울에 던져졌습니다.
문제는 이런 자경단의 만행을 일본 정부가 부추기고 뒷배를 봐주었다는 사실이다. 시부야의 자경단원이었던 하야시 히데오(林英夫)는 9월 2일 육군 소장이 "자네들은 이것을 손에 들고 경계하다가 조선인이면 닥치는 대로 베어버려!"라며 몇 자루의 단도와 일본도를 가리켰다고 증언했다. 재향군인회 회원이었던 가와사키 다카쓰(高津)는 "근위보병 제1연대가 사용하던 총 30자루와 실탄 600발을 대여받음"이라고 회고록을 남겼다.
그렇다면 왜 이런 끔찍한 만행이 저질러졌을까? 지진 직후 수십만의 이재민이 황궁 앞과 야스쿠니 신사 앞에까지 밀려들며 노숙하게 되자 일본 정부는 체제의 위기감을 느꼈다. 몇 해 전인 1918년 쌀 폭동에서 민중의 저항을 십분 경험한 터에 난민의 절망감이 어디로 튈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야마모토 곤베에 내각은 일본 민중이 자칫 천황제에 대한 항거로 나설까 두려워 계엄령을 해결책으로 택했다. 일본 헌법에서 계엄령은 외국과 교전이 벌어지거나 내란 상황이어야만 발령할 수 있지만 이를 무시했다.
명분은 '조선인 습격설'이었다. 계엄군대는 '조선인 척살과 검속'을 목적으로 출동했다. 더불어 관동지방에 급속히 퍼진 유언비어에 일본의 민중은 관의 부추김을 받아 자경단을 만들었다. 그 후 조선인 노동자와 유학생은 희생양이 되었고 무려 6661명이 학살당한 것이다(관련기사: 끔찍한 살인 숨기는 일본, 진정 우리의 파트너인가 https://omn.kr/22xwy).
일본 사법성은 지진 이후 조선인의 범죄를 조사했다. 단 한 건의 습격도, 방화도,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사례도 밝히지 못했다. 반면 군대, 경찰, 자경단의 학살 행위는 넘쳐났다. 그러나 '군대의 범죄는 군대 작전상 정당한 임무 집행이었다', '자경단의 범죄는 혼란의 와중에서 애국심을 발휘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며 대부분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다. 결국 학살에 대한 형사처벌은 아예 이루어지지 않았고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 은폐와 부인에 급급했다.
역사적 진실이 이러한데도 고이케 유리코 지사는 "명백한 사실인지 여부를 밝혀야 한다"고 망언을 한 것이다.
조선인 희생 추도하다가 태도 돌변
▲ 도쿄 위령당사진 오른쪽 공사 가림막 뒤편으로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가 서 있다. ⓒ 민병래
한편 고이케 유리코는 도지사로 취임한 이듬해부터 요코아미초 공원의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앞에서 해마다 9월 1일에 열리는 추도식에 추도사를 보내지 않았다.
명분은 자민당 의원이 제공했다. 2017년 3월 2일 도쿄도 의회에서 코가 토시아키(古賀俊昭)는 "관동대지진 당시 불법 행위를 저지르고 그들을 따르도록 선동한 한국 독립 운동가들 때문에 희생자가 나왔다"는 황당한 주장을 펼쳤다. 그러면서 고이케 지사에게 추도사를 보내지 말라고 요구했다. 고이케는 이에 화답하듯 2017년 9월 1일에 열린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추도식에 추도사를 보내지 않았고 지금까지 추도문 발송을 거부하고 있는 상태다.
도쿄도 스미다구 요코아미초 공원에 있는 추도비는 관동 일원에 산재해 있는 여러 추도비 중에서 의미가 각별하다. 우선 관동대지진과 태평양 전쟁 시기 희생된 일본인을 기리는 도쿄 위령당 옆을 택해 일본의 시민단체가 1973년에 만들었고 도쿄도 의회도 건립에 찬성했다는 점이다. 또 이 비문은 피해자가 '조선인'이고 '학살'이었음을 분명히 하면서 "일본과 조선 두 민족 간의 영원한 친선의 힘이 될 것을 기대합니다"라는 마지막 문장을 담고 있다.
이 추도비 건립 이후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행사 실행위원회'는 해마다 이 비 앞에서 조선인 영령을 기리는 추도식을 열었고 역대 도쿄도지사는 정파에 상관없이 40여 년 동안 정중한 추도문을 보냈다.
▲ 요코아미초 공원에 있는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피해자가 조선인이고 학살당했음을 비문에 분명히 밝힌 추도비다. ⓒ 민병래
그런데 고이케는 이 뜻깊은 역사를 무시하고 추도문 발송을 거부한 것이다. 그 후 상황은 계속 악화되어 추도비를 철거하라는 공격까지 벌어지고 있다. 앞서 언급한 도쿄도 자민당 의원 코가 토시아키는 2017년에 요코아미초 공원 내 '추도비를 철거하라'고 도쿄도에 요구했다. 자민당 국회의원 아카이케 마사아키(赤池誠章)도 마찬가지 취지의 발언을 했다.
한편 고이케가 추도사를 보내지 않음과 동시에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앞에서 일본 극우들의 혐한 시위가 이어졌다. 2017년에는 일본 여성의 모임 '소요카제'가 요코아미초 공원에서 "조선인 학살은 누명이다"라고 주장했고, 2019년에는 극우들이 추도식을 방해해서 몸싸움까지 일어났다.
일본의 극우는 윤석열 정부의 백기 투항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손뼉치고 있을 것이다. 을사오적의 이완용, 정미칠적의 이병무를 바라보듯 그윽한 눈길을 박진 장관에게 보내지 않을까?
도쿄도지사 고이케 유리코는 한국 정부의 이번 결정을 보면서 혹여 관동대학살을 부정하는 발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추도식을 금지하고 추도비 철거 조치까지 취하지 않을까? 과연 윤석열 정부는 이 후과를 어떻게 감당할 셈인지 정녕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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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타바타 기요시(田畑潔)의 증언은 「우시오(潮)」 1971년 9월호에 나온다. 여기서는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2005, 역사비평사 간) 229쪽에 축약해 재인용했다
② 하야시 히데오와 가와사키 다카쓰의 증언은 각각 「우시오(潮)」 1971년 9월호와 일본사법성조사서에 나온다. 여기서는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2005, 역사비평사 간) 206쪽과 211쪽에서 재인용했다.
③ 한일양국의 시민단체는 지난 3월1일 고이케유리코 지사의 망언에 대한 항의문을 발표한 바 있다. 아래는 그 전문이다
[한-일 공동성명] 코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 망언에 대한 항의문
간토 대지진 학살 100년에 즈음하여 고이케 도지사의 발언에 항의합니다.
우리는 올해, 2023년 9월 간토 대지진 100주기를 맞아 조선인 학살 및 중국인 학살 피해자 추도에도 그 책임 추궁에 착수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2월 21일 도쿄도 정례 도의회에서 한 의원이 간토대지진 당시 다수의 조선인 학살에 관한 질문을 했고, 코이케 유리코 도지사는 “무엇이 명백한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역사가가 밝혀야 할 문제이다”라고 답변한 것으로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우리는 코이케 도지사의 이 답변에 대해 놀라움과 함께 깊은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간토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에 대해서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역사 연구자들이 실증적 연구와 수많은 증언의 수집과 분석을 통해 학살의 역사적 실체를 밝혀왔습니다. 또한 내각부에 속하는 중앙방재회의에 의한 「재해훈련 계승에 관한 전문조사회 보고서」(2008년 3월)의 제2편 「1923년 간토대지진」에서 내무성, 군부, 관헌, 유언비어, 그리고 자경단이 대지진 시 조선인 학살에 어떻게 관여하고 있었는지 상세하게 보고하고 있습니다.(79-122쪽, 179-205쪽, 214-215쪽). 코이케 도지사의 답변은 이러한 역사 연구의 성과와 중앙 방재 회의의 보고에 대한 무지를 의미하는 것입니까.
1973년 9월 이래 도쿄도 지사가 매년 9월 1일 추모식에 보내온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관한 추모문을 코이케 도지사는 지사로 취임한 이듬해인 2017년 9월부터 오늘까지 중단해 왔습니다.
그 경위를 되돌아보면 앞선 고이케 도지사의 답변이 무지에서가 아니라 역사 연구의 성과와 중앙방재회의 보고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적인 언동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점은 2017년 8월 25일 열린 정례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대한 코이케 도지사의 답변으로 보아 분명합니다. 그 기자회견에서 코이케 도지사는 그 역사를 학살로 볼 것인지 아닌지는 “다양한 역사인식이 있을 것 같다”고 각각의 역사 인식 차이의 문제로 대치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큰 재해와 그에 이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돌아가신 분”이라는 표현을 통해 시종일관 “학살”이라는 말을 피하면서 재해 희생자와 학살 희생자를 구분하지 않고 추모한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입니다.
코이케 도지사의 이런 생각으로부터 지난 2월 21일의 발언이 나왔다는 점을 우리는 간과할 수 없습니다.
재해 희생자의 죽음과 학살 희생자의 죽음을 동등하게 다루면서 학살의 역사적 사실 인식에서 도피하고, 그에 대한 국가와 행정당국의 책임을 불문에 부친다는 생각은 전제 국가의 폭군이 아닌 한 오늘날의 세계에서 전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며, 도쿄도 행정의 최고 책임자로서도 인간으로서도 부끄러운 자세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간토대지진 학살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코이케 도지사의 이러한 자세를 단호히 규탄하고 항의하고자 합니다.
2023. 3. 1
(韓) 간토학살 100주기 추도사업 추진위원회
(日) 간토대진재 조선인학살 100주년 희생자추도 및 책임추궁행동 실행위원회
간토대진재 조선인·중국인학살 100년 희생자 추도대회 실행위원회
<한국 단체 소개>
간토학살 100주기 추도사업 추진위원회
1923제노사이드연구소,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겨레하나, 기억과평화 사회적협동조합, 김대중이희호기념사업회, 김복동의 희망, 독립유공자유족회,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대한불교조계종 용산불교역사문화계승단,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과거사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 민족작가연합,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사단법인 평화디딤돌(, 사단법인 평화를일구는사람들, 삼균주의청년연합회, 삼균학회, 서울민족예술단체총연합, 순국선열유족회, 시민모임 독립,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여성교회, 역사문제연구소, 우리학교와 아이들을 지키는 시민모임, 우사김규식연구회, 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을위한 정의기억연대, 자립지지공동체,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 조소앙선생기념사업회,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평평해, 평화협정운동본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정의평화위원회, 한국노동조합총연맹,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한국진보연대, 한국YMCA전국연맹, 한일민족문제학회, 한일화해와평화플랫폼, 한터역사문화연구회, 흥사단, KIN지구촌동포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