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30대 지나면 '그만 나가'라고 하는 도시죠"
[인터뷰] 최지수 작가·일러스트레이터
▲ 최지수 작가·일러스트레이터 ⓒ 장은혜
흰 종이 위에 길이, 폭, 높이를 나타내는 세 직선을 교차시키니 공간이 생겨난다. 시멘트로 만든 건물과 간판, 보도블록과 도로, 나무, 사람을 한쪽 귀퉁이부터 꼼꼼하게 그려나간다. 여행과 일상을 통해 도시 공간을 관찰하는 일러스트레이터 최지수 작가의 작품 세계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요소들은 무심한 듯 보이지만 작은 서사들로 서로 얽혀있다. 도시에 살아가는 우리의 삶처럼 말이다. 지난 2019년에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포스터를 최 작가 스타일로 그린 포스터가 대중적인 화제를 낳기도 했다. 최근에는 그가 삽화를 그린 어린이 도서 <아침으로 곤충을>이 영국 왕립학회 영피플 북프라이즈(Young People's Book Prize)가 선정하는 '어린이 베스트 과학도서 후보'로 선정됐다.
그는 자기 작품에 사람이 주도적으로 그려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맥락이 그리기 너무 어려워서 그동안은 많이 그리지 못했다″며 "앞으로는 그리기가 어려워도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가진 작업을 늘려가려고 한다"라고 답했다. 다음은 일문일답이다.
<기생충> 포스터 그리자 '최지수가 누구야?'
- <아침으로 곤충을>이 어린이 베스트 과학도서 후보로 선정된 것을 축하해요. 도시를 다룬 일러스트레이터 중에는 상당히 유명 작가가 된 것 같은데 어떠세요?
"사실 어디 가서 '작가입니다', '일러스트레이터예요'라고 소개하지만 스스로 유명하다고 느낄 일이 별로 없어요.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몇 만 명씩 되는 것도 아니고, 그림을 그리면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도 아니고.(웃음) 그냥 운 좋게 그동안 좋은 프로젝트들을 많이 만나서 주목을 받은 것 같아요."
- 의외네요. 인터뷰도 많고 해외 작업이 많아서 당연히 인지도와 팬도 많을 줄 알았어요.
"작업을 많이 하긴 하는데, 해외 유명 플랫폼에 실려도 그림 자체에 주목하지 작가에게 조명이 떨어지는 일은 별로 없어요. 혹시 있더라도 내 이름과 같은 아이돌이 있으면 검색을 해도 저를 찾을 수가 없어요(아이돌 그룹 'ITZY'의 리아 본명이 최지수다). <기생충> 포스터 작업을 하면서 처음으로 사람들이 제 이름을 거론하면서 웅성웅성하는 걸 봤어요. 영화 '덕후'들이 제 그림을 보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죠."
▲ 최지수 작가가 그린 <기생충> 프랑스판 블루레이 커버 아트 ⓒ The jokers films
- <기생충> 포스터에 대해 인상 깊었던 댓글이 있었나요?
"개인적으로는 작품 속에 이야기를 숨기고, 관객이 읽어내 주길 바랬어요. <기생충>에서 복숭아가 중요한 영화적 소재인데, 제 작품에서 계단에 굴러떨어지는 복숭아를 보고 '이게 신분 상승의 수단이면서 욕망이라는 중의적인 의미를 표현한 것 같다'는 댓글이 있더라고요. 기분이 좋았죠."
- 2022년에 작업한 <아침으로 곤충을>은 어린이 과학도서예요. '바퀴벌레 우유' 등 성인의 시각에서는 기이할 수 있는 내용을 발랄하고 재밌게 표현해주셨어요. 어린이 도서 작업은 처음인 것으로 아는데, 작업 과정은 어땠나요?
"원서는 영국 독립출판사 노브로우(Nobrow Press) 작품이에요. 제 인스타그램을 봤다고 하면서 첫 연락이 왔어요. 일단 일러스트레이터가 책 작업에 섭외될 때는 안정적인 작업역량과 성실성이 중요해요. 양질의 작업을 안정적으로 뽑아낼 수 있어야 하고, 작업 기간이 긴 책의 특성상 성실하게 소통에 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아마 그런 부분에서 제가 점수를 얻었던 것 같아요."
- 한 장씩 그리는 일러스트와 또 다른 면이 있었을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하면 좀 힘들었어요. 어린이 도서니까 그림을 재밌게 그리고 싶지만, 과학 도서니까 정확히 그리면서 꼭 표현해야만 하는 요소도 있기 때문에 두 가지를 절충하는 게 어렵더라고요. 가령, 출판사에서 '하수처리 시설 예쁘게 그려주세요'라거나, '똥 발전기는 재밌게 그려주세요' 같은 요청이요. 또 노브로우 출판사 자체가 그림책에 대한 미술적 완성도가 높은 브랜드라 출판사가 요구하는 미적 기준을 맞추어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고요."
- 이 책의 부제가 '지구를 구하는 놀라운 방법들'이에요. 평소 기후위기에 관심이 좀 있었나요? 삽화를 그리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친구들 사이에서 제 별명이 '걱사'예요. 걱정 사서 한다고. 겁이 정말 많은 스타일인데, 어느 정도냐 하면, '2050년이 되면 인류가 살 수 있는 땅은 캐나다와 북유럽만 남고 나머지는 다 사막이 된다'는 말에 캐나다 이민을 알아볼 정도예요. 앞으로 한국 기온이 46도가 된다고 하는데, 작업을 하면서 '어른인 나도 이렇게 무서운데 아이들은 얼마나 더 무서울까. 자라나는 친구들은 기후위기, 환경 위기에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고 이 흐름을 막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최지수 작가가 그린 <아침으로 곤충을> 책 표지 ⓒ 너머학교
그리기 쉬운 건 도시, 가장 어려운 건 사람
- 작품이 대부분 도시의 풍경을 다루는데, 묘하게 힐링이 되어요. 작품에서 인물을 부각하지 않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기본적으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림에 넣으려고 하는데, 인물이 부각되면 이야기가 잘못 전달되기 쉽더라고요. 사람마다 다른 요소들을 안 보고 인물에서 메시지를 읽어내려고 하니까. 사람 얼굴이나 표정을 잘 그리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예요. 그려도 옷차림이나 움직임(motion) 정도를 그리고요."
- 아이소메트릭(Isometric) 기법(대상물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기법으로 흔히 건축 디자인 투시도를 그릴 때 사용된다)을 주로 사용하는 이유도 왜곡을 줄이기 위해서인가요?
"소실점을 기준으로 그림을 그리면 어쩔 수 없이 물건들이 가려지거나 왜곡이 일어나요. 아이소메트릭 기법은 주로 건축에서 많이 쓰는 양식인데, 왜곡 없이 최대한 많은 요소를 드러내야 작품을 읽는 재미가 있을 테니까요."
- 인물은 자세히 그려지지 않지만 대신 건물이나 소품 등은 매우 빽빽하게 들어가 있더라고요. 여기에도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성장 과정이 하나의 이유인 것 같아요. 어렸을 때 달동네에서 살았는데요, 공간이나 공간에 놓여있는 물건들이 그 자체로 말을 한다는 걸 비교적 일찍 깨달았던 것 같아요. 동네 부동산 중개소 가서 아파트 조감도 같은 거 보고, 동네 지도 그리는 거 좋아하고 그랬어요.
또 이건 약간 모순적이기도 한데, 실제 제 공간에는 물건을 많이 두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릴 때는 시끌시끌한 요소가 많은 공간을 선호해요. 대학 졸업 작품도 온갖 소품들로 가득 찬 가상의 박람회장을 만들었는데 작품 가로 크기가 3미터 정도 됐었어요. 동기들이 '너 그렇게 그리다간 죽는다'고 할 정도로요.(웃음)"
- 그런 화풍을 가지게 된 이유는 뭘까요?
"어떤 공간에 무엇이 들어있는 게 재밌을까 상상하다 보면 하나하나 채우게 되는 것 같아요. 현실에서는 그러지 못하지만, 그림에서는 '풀소유'할 수 있잖아요? 무한정으로 두고 꾸밀 수 있으니까. 그림에서 뭔가 소유욕을 발휘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돼요."
▲ <아침으로 곤충을> ⓒ 장은혜
- <서른 살에 스페인>, <갯강구 씨, 오늘은 어디 가요?> 등 여행작가로도 저서를 몇 권 내셨는데, 좋아하는 여행지는 어디인가요?
"어렸을 때는 도시 근교나 애매하게 도시적인 곳 말고 완전 도시를 좋아했어요. 골목이 많고 건물이 빽빽한, 시각적으로 복잡한 곳들이요. 최근 갔던 곳 중에는 대만이 좋았어요. 대만이 엄청 도시적인데, 기후가 덥다 보니까 도시 한가운데 밀림처럼 숲이 있어서 초현실적이면서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잘 알고 익숙하지만, 반전이 있는 느낌?"
- 갯강구라고 하면 그게 뭔지 사람들이 잘 모를 것 같은데. 필명을 '갯강구'로 쓰는 이유가 궁금해요.
"저는 다 알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 갯강구를 잘 모르더라고요. 갯강구가 뭔지 아는 사람들은 저보고 대뜸 '여수 출신'인지 묻기도 하고요.(웃음) 학생 때 독립출판으로 여행 그림책을 그리면서 평범한 저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갯강구를 선택했어요. 다른 작가들의 캐릭터와 겹치지 않고, 초성도 'ㄱㄱㄱ'이라 어감도 강해 보이고, (웃음) 유니크한 것 같아 쓰다 보니 갯강구가 되어있더라고요. 클라이언트들이 저를 갯강구라고 부르기 민망해하는 것 같아 본명을 주로 쓰고 있는데, 개인 작업할 때는 여전히 갯강구를 같이 쓰고 있어요."
- 공간에 대한 시선이 남다른데, 서울에 관한 생각이 궁금해요.
"음. 한국 사람들은 서울이 '너무 빨리 변하는 게 아쉽다'는 얘기를 많이 하면서 동시에 '서울에 뭐 볼 게 있냐?'는 얘기들을 해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해외에서 친구들이 서울 오겠다고 하면 '뭐 볼 게 있다고 오냐'며 손사래를 쳤어요.
한번은 외국인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서울이 지금 세계에서 가장 재미있는 도시인데 왜 오지 말라고 하느냐는 거예요. 그래서 서울이 왜 재밌냐고 물었더니 "빠르고 모든 게 많고, 폭발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곳이 서울"이라고 하더라고요. 서울이라는 공간에 사는 사람들은 서울이 소비적이고 사람을 쫓아내는 속도가 빨라 서운함을 느낄 수 있는데, '좋다', '나쁘다'라는 가치관을 떠나 빠른 것 자체가 이미 정체성이 되어버린 그런 도시 같아요."
- 항상 젊은이들만 선호하는 도시인 것 같기도 하네요.
"맞아요. 서울은 홍대, 이태원 등지로 20·30대 젊은이들을 다 끌어들였다가 30대를 지나 40대가 되면 경기도 근교로 내쫓아버리는 도시예요.(웃음) 서울이 선호하는 연령대가 딱 정해져 있죠. 20·30대가 지나면 '에이 너희 언제까지 여기 살 거니? 조용한 데 나가서 살아'라고 얘기하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과의 연대, 사람에 대한 애정 아닐까
- 가장 최근작이 만화라서 놀랐어요. 로컬 만화 프로젝트 <지역의 사생활 99>에 참여했는데. 어떤 프로젝트인가요?
"제가 사람을 잘 못 그려서 픽션은 안 하려고 했었는데요. 그렇게 피했던 사람을 직접적으로 그리게 되었네요.(웃음) 일단 <지역의 사생활> 시리즈는 수도권 외 지역에 관한 이야기예요. 요즘 나오는 대부분의 문화 작품이 서울 중심으로 진행되는데, 군산, 인천 같은 비(非)서울 지역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시작하게 된 단편 프로젝트죠. 저는 시즌 3에서 2199년 속초를 배경으로 SF를 썼어요. <도사의 계절>이라는 만화에요."
- <아침으로 곤충을> 세계관에 따르면 2199년 속초는 이미 바다에 잠겨야 하는데. 세계관 충돌 아닌가요?
"원래 잠겨야 하는데.(웃음) 아무래도 SF의 가치는 디스토피아(Dystopia)적인 미래를 상상하는 것보다는 희망적인 미래를 상상하는 게 가치가 있지 않나 싶어서 그쪽으로 방향을 잡았어요. 기후위기를 어떻게 잘 극복했는지,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서사를 만들었죠. 그 과정은 정말 어려웠는데요, 하고 나니 앞으로 작업을 발전시키려면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가진 작업을 하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사람 그리기를 어려워하는 작가가 사람을 그리게 된다면 앞으로는 화풍이 좀 바뀔 가능성도 있는 건가요
"혼자 했던 생각인데, 제 작품은 좋게 말하면 가치중립적인 것 같아요. 다르게 말하면 무균실의 느낌도 있고요. 하지만 이렇게까지 무균실 같은 작업을 계속해도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은 오래전부터 갖고 있던 터라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을까 싶어요."
- 마지막으로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직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현직자로서 조언 한 가지 해준다면요.
"가끔 일러스트레이터 대상으로 강의를 하면 여러 가지 질문을 받아요. '어떻게 하면 작업 의뢰를 받을 수 있어요?'라던가 '데뷔(debut)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라는 질문이 많아요.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직업은 대개 기회가 불시에 찾아오고 운이 작용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는 그런 기회가 왔을 때 잘 소화를 했고, 그래서 지금까지 계속 직업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클라이언트가 기회를 줬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마감을 잘 맞추는 것이라 생각해요. 저는 맡은 프로젝트를 깔끔하게 끝내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런 부분들을 중점적으로 준비해가면 좋을 것 같아요."
덧붙이는 글
글 김동환 참여사회 편집위원, 사진 장은혜. 이 글은 참여연대 소식지 <월간참여사회> 2023년 1-2월호에 실립니다. 참여연대 회원가입 02-723-4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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